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워진 약속(창 3:9-21)
말씀을 준비하며
오늘의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떤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많은 면에서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의 묵상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영화는 바로 “나홀로 집에”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영화이지요. 몇가지만 기억해 봅시다. 부모님은 어린이를 남겨두고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납니다. 어린이 혼자 남겨진 집에 어리버리한 도둑이 침입합니다. 똑똑한 어린이는 재치있고 유쾌하게 악당들을 물리칩니다. 결국, 집안은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비록 집안은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어린이는 당당합니다. 조바심이 나서 돌아온 부모님 앞에서 어린이는 “나홀로 집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서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부모님이 아닙니다. 시종일관 어린이입니다. 어린이가 주도권을 쥐고 영화의 주인, 세상의 주인이 된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징글벨 노랫소리와 함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이러한 영화처럼 당당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말입니다. 오히려 성경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성경의 말씀은 어떤 내용입니까? 말씀의 내용을 말씀드리기 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다른 말씀보다 더 많이 들었으면 들었을, 단골 말씀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멀리 떠나있는 분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매일 거니시는 “함께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8절이 말하듯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란 표현은 에덴동산을 떠나지 않고 자상한 눈으로 보살피고 관리하는 정원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조차 똑바로 외우지 못하는 어리버리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아담과 그 아내가 있는 곳에 뱀이 등장합니다. 뱀은 악당입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훨씬 똑똑합니다. 성경은 ‘간교하다’라고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말합니다. 사람은 뱀 앞에서 너무나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을때의 진지함과 고민, 신중함과 하나님 의지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놀라운 점은 에덴동산은 난장판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에덴동산은 잠잠하고 고요했습니다. 변한 것이라고는 동산중앙의 나무에 있던 열매하나가 없어졌을 뿐입니다.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사람은 숨어 버립니다. 사람은 하나님앞에 당당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동산의 파수꾼이 되려고 발버둥 쳐보았지만, 자신이 인생의 주도권을 잡아보려고 불의와 타협을 해보았지만, 그 결과는 부끄러움 뿐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말씀의 중심에서
1. 하나님의 주도권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영화의 그것과 전혀 같을 수 없습니다. 영화는 우리를 인생의 주도권을 잡은 주인공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성경은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인공이며 주도권을 잡으시는 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 바로 주인공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주도권을 잡으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첫 번째 목소리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보여드렸던 창세기 2-3장의 구조를 기억하신다면 쉽게 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2장 18-25절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담에게, 동물들에게, 그리고 여자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높고 여자가 낮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피조물에게 미친다는 것이 말하고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타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창세기 2-3장의 최고의 비극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3장 6-8절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남자와 여자의 결정과 행동만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모습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비극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봅시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비극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시금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이 뱀에게, 여자에게, 남자에게,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이루어질 것을 선언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기에 본문은 더 이상 우리에게 비극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절대 비극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가 다스리고 있습니까? 한때 여러분이 창세기 3장 6-8절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려고하는 삶의 태도를 가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옳지 않은 삶입니다. 하나님에게 삶의 모든 주도권을 내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실때에, 나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라,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간구하십시오. 자신을 드리십시오. 나를 다스려달라고 말입니다.
2.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
이제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변함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라디오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다”의 반대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른 어떤 말보다 공감이 되는 것은 “사랑했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했었다”가 바로 “사랑하다”의 반대말이라는 것에 고개가 끄덕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때 “사랑했었던” 분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הꗏꗃאַ:히브리어로 ‘아예카’)” 이 말에는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친밀감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형식과 격식이 가로막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범죄자를 찾는 형사의 집요한 추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설득력이 약합니다. 오히려 매일 매일 하나님은 아담을 불렀을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같은 친밀감의 표현이 더욱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은 두 번째로 심판의 과정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역하면서까지 선과 악을 아는 지혜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매일의 만남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순종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심판의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심판하십니다(14). 뱀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요약하면, “저주”입니다. 보다 자세히 언급하면, 모든 동물들은 저주를 받게되었으며, 뱀은 더욱 많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에게 심판하십니다(17). 땅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 역시 “저주”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아담과 그 아내의 심판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16,19). 놀라운 것은 사람에게는 “저주”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심판을 받아도 아무런 대꾸도 못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저주”를 내리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때 우리를 사랑하셨던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세 번째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가죽옷입니다(21).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함을 통해서 얻은 지혜를 총동원해서 무화과나무의 잎이라는 볼품없고, 효과없는 옷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의 빛을 쐬여도 쉽게 오그라드는 무화과나무의 잎은 옷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어떤 지혜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1절에서 등장한 ‘지어’라는 말은 create가 아니라, make(아사)입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그것을 희생시키면서, 즉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했던 분이 아니십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더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끊임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드십니까? 나의 길이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흔들리지 마십시다. 확신을 가지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말씀이 우리의 삶에
저는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정점에 있는 3장 15절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에 푹 빠져서 한주 동안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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