예수닮기 프로젝트(11) - 제자를 부른 예수: 왜 그들은 그물을 버렸는가?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막 1:16-20)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길에서 돈을 줍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길을 가다가 만원을 주웠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오! 땡잡았다!” 네, 정말 그렇습니다. 길에서 만원을 주우면, 우리는 횡재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길을 가다가 만원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주웠다고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어, 저금통장을 주웠다고 해봅시다. 그 통장에는 어떤 사람이 일평생 모았을 만큼의 돈이 들어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통장과 함께 도장 그리고 비밀번호가 같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런 글이 남겨 있습니다: “난 이 통장을 버렸소.”
이럴 때 우리는 땡잡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횡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통장 주인을 생각합니다. 아니 이 사람에게 뭔 일이 생긴 건가? 혹시 자살하려고 하나? 혹시 죄를 지어서 쫓기고 있나?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바로 이점일 겁니다: 아니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2000년 전 갈릴리 해변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통장 못지않게 소중한 배와 그물을 버린 사람들의 뒤를 쫓아가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읽을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함께 본문의 말씀을 읽어봅시다(막 1:16-20[개역개정]):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배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우리가 읽은 말씀은 엄청난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상당히 짧습니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배와 그물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상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상상 말입니다: “왜 시몬과 안드레는 예수님이 5초도 안 되는 짧은 말에 넘어갔던 것일까?” “혹시 시몬과 안드레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꼈나? 혹시 수영을 못해서 물을 무서워하는 그런 사람이었나?” “혹시 예수님이 초능력을 사용해서 시몬과 안드레에게 최면을 걸었나?”
이러한 상상은 삼류 영화에나 가능한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본문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상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우리는 본문에서 충실하게 그 말하려는 것을 찾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과 함께 ‘왜 그들은 그물을 버렸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것입니다. 저는 단지 그물을 버린 사건을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그리고 이 본문과 연결되어있는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있는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갈릴리의 권세있는 자
마가복음이 가르쳐주는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고기잡이를 하찮게 여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그 어떠한 심경의 변화에도 마가복음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은 단지 한 가지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들이 배와 그물을 버렸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의 관심은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을 집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권세’였습니다(22,27절):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권세[개역])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권세[개역])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그렇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권세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에 권세가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통해서 그의 행동에도 권세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말은 예수님 스스로가 주장했던 권세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소문난 존재였던 것입니다. 바로 권세있는 자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출발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권세였습니다. 이 권세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권세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잠깐 멈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급하게 본문을 넘어간다면, 마가복음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잠깐 멈춰서 무엇을 생각해보아야 할까요? 저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갈릴리 바다의 장소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언제부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까? 제자들이 그물을 버렸던 것처럼, 나도 혹시 그 무엇을 버렸는가? 시간과 물질? 열정과 내 청춘?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것들을 버렸을까? 나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기대했는가? 바로 이런 것들이 제자들에게도 물어볼 수 있는 내용일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통치에 일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의 갈릴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엉뚱한 방향으로 성서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갈릴리는 이방인들이 세운 곳으로 쉽게 말해서 예루살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시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갈릴리를 얕보았으며, “갈릴리에서는 선지자도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요 7:52). 이런 말이 무엇이냐면, 갈릴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전혀 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갈릴리라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물고기 몇 마리 잡아서 입에 풀칠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배우지도 못했으며, 위대한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할아버지가 평생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다가 죽었으며, 그들의 아버지가 평생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다가 죽었습니다. 그들도 평생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밖의 세상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에, 그들이 즉각 순종했던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개천에서 용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나를 따라오라’라는 말은 당시 랍비들이 제자들을 선택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당시 랍비들의 전형적인 방식과 180°다릅니다. 왜냐하면 당시엔 제자들이 랍비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먼저 랍비를 좇아와서 ‘나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라고 할 때, 대답이 바로 ‘나를 따라오라’라는 것입니다. 바로 요한복음 1장 38절의 경우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당시의 랍비들이 자신의 제자를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그 무언가가 있던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그것은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아주 쉽게 이해합니다. ‘내가 너희로 전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리라’라고 말입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믿음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시켜라’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어부였던 시몬과 안드레가 과연 그렇게 이해했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이 전도자의 사명을 깨달았을까요? 물론 성서를 전체로 볼 때, 예수님은 이런 의도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은 어부입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낚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낚은 물고기로 무엇을 할까요? 물고기를 가르칠까요? 물고기를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시킬까요? 아니오! 그들은 자신들이 잡은 물고기를 자기들 마음대로 처분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시장에 내다 팔고 싶으면 팝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물고기에 대한 어부들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세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장관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손에서 그물을 즉시 ‘버렸던’ 것은, 그 대신에 자신들의 빈손에 ‘채울’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더 멋졌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이후의 마가복음에서 자신들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의 진면목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33-34절):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이 버린 것이 배와 그물이었다면, 대신에 그들은 버려진 그 자리에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꽉꽉 채워 넣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으로 성공하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시골 갈릴리에서 서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의기양양했으며, 자신들의 야망을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버나움에서 드디어 한바탕 터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정복자 로마 군사들을 내쫓고 썩어빠진 거짓 제사장들을 내몰아낼 때, 내가 예수님의 오른손이 되겠다는 것입니다(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답답해하십니다. 제자들이 김칫국을 먹어도 한참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됩니다(38절):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또한 어떤 제자는 자신이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28절):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묻습니다. 정말로 버렸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버린 것인지 묻습니다. 정말로 예수를 위해서 버렸다면 그런 교만한 말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31,3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버렸느냐? ... 그렇다고 할지라도 너희는 나중이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이 본문에서 부름받은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아셨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그 대신 더 큰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중심을 전합니다(33-34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했다고 합니다(32절). 그들이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는 구원자이어야 합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억압받는 우리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다윗을 따라다녔던 세 명의 용사들이 다윗이 왕이 될 때 중요 지위를 차지했던 것처럼, 그들도 높은 자리를 얻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던 겁니다.
사실, 제자들이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착각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잘못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마가복음 15장에서만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무려 5번 나옵니다. 십자가에 걸려있는 예수님의 죄목은 다름 아닌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15:26).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었습니다(11:9). 사람들은 성서를 절반만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신 것뿐인데(슥 9:9),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의 나라를 구원해줄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멀리 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가까이 동행했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오해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덕을 보려고 했던 겁니다. 그들이 그물을 버린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 당신 덕 좀 봅시다.”
제자도: 예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동안 아껴왔던 그물을 버렸지만, 실상 그들은 더 큰 그물을 손에 쥐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덕 좀 가득 잡으려는 그물 말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봅시다: 나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기대했는가? 나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왜 이런 것들을 버렸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인가?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지금 ‘제자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닮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예루살렘의 십자가까지 인도한 그 모든 것이 바로 제자도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제자들에게 제자도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제자도, 제자로서의 그 어떠한 길도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냉정한 평가는 사실 마가복음 자체가 내리는 결론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제자의 길,’ 제자도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그물과 배를 버렸다고 해서, 그것이 제자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제자도하면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위장된 제자도에 불과할 것입니다(10:28-31, 35-45를 깊이 묵상해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물과 배를 버려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제자도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제자도는 예수님이 가는 길을 따라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로서의 길, 즉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원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 단지 그 길을 따라오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네가 걷는 그 길이, 나를 따르고 있는 길이냐?
사랑하는 여러분, 마가복음은 제자도를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달리 말해서 ‘길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침례요한의 선포로 시작합니다(1:2). 이 길에서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좇는 제자가 됩니다(10:52). 이 길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8:27). 그리고 이 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10:32). 그들은 길에서 예수와 함께 하면서 울고 웃었으며, 신앙의 성공과 씁쓸한 실패도 경험했습니다. 잘해도 길이었고, 못해도 길이었습니다. 어찌되었건 길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길에서 예수를 따라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 제자도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므로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기도제목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나를 사용하옵소서라는 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마가복음을 가르치면서 신앙에 대해서 간단한 출발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앙은 완성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 앞에 주어진 길을 예수님과 함께 그냥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끝없는 것만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무엇인가를 버리는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단지 주님의 말씀처럼,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두렵습니다. 과연 내가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마가복음의 은혜가 놀라운 것입니다. 분명히 마가복음은 자격 미달의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자도는 제자들이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결국 그분이 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실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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