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닮기 프로젝트(7) - 예수의 침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 3:15)
예수의 침례-“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셨던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일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마태복음의 기록을 통해서 예수께서 받으신 침례의 의미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고, 그 사랑이 또한 나에게 어떻게 나타나야할지를 고민해보는 뜻 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마태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가복음을 읽어보도록 합시다(막 1:9-11):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이란 먼 지역에서 요단강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물에서 올라왔다’라고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세례가 아니라,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어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누가복음의 기록도 마가복음과 거의 비슷합니다(눅 3:21-22).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셨을까? 왜 다른 곳에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예를 들면, 다음에 보게 될, 사단과의 혈투를 마치고, 아니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마치고 하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나서야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침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의 침례-사회 변혁의 통과의례
여러분이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침례는 침례 요한이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침례 요한 이전에 이미 침례라는 것이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침례는 일종의 ‘통과의례’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새신자가 우리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하려면 5주 동안 ‘새신자훈련’을 받아야 하듯이, 어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가려면 침례라는 것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구약의 레위기부터 시작해서 신약시대 바로 이전에 나타난 쿰란공동체라는 사람들을 살펴보아야할 만큼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침례라는 통과의례를 거침으로써, 그 사람은 그 조직의 법칙에 순종하겠다는 외형적인 약속을 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침례는 유대인들의 통과의례였습니다. 죄 사함의 침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믿음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기적인 절기(예배)를 지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안식일, 유월절, 장막절과 같은 크고 작은 절기들이 민족 전체에게 해당된다면, 침례는 개인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침례는 개인적인 일이며, 그래서 더욱 실제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즉, 유대인의 법인 토라(오경)를 잘 지키며, 이것을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확실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게 만드는 의식이 바로 침례였던 것입니다(눅 3:10-14).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통과의례였는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도 사회의 법칙을 따라서 일원으로서 살기 위해서 침례를 받은 것인가? 예수님도 토라를 잘 지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결단을 보여주기 위해서 침례를 받은 것인가? 그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후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이러한 목적에서 침례를 받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의 침례가 사회에 순응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였다면, 예수님은 오히려 사회의 질서를 역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4:2). 당시의 침례가 토라를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겠다는 결심이었다면, 예수님은 오히려 토라를 어기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마 12:10). 그렇다고 예수님이 엉터리 삶을 사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신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질서에 단순하게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정으로 지켜야할 법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통과의례라는 의식에 스스로 자기 몸을 던진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복음서 설교가 계속되면서 자세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예수의 침례-신이 사람이 된 사건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의 통과의례였던 침례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통과의례는 인류 역사상 딱 한번만 존재했던 그런 통과의례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사람이 되는 것을 모든 만방에 보여주는 그러한 통과의례였기 때문입니다.
침례는 죄사함의 침례입니다(마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더니” 다시 말해서 침례는 죄가 있어야만 시행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침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침례가 전혀 필요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 3: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나 그 분은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죄가 없지만, 그래서 침례가 전혀 필요치 않지만,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는 신이었지만, 그러한 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 분은 고상한 성인군자가 되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진짜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진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예수님이 받으신 역사상 한번 뿐인 침례였던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만류에 대해서, 마태복음 3장 15절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의’라는 것입니까? 신이 자신의 고귀한 자리를 버리고, 자신의 순결한 자리를 버리고, 비천한 자리에 오는 것이 바로 ‘의’라는 것입니다. 불결한 자리에 오는 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서러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서러움이 무엇인지, 실패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슬픔이 무엇인지, 분노가 무엇인지, 좌절이 무엇인지 아는 진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바로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진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늘의 천군천사를 보디가드로 붙여서 이 땅 위에서 호위호식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외로운 한 사람으로 구원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사람이 되는 것.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신은 신이기 때문에 침례를 받을 수 없다’라는 침례 요한의 충정어린 만류를 기어코 이긴 것입니다.
예수의 침례-재구성
저는 이것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봅니다: 멀고 먼 갈릴리에서 한 사람이 먼지를 일며 걸어온다. 그 분은 나사렛 예수이다. 요단강을 앞에 두고 예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지금 예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차가운 요단 강물이 예수의 발목을 삼킨다. 여기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나의 나됨이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이것은 나를 망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본다. 하늘은 막혀있다. 아무 말도 없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요단 강물을 내려다본다.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조용히 물속에 들어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막히는 것을 알고 본능적으로 물을 박차고 올라온다. 예수의 온 몸은 젖어있다. 예수의 머리와 얼굴에서는 물이 떨어진다. 그런데 계속해서 떨어지는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 눈물이다. 예수는 생각한다. ‘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하늘을 본다. 막혔던 하늘은 열렸다. 빛이 비춘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와 예수를 감싼다. 이제 예수는 외로운 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는 결코 슬프지 않다. 물에서 나오면서 하늘은 이제 전혀 다른 빛을 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제 예수는 바람이 이는 광야를 바라본다.
예수의 침례-마태의 예수
한편, 누가복음과 다르게, 마태복음은 이렇게 ‘의’를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의’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러고 보면, ‘의’라는 것이 이 전에도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을 소개할 때, ‘의’라는 말을 썼습니다(마 1:19). 이것은 유독 마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상대로 쓴 복음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의 뿌리(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의를 모세의 율법(토라)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옷에 611개의 술을 만들어 붙이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토라(הרות)의 숫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이것에 정면으로 대결합니다. ‘의’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의’는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의’는 단순하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원칙이니까!’ 원칙을 지키는 것만이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침례를 통해서 가르치고 싶은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의’는 그 분이 신이기 때문에 전혀 침례가 필요치 않고, 심지어 신이 침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원칙에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의’라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자와 결혼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했기 때문에,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의’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우리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2000년 전에 몸소 보이셨던 ‘의로움’을 본받아 행하는, 예수님을 닮는 성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같은 외형적인 것에 붙들린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원칙에 벗어난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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