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예수닮기 프로젝트(10): 예수의 첫 선포-하나님의 나라의 초대와 환영

진실과열정 2007. 2. 28. 14:06
 

예수닮기 프로젝트(10) - 예수의 첫 선포: 하나님의 나라의 초대와 환영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4-15)



시작이 반이다.


        사랑을 쓸려면 연필로 써야합니다. 왜냐하면 쓰다가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고백을 해봤던 분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노랫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서 잘 써보려고 해도 한 줄 쓰다가 그만 종이를 구겨버리고 말죠. 아마 더 어려운 사랑 고백은 직접 말로 하는 것일 겁니다. 이때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못합니다: “저기...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이것이 계속 연발될 뿐이지요. 혹시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슨 말로 사랑 고백을 시작했는지요. 그리고 혹시 무슨 말을 처음으로 들으셨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의 탄생과 침례, 그리고 시험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진주구슬과 같습니다. 그런데 ‘진주들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말씀들은 잘 묶여져야 합니다. 특별히 잘 묶여야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이 시간이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살펴볼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진주들은 하나로 묶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의 첫 번째 선포를 우리는 볼 것입니다. 사랑 고백을 할 때 그토록 힘들었던 첫마디처럼, 오늘 예수는 하나님 일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토록 힘든 첫 마디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예수가 하려는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는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서 예수의 사역에 대한 흐릿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어떤 모양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이 되는 침례를 받았고(“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 1:11]”), 사탄의 시험에서 하나님의 진짜 사람임을 확인받았던 것입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 4:3]”-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서). 이제 예수는 본격적인 사역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대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려는 하나님의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이렇게 간절히 기대하면서 본문을 읽게 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가 하려던 하나님의 일이란 다름 아닌 복음의 전파였습니다.


복음: 하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


        우리는 여기에서 잠깐 멈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숨고르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분들이 복음전파라는 말을 듣고, 성서가 말하려는 것을 더 이상 듣지 못합니다. 즉, 복음전파에 대해서 이미 답을 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전파를 알고 있습니다(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러한 구원을 받기위해서 죄인됨을 고백하는 것,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것,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성령이 영원히 함께하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세밀하고 체계적인 단계를 밟아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이러한 구원, 이러한 복음전파는 복음서보다는 바울 서신에서 나타납니다(누가복음[사도행전]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아마도 체계적인 구원과 복음전파의 세부적인 내용은 특별히 로마서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정리하는 16장 25절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복음전파’)함은 ... ” 여기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바울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바울의 심오한 신학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말씀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렇다면, 바울의 복음과 예수가 전파했던 하나님의 복음은 서로 다른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차이를 알지 못하면 복음 자체를 오해하게 됩니다. 바울의 복음과 예수가 전파했던 하나님의 복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그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서로 달랐다’는 점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은, 이방인은 토라(모세오경)를 모르고 다윗을 모르며, 이사야와 다니엘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이방인은 야웨(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복음을 쉽게 바꾸었던 것입니다(내용이 아닌 옷을 바꿈). 그것이 바로 ‘나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는 바울의 복음을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하면 바울서신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의 죄인됨, 십자가의 대속, 예수 영접, 하나님의 양자됨, 성령의 내주’같은 내용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이 처음으로 선포되었던 그 장소로 말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에서 큰 도전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나의 복음’을 선포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일까요?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이 2000년 전에 반드시 들어야 했던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일까요?


복음: 과연 기쁜가? 정말로 즐거운 소식인가?


        복음(福音)을 쉽게 풀어 말하면 기쁜 소식입니다. 물론 한자어로 된 말을 우리말로 풀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사람들이 들으며 가졌던 느낌과 약간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 원어에 나오는 복음(유앙겔리온[εύαγγέλιον])도 지금 우리가 말하는 ‘기쁜 소식’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신약시대의 ‘유앙겔리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기쁜 그런 일에 쓰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쁘고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앙겔리온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news)을 말할 때 사용되는 특별한 단어였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히브리어로 쓰인 삼상 31:9; 삼하 11:18에 대한 헬라어 번역본[LXX]을 보면,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앙겔리온의 용례를 알 수 있다).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군사들을 무찌른 병사가 고향 사람들에게 그렇게 전하려고 했던 말, ‘고향 사람들,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라는 이 말이 바로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 곧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정말 듣고 싶은 그런 내용이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이겼다.’ 혹은 ‘로또를 해서 100억을 땄다.’ 혹은 ‘아파트 값이 두 달 새 1억이나 올랐다.’ 혹은 ‘우리 남편이 부장으로 승진했다.’ 혹은 ‘우리 아이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혹은 ‘우리 사위/며느리가 해외여행을 보내준댄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이런 게 복음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복음을 들어야 기쁘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의 선포는 우리의 이러한 모든 기대를 저버립니다. 그리고 예수의 선포는 역시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도 무참하게 허물어버립니다(막 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했던 즐거움이나 기쁨은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기쁜 소식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회개하고 믿으라고 할 뿐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보다는 반대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복음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복음은 바로 ‘돌이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가 선포했던 하나님의 복음이 과연 무엇인지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이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도록 도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합시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뙤약볕에서 피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 힘들게 수확했던 곡식들을 로마의 군사들이 약탈해가는 것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하는 아들이 로마의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했던 여인들이 로마의 군사들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최고의 복음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해방입니다. 로마의 신에게 지배받는 나라에서 야웨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가 로마의 거짓 신을 산산조각 낼 것을 기다렸습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서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시켜주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최근에 쓰인 다니엘서를 통해서, 왕국을 깨뜨리는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다니엘서는 이방의 지배아래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겨내고,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꿈을 주어서 자신의 뜻을 알립니다. 즉, 세상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의 섭리아래에 있으며, 하나님은 장차 그 나라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7장에 나와 있는 꿈입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핍박할 것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고 21-22절은 말합니다: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실천하기 위해서 혁명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군사들과 칼부림을 하면서 자신들의 가족들과 재산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 가운데 장차 만나게 될 ‘바라바’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복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선포하는 겁니다: “돌이켜라.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이스라엘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사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하나님의 나라는 ‘저 천국’의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권, 즉 다스림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 천국에서 내가 나를 다스린다면 저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바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심이 이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결정하는 것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선포했던 복음의 비밀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서의 ‘열국을 산산조각 내는 하나님의 권능을 기다림’에서 돌이켜서, 이사야서의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


        하나님은 다니엘서처럼 세상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길을 선택하십니다. 바로 이사야서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53장 6절에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계획을 엿보게 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놀랍게도, ‘담당시키다’라는 말의 헬라어번역[LXX]은 마가복음 14장 41-42절의 ‘팔리우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가복음 첫 부분에서 이사야서의 말씀[1:2, 13]이 인용되는 것은 그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서를 선택하지 않고 이사야서를 선택하신 이유를 묻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해야 할 선택이며, 예수가 선포했던 복음의 비밀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실패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 피조물이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최고의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하나님의 다스림 받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돌이켜 하나님의 다스림, 통치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니엘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사야서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복음은 지금의 결단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은 세상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이 제일 꺼리는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볼 때, 우리가 그토록 기대했던 길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길로 이끄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방식에 우리는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식에 순종합니다: 예수는 언제나 자신의 고삐를 하나님께 내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라고 하면 예수는 침례를 받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예수를 이끌어 광야로 내차도 예수는 이끌려 갈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예수의 철저한 순종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예수는 요한이 사로잡히기 전부터 제자들을 부르며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예수의 사역이 “요한이 잡힌 후에”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 움직였던 수동태의 사람이었습니다. 수동태의 사람-이것이 예수가 보여주려던 삶입니다. 마가복음의 공동체는 바로 이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결단입니다. 복음은 삶의 패턴을 바꾸는 결단입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었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려는 일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오만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전혀 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하실 일에 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예수는 이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시간에 다룰 ‘제자를 부른 예수(누가 그물을 버렸는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