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에 들어가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참으로 많이 들어왔으며, 또한 성경공부도 많이 했던 말씀들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제목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서 대응되는 등장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 모세와 바로왕, 삼손과 드릴라, 사울왕과 다윗, 다윗과 골리앗… 그렇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등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인과 아벨’도 참으로 반대되는 등장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 각각의 소득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즉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자신들의 제사에 서로 다른 반응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인은 부정적인 반응에 분하여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아우 아벨을 쳐죽이고 맙니다. 이에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자가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가 되어 에덴 동편인 놋 땅에 살게 됩니다. 그렇지만, 가인은 복수를 면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표를 얻게 됩니다.
이 것이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이야기식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앞에 여러 가지 질문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누구랑 결혼했을까?” “가인이 받았다는 그 표는 무엇일까? 혹시 이마에 문신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가인은 어떻게 아벨을 죽였을까? 돌로 쳐죽였을까? 목졸라 죽였을까?” “왜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었을까? 알다시피 육식은 노아홍수 이후에 허락되었다고 창세기 9장 3절에 나와있는데 말이야.”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예배태도를 말하는 것일까?” “본문말씀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뜻일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본문말씀에 여러 가지 질문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배와 관련해서 접근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과연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들으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우선 저는 오늘 본문말씀의 경계를 정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4장 1절부터 16절까지 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원어성경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 한글성경은 이 구약원어성경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는 1-7절, 8-15절, 16-26절로 나누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의 단락은 4장 말씀 자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정형화된 형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 4장에서는 “누가 동침하여, 누구를 잉태하고, 누구를 낳았다”라는 공식이 있다는 것입니다(1, 7, 25절). 그래서, 저는 4장에서 말하고 있는대로 1-16절까지 부분을 오늘 말씀의 본문으로 잡은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듣고, 깨달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반응할 수 있는 모든 청년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말씀의 중심에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얻은자와 헛된자의 아이러니”라고 정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가인과 아벨의 아이러니”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얻은자’와 ‘헛된자’는 ‘가인’과 ‘아벨’의 이름의 뜻입니다. 특별히 가인과 아벨이라는 이름에 포인트를 둔 것은, 성경 자체에서 포인트를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본문이 되는 1-16절까지에서 ‘가인’이라는 이름은 14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벨’이라는 이름은 7번 등장합니다. 딱 절반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우’라는 단어가 정확히 7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15절 말씀에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일곱이라는 수가 나와있기도 합니다.
1) 가인: 얻은자
본문 1절에서 우리는 가인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여기에서 가인이란 이름의 뜻이 나옵니다. 즉, 원어로 카인(카인)인데, 이는 ‘내가 얻었다(카니티)’에서 파생된 이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카인, 즉 가인은 ‘얻은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십시오. 인류 최초에 탯줄을 달고 나온 사내아이를 말입니다. 가인, 그가 바로 인류에게서 최초로 ‘얻은자’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여기에 가인의 아이러니, 즉, “얻은자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그는 하나 밖에 없는 아우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는 죄의 유혹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간 무능력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7절에 보듯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8절에 죄의 유혹을 따르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동생은 첫새끼로 정성껏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고서도, 그냥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예배자이기도 합니다: 3절에는 가인의 제사에서 특별한 내용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완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9절에 보면, 아벨을 찾으시는 하나님앞에서 뻔뻔하게,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대답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 대꾸하며 불평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12절에 하나님의 심판을 달게 받지 못하고, 13절에서 보듯이, “나에게 너무 중한 벌을 내리시는군요”라고 원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가인의 정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이 사람은 ‘얻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잃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차라리 ‘잃어버려 내어버리고 싶은 자’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요? 바로 이것이 가인의 아이러니입니다. 성경은 단적으로 이것을 선포합니다: 1절에 가인은 분명히 ‘얻은자’였습니다. 그런데, 16절에 가인은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간 자’가 되고 맙니다. 이 말에서 ‘앞’은 얼굴(면전)을 뜻합니다. 즉, “여호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인류가 얼마나 빠르고 심각하고 추악하게 죄악의 늪속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되었다”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심각한 인류 고발의 현장을 다음주의 말씀인 가인의 후손, 특히 두아내를 둔 라멕의 노래에서 들을 수 있으며, 다다음주의 말씀인 노아의 홍수에서 처절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2) 아벨: 헛된자
이제 아벨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아벨이 본문말씀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벨은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인물은 가인이며, 끝까지 남은자도 가인입니다. 아벨과 관련되어있는 말씀은 가인에 비해서 많지 않습니다. 아벨은 2절에 양치는 자로 소개됩니다. 4절에 아벨이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8절에 그 형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심지어 가인은 하나님과 4번이나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내용이 한구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짓지 말라는 경고를 하셨지만, 아벨에게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이라는 이름 자체도 가인의 딱 절반인 7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괭장히 불공평하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아벨의 이름의 뜻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아벨의 원래 이름은 ‘헤벨(לבה:헤벨)’입니다. 성경은 정말로 헤벨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그 이름의 뜻도 나오는데, 헤벨이란 이름의 뜻은 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뜻을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 찾게 됩니다. 즉, ‘헤벨’이란 단어는 시편 144편 4절에 등장하는데 이렇습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습니다.” 여기에서 ‘헛것같다’가 바로 “헤벨”입니다. 이 헤벨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경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1장 2절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원어로 재미있게 표현하면, “아벨이고 아벨이며 아벨이고 아벨이니, 모든 것이 아벨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첫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온 아들인데, 살해당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땅위에서 이룬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제명에 못살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아벨은 ‘헛된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여기에 아벨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헛된자’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분명, 성경은 가인을 14번이나 언급하고, 아벨은 그 절반인 7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라웁게도 ‘아우’라는 단어를 7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벨도 14번 똑같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하나님은 가인과 무수한 대화를 하셨지만, 정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은 가인이 아니라, 아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적으로 아벨에 대한 사랑을 9절에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찾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인을 뜨끔하게 하실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인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에, 아벨의 제사를 너무나 자세히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보셨고, 기뻐했으며, 영원히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이후의 성경,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두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첫새끼와 그 기름입니다: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지극히 거룩하다”(출 34:19) “기름을 단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 3:16) 사랑하는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아벨의 제사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저는 이것을 그려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아벨을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아벨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벨은 이름의 뜻도 나와있지 않고, 별로 활동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과 대화도 없는 것 같은, 말그대로 ‘헛된삶’을 산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통해서 아벨은 헛되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아벨은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하는 증거를 얻었으니”(히 11:4)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벨을 의로운 순교자로 칭송하고 있습니다(마 23:35).
3. 말씀이 생활에서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이 본문말씀에서 무엇을 들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름에서 숨어있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였습니다. 본문은 가인(‘얻은자’)과 아벨(‘헛된자’)이란 이름을 참으로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히브리인들은 들으면서 단번에 알았겠지요!). ‘얻은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에게서 ‘잃은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에, ‘헛된자’는 그 어떠한 멋진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에게서 ‘기억된 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가 들어야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에는 ‘헛된자’처럼, 하나님에게는 ‘기억된 자’처럼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충실한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장차올 천국에만 열중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 사명을 망각하는 ‘현실회피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불충성하게 살지는 않되, 그렇다고 이 세상만을 위한 삶도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벨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입니다. 바로 주님이 아벨의 완성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바울이 우리에게 한가지 확신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는 세상에서 ‘헛된자’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장 4-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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