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닮기 프로젝트(13) -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것처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막 2:18-22)
말씀에 대한 바른 열정을 갖자.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많이 보고 또 들었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22절에서 우리는 너무나 익숙한 표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이 말은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라도 많이 들어봤을 정도로 익숙한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아마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마음가짐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신세대들이 빠르고 현란한 음악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을 가지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이 말이 나이 든 구세대들에게는 썩 반갑지 않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왠지 새 부대가 아니라 낡은 부대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읽고 마음에 깊이 두고 있는 말씀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구절이 정말 그런 뜻일까요? 예수님이 세대 차이를 느끼시면서 하신 말씀일까요? 예수님이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시하고 새파란 젊은이들만 좋아하신 것일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럼 과연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모르고 있는 이 말씀을 풀어드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의 의미를 지도해 드릴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러한 일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마 15:10; 16:12; 행 8:30-31).
성서에 대한 열정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에게도 가장 기쁜 시간은 말씀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연구라는 말을 너무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서 부정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을 의지하면서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밤을 새며 책을 뒤져보고 원어를 읽고 묵상하는 모든 노력이 바로 말씀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여러분의 몸을 의사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의사는 최소한 7년 이상을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을 몇 번이고 해부하고 꿰매고 하는 훈련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의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말씀을 연구하는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의사의 자격이 주어지기 위해서 최소한 7년이 걸린다고 하지만, 말씀을 해석하는 자격은 70년이 걸려도 주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말씀을 동일하게 성도들에게도 깨닫게 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들고 섭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단순히 피상적으로 입에 붙는 성경구절이 아니라, 정말로 예수께서 원하시는 참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르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저는 시간이 주어지는 한 여러분들에게 계속해서 마가복음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이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짧고 표현도 매우 간결합니다. 그렇다고 마가복음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해하기 정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굉장히 치밀하게 맞추어진 조각처럼 잘 짜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읽어내려가다가는 마가복음 특유의 완벽한 모양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마가복음의 독특한 모양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마가복음만의 독특한 성격을 알게 되고 그래서 마가복음을 더욱 온전히 깨닫고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르게 읽는 것입니다. 빠르게 읽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읽는 것입니다. 바르게 읽는 것이란 다름이 아니라, 말씀을 이야기 단위대로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겁니다. 말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전화를 하는데 상대방이 여러분의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 중간에 끊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처럼 기분 나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필요한 부분만 읽는 것은 전화통화하다가 내 마음대로 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 단위대로 읽을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대부분의 한글성서는 새로운 이야기마다 빨간색 원으로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2:18-22을 읽은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금식과 관계가 있다.
18절은 금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 바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 이유가 바로 ‘금식’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금식하면 기도원에서 하는 금식기도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영성회복을 위한 필사적인 영성훈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금식’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금식은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간구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금식은 스가랴 8장 19절에 보면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4월, 5월, 7월, 10월에 금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 잡혀서 포로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고 로마의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라는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금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금식’과 연관시키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했던 금식에 대해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했더라도, 이제는 아니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일어나고 있으니 이제는 금식의 때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보라.
정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역사한다! 그러니 더 이상 다른 생각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하고 있을까요? 아직 눈앞에는 로마의 군사들이 서슬 퍼런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하고 있는 걸까요? 아직 세상은 돈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자가 뒤흔드는 것 같은데, 정말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하고 있는 걸까요?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은 우리 식구가 있어서 교회 다니는 나를 조롱하고 핍박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하고 있는 걸까요? 아직 나의 상급자는 회식만 하면 내게 술을 권하면서 위협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하고 있는 걸까요? 정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역사한다! 그러니 더 이상 다른 생각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이것이 마가복음 2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의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인 오늘의 본문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마가복음을 이해하기 쉽도록 마가복음만의 힌트를 드린다면, 마가복음은 과녁과도 같습니다. 즉, 중앙에 핵심적인 메시지가 있고, 그 메시지를 더욱 돋보이기 위해서 주변에 이야기를 배치시키는 구도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 16장인데, 그 중심인 8:35이 마가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볼 때, 2:1-3:6이 그냥 아무렇게나 기록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짜 맞추어진 메시지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1-3:6은 다섯 개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2:1-12로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죄사함의 권한이 예수에게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으며, 그 때문에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죄사함과 치유. 두 번째는 2:13-17로 레위를 불러서 함께 식사하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 역시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거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죄사함과 식사. 세 번째는 2:18-22로 이 부분이 과녁의 정중앙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풀어드리겠습니다. 네 번째는 2:23-28로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안식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을 ‘하지 못하는 날’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하는 날’로 고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안식일과 식사.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3:1-6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역시 안식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을 ‘생명을 구하지 못하는 날’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생명을 구하는 날’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안식일과 치유. 이렇게 해서 2:1절에서 시작되었던 가버나움에서의 일들이 3:6에서 예수를 잡아 죽이는 계략으로 마무리되며, 3:7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장소인 갈릴리로 옮기는 것입니다.
조금 복잡할 수 있지만, 다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구절을 깨닫고 싶어서 말씀을 보다 깊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씀은 ‘금식’과 관련이 있으며,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동안 잘못 생각했던 것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불어넣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는 ‘죄사함’의 문제로 나타났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안식일’의 문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죄사함’을 위해 오신 예수님에게 ‘당신은 그럴 권한이 없소’라고 정죄했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당신은 그럴 권한이 없소’라고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직접 보여주십니다. 즉,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으로서의 권한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첫 번째와 다섯 번째의 치유사건이고, 두 번째와 네 번째의 식사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보라.
새 포도주는 단순히 새 부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이 왔건만 아직도 낡은 부대를 가지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들은 금식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죄문제와 안식일이라는 절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인간적인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면,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는 예수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 안에서는 인간적인 종교적 노력은 사라져야 합니다. 내가 죄사함의 기준을 만들고 내가 종교적인 절기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은 원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치유-구원-케 되며(첫 번째, 다섯 번째), 또한 예수와 함께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한 가족-성령충만-이 되는 것(두 번째, 네 번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본문의 아이러니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막았던 그 사람들의 정체가 다름 아닌 종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요한의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도전을 줍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치유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 입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케 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말씀의 풍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인 빈곤함만 가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케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합시다. 우리에게 영적인 풍성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합시다.
믿음은 금식의 때에 새 술에 취하는 삶이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현실은 정말로 금식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더욱 고차원적인 믿음의 삶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이 가르치는 믿음은 “지금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인 예수님으로 인해서 금식을 그치고 새 술에 취해 잔치를 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믿음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기쁘게 살아가는 마음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쁨과 감사로 누리는 것만 필요합니다.
놀라운 점은 마가복음은 실제로 낡은 부대가 찢어지는 것을 똑같은 단어로 다른 부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2:11; 15:38;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은혜의 결정판입니다. 새 포도주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성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임했던 방식은 깨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은 지성소에 구름으로 갇혀있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친밀한 교제를 가졌던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이 제자들 안에 임재해서 뜨거운 영적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새 술에 취했도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입니다(행 2:13). 새 술에 취한 사람들, 바로 여러분이 새 부대가 되어서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여러분들의 작은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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