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닮기 프로젝트(8) - 쫓겨난 예수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 1:12-13)
짧고 굵은 말씀
우리는 이번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시험받은 예수에 대한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시간은 마가복음의 말씀만 생각해볼 것이며, 다음 시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시간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신앙의 비밀을 발견하고 깨달게 될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예상 밖의 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내용이며,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다음 시간에 나눌 게 될 것으로, 신앙인에게 성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해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첫 번째 주제에 집중해보도록 합시다. 마가복음 1장 12-13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무나 짧습니다. 너무도 짧아서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우리는 아마 14절을 읽어버릴 정도입니다. 그리고 기나긴 1장을 읽어내려 갈 때면, 시험받은 예수에 대한 내용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말 정도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서를 많이 읽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성서를 많이 읽는 사람보다 성서를 깊이 읽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많이 읽어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3장 14절에는 “읽는 자는 깨달은진저”라고 기록할 정도입니다. 사실, 마가복음의 큰 주제 중에 하나가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말씀처럼 짧은 구절 속에서 엄청난 비밀이 들어있음을 기대하고, 영적인 짜릿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맞이해야할 것입니다.
짧고 굵은 말씀 - 그 메시지를 찾아서
일단 쉬운 질문부터 던져봅시다. 우리가 읽은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우리는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다” 정도로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읽은 이 짧은 말씀에서 과연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아니, “이 짧은 말씀이 정말로 우리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준다”라는 믿음이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짧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이 말씀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짧은 말씀이지만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또 믿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짧은 말씀이 나에게도 메시지를 주었던 것처럼, 이 말씀을 처음으로 받아야 했던 기독교 공동체, 즉 마가복음을 받아야 했던 최초의 공동체에게도 역시 메시지를 주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필요로 인해서 마가복음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에 대해서 꼭 들어야만 했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심각하게 고민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그 메시지를 찾아서 - 새로운 그림
우리가 본문의 메시지를 깨닫기 위해서 버려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것에 대한 여러분의 지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본문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사십일 동안 금식하고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돌을 명해서 떡이 되게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보라, 천하를 보여주고 자신을 경배하라고 함), 예수님은 이 모든 시험들을 말씀으로 이겨냈다.”라는 내용 말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러한 그림을 머리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그러한 그림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세 가지 시험이 없습니다. 금식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시험을 이겼는지에 대한 결과도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머리에 있던 옛 그림들을 모두 내 버리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보도록 합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어떻습니까? 어떤 그림이 그려집니까? 저는 이제 여러분이 그린 그림을 보다 자세하게 만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몰아내신지라’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처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을 어떻게 그려보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라면 ‘몰아내신지라’라는 말을 어떻게 바꿔 말하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원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겁니다. ‘몰아내신지라’의 원어는 ‘에크발로(εκβαλλω)’입니다. ‘에크발로’의 뜻은 ‘밖으로 차내다(에크+발로)’입니다. 그래서 원어를 외우기를, ‘에크발로, 발로 차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축구선수가 공을 차서 같은 편 선수에게 패스하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닙니다. ‘에크발로’라는 이 말은, 아무 필요 없는 그런 것을 밖으로 차내 버리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마가복음 1장 34절에 “... 귀신을 내쫓으시되(에크발로)...”에도 쓰인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해된 첫 번째 그림에서 우리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차 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자상한 성령이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광야까지 인도했을 것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섬뜩할 정도입니다. 성령은 쌀쌀 맞을 정도로 무심하게 예수를 광야로 ‘차 내 버린’ 것입니다.
광야는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요?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모를 잡초’들이 무성한 그런 운치있는 곳일까요? 아닙니다. 이 시대에 광야는 저주받은 곳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땅 즉 광야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이며,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광야는 사단이 지배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광야를 이렇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런 그림입니다: 성령은 쌀쌀 맞을 정도로 무심하게 예수를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사단의 처참한 횡포만이 가득한 곳’으로 차 내 버렸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말 성서는 “예수”라는 이름이 나와 있지만, 원어에는 “예수”라는 이름도 없습니다. 단지 “그를”입니다.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마가복음을 처음으로 받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것을 배웠습니다(9-11절). 그런데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을 듣기까지 했던 예수님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성령이 쌀쌀 맞을 정도로 무심하게 ‘그를’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사단의 처참한 횡포만이 가득한 곳으로 차 내 버렸다니!’
첫 번째 메시지 - 성령은 우리를 광야로 내몰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마가복음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내몰았듯이, 성령은 우리 역시 광야로 내몰아낸다.’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말씀은, ‘침례를 받고 시험받았듯이 우리도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마귀의 시험을 조심해야 한다’라는 메시지가 전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으로 내몰려지는 환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인 것입니다. 사실, 마가복음을 처음으로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그런 세상으로 내몰려졌던 어려움에 닥쳤습니다. 마가복음의 중심 구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8:34,3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말은 신앙을 멋있게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을 들어야했던 사람들에게 이 말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시험은 마가복음의 신앙인들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영광의 황금길을 걷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성령이 그를 광야로 내몰아냈던 것처럼, 자신들도 광야, 즉 순교의 장소로 내몰아쳐질 것을 받아들이는 선택이었던 겁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 교회의 ‘예수님을 닮는 성도가 되자’라는 표어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 -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13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3절을 매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한다면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그려왔던 본문의 그림이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살펴볼 부분이 두 개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는 사십일 내내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십일을 금식하고 난 후에 사단이 왔다는 그림은 지워버리십시오.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은 사십일 내내 시험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횟수로 셀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게다가 시험의 결과는 나와있지도 않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모두 이겼다는 명쾌한 대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조심스럽게 읽어야할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의 공동체는 지금 끝없는 시련 속에 있습니다. 시련이 어떻게 끝날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어제 시련을 당했던 초대 교회는 오늘 시련을 당합니다. 분명히 그들은 내일도 시련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놀라운 그림이 바로 13절 하반절에 드디어 등장합니다. 바로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구약의 배경을 이해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 열쇠는 바로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정말 어려운 내용이지만, 간단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신약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말씀이 바로 이사야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서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의 사람들이 로마라는 새로운 압제자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가 이루어지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2절에 복음서의 시작을 다름 아닌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이 차지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17절은 이렇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회복된 이스라엘에게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곳이며 뱀이 흙을 양식으로 삼는 곳으로,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런 곳’입니다(25절).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에 의해서 깨진 창조질서가 이사야 65장에는 회복될 것으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약시대의 사람들이 주로 읽었던 글에는 천사들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공양했다는 내용이 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 1장 13절 하반절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야수들의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에서 예언되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수종들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를 공양했듯이 천사들은 예수를 공양했고, 그러므로 예수야말로 새로운 아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은 13절 하반절은 단순히 예수가 광야의 동물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엄청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바로 예수님이 하고 계시다!’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또한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닮기 위해서 순교의 십자가를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계속되는 시련 가운데 이러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쫓겨난 예수 - 그를 닮는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예수믿고 복받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마가복음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믿고 복받는 삶이라는 것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복받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복이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신앙공동체는 예수를 믿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광야로 내몰려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끝없을 것만 같은 사단의 계속된 시험을 당당히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몰려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람들, 그들은 바로 이것을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영어로 복은 Bless입니다. 이 Bless의 어원은 Blood에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바로 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000년 전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지금 광야에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내쳐질 정도로 버림받았다고 생각되십니까? 혹시 여러분이 끝이 없는 고난의 터널 속에서 해매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2000년 전에 작고 가난한 마가공동체에게 들려졌던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을 살렸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지금 여러분의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끝없는 암흑의 터널 속에서도 이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예수를 닮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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