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창세기강해[06]-복음의 시작(창 3:15)

진실과열정 2005. 10. 14. 18:09
복음의 시작(본문/ 창세기 3: 15)


1. 서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눈으로 읽고, 또 마음으로 읽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책은 글로 쓰여진 책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눈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또한,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 사람을 향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머리로 성경을 읽지 않고 마음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다가 우리의 눈과 마음이 멈추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이 눈이 머무는 곳, 마음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것은 마치 좋은 영화를 보고난 후에 한 장면이 눈 앞에 아른 거리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한 그것은 마치 먼길을 여행하다가 쉴만한 곳에 피곤한 마음을 풀어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이 바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눈과 마음을 사로잡혀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에 내 눈이 머무는 삶이 얼마나 복되는지요! 성경에 내 마음이 머무는 삶이 얼마나 복되는지요! 그렇기에 이스라엘 신앙의 최종적인 액기스인 시편, 이 시편의 시작중에 시작은 바로 “복되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는 사람이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눈과 마음에 되새기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놀라운 말씀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놀라운 말씀 앞에 서있습니다. 단 한절밖에 안되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엄청난 파워가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모든 말씀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공의와 한없는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말씀이야말로 공의와 사랑의 농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말씀은 압축된 시의 형태로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원어 그대로 직역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증오(적대감, 원수)를 놓을 것이다.

          너와 여자 사이에

          그리고 너의 후손들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그는 너의 머리를 상하게(부수다)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물다)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시적인 느낌이 드십니까? 평소에 시하고 관계가 좋지 못해서, 별로 감이 안 오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말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로 표현하기가 어렵고, 또한 시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된 원어성경은 확실하게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본문은 단 15개의 단어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우리말 번역성경과 영어 번역성경이 거의 배나되는 30개 정도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본문은 놀라운 솜씨로 우리에게 압축된 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을 많이 한다고 말에 힘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 두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나오는 말인데, “Brevity is the soul of wit(재치의 정수는 바로 간결함이다)”입니다. 두 번째는 줄리어스 시저의 편지인데, 그야말로 재치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북유럽 정복을 로마 원로원에 보고한 편지는 지금도 인용되는 명언입니다.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시저는 간결하고 압축해서 자신의 의도를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간결하고 압축된 본문 역시 하나님의 의도를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깨닫고, 감사하며, 또한 새로이 결심해야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압축된 말씀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세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2. 본론

  1) 기원론: 우리의 현실을 깨달아라.

    본문은 두개로 나누어집니다(15a, 15b). 15a에서 우리가 풀어야할 첫 번째 메시지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우리에게, “너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라는 기원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창세기 1-11장은 많은 기원을 가르쳐줍니다. 결혼의 기원이 나와있으며(2:24), 무지개의 기원(9:16), 언어가 나뉘게 되는 방언의 기원(11:9) 등 수많은 기원, 즉 원인을 말해줍니다. 바로 본문 역시 우리 사람들의 절대적인 현실에 대한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절대적인 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원수’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원수라는 단어는 ‘증오’이며 ‘강한 적대감’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에 적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성경은 바로 뱀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중에 뱀을 좋아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뱀을 싫어하며, 또한 여러 교육을 통해서 뱀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동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어떤 자료에서는 다른 동물들보다 뱀이 10배나 더 많은 피해를 사람에게 끼쳤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실제로 뱀이라는 파충류를 지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11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독사도 살며, 그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을 넣고 장난칠 수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은 파충류의 한 종류가 아니라, 하나님에 반대하는 대적자를 표현한 것입니다(3:1-5을 다시금 묵상해보라). 이러한 인간의 대적자는 신약에 와서 그 신분을 확실히 드러내 놓습니다. 곧, 계시록 12장 9절에 “… 옛 뱀 곧 마귀라고도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 즉 생명의 반대인 죽음이며, 사랑의 반대인 미움이며, 거룩의 반대인 타락이며, 축복의 반대인 저주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단인 것입니다. 결국, 본문은 우리의 현실이, 죽음을 벗어나려는 처절한 싸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미움, 복수, 타락, 그리고 이것들의 중심에 있는 사단과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을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단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되게 하셨습니다. 본문의 정확한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단을 우리의 계속되는 원수가 되게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과 저주 앞에서 끊임없는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에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할아버님을 포함하여, 고인이 된 약 40명의 유골(遺骨)을 합동으로 안장하는 식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3층 건물엔 유가족들로 가득했으며, 이곳 저곳에서 오열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묘 바로 왼편에 젊은 청년의 영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알고보니, 이병인데 군입대 후 2주만에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영정옆에는 상장같은 것을 놓았는데, 바로 서울대학교 수석졸업장이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를 진학할까하다가 군입대했는데, 2주만에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은 저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최후로 멸망받을 원수가 있는데 바로 사망(죽음)이다”라고 했습니다(고전 15:26). 그렇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했던 바울의 외침은 우리 인간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꼬집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금도 사망인 사단과 원수인 것입니다.


  2) 전쟁의 끝: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께서 승리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두 번째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15b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께서 승리했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인간과 죽음과의 싸움은 끝도 나지 않는 치열한 전쟁입니다. 15a에는 여자와 뱀의 싸움뿐만아니라, 그 후손들의 싸움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들’

    그러나, 15b에 와서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선포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할렐루야! 좀 더 확실히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어로는 ‘여자의 후손’이라고 나와있지 않습니다. 단지 말씀은 ‘그’라는 3인칭단수로 나올 뿐입니다. 그래서 15b를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는 너의 머리를 상하게(부수다)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물다)할 것이다.”입니다. 이것은 15a와 15b를 확실히 구분하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15a에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인간의 끊임없는 증오가, 15b에서 ‘그’라는 한사람 때문에 종결된다는 놀라운 선포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에서 확실히 뱀이 사단임을 알게 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등장하는 ‘그’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도 계속 내려오며 뱀의 후손도 계속 내려오지만, ‘그’의 상대는 뱀의 후손이 아니라 창세기 3장의 바로 그 뱀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사단에 대하여 개인적인 존재의 승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할렐루야! 놀라웁게도 이 예언의 말씀은 숨겨진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의 처음인 창세기에, 그러고도 처음부분인 3장에 나타나있었지만,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 말씀이 인용되는 부분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이후에 와서야, 즉 신약시대가 되서야 이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이 바로 이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인성의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심으로써, 마귀의 일을 멸하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지 3일이나 되어서 몸에서 썪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심으로써, 마귀의 일을 충분히 멸하실 수 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빈무덤만을 남겨두심으로써 사망을 이기셨음을 온 우주에 선포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성경은 실제로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 15b는 대구적인 표현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단도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상하게 하다’라는 말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게 될 때,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뱀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라는 말에서의 ‘상하게 했다’는 담뱃불을 비벼끄듯이 가루로 만드는 의미이며,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라는 말에서의 ‘상하게 했다’는 그의 말꿈치를 깨물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15b를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의 머리를 부수어 가루로 만들것이며,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깨물것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풀 수 없는 문제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셨구나!”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께서 위대한 승리를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자유케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비추어지고나서야, 많은 신학자들은 오늘 우리의 본문이 원초적복음, 즉 원복음(proto-evangelical message)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창세기 본문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입니다. 단지 저자는 악의 힘에 대하여 최종적인 승리만을 염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실제로 나타나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욱 깊은 말씀의 뜻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3) 오늘의 우리에게-우리의 현실을 개혁하라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마지막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본문말씀이 누구에게, 어떠한 상황에서 기록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죽음이라는 악에 대한 기원과, 희미하지만, 악의 힘에 대하여 승리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저자는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서 무엇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각성(覺醒)입니다. 저는 각성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깨달아서 정신을 차리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사망과의 싸움에서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목도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내가 사단의 세력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렇기에 이 모든 처절함속에서 날 구원할 자는 예수 한분밖에 없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슬로프 펠리칸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역사 2000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역사학자로써 펠리칸은 2000년의 역사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었는 가를 말합니다. 가장 감동이 되는 부분은 한창 지성의 불이 터져올랐던 계몽시대의 한 일화입니다. 계몽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든 우주를 풀 수 있다고 자신감에 타올랐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의 필요성을 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과도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위대한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가 바로 파스칼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안다면 오만함이 생긴다. 반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간의 비참함을 안다면 절망이 생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답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오만 대신에 겸손을, 절망 대신에 소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아직 죄에 대하여, 사망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음에 대하여 비참하게 생각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을 마음에 겸손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사단(악, 죄)에 대한 나의 전쟁은 끝이 없으며, 절대로 나의 힘으로는 정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영역에 승리하신 예수를 대장으로 앞서나가시게 여러분의 자리를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사단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성경은 사단의 정체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사단은 누구나 속을 정도로 거짓말도 잘합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무섭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단의 근본정체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머리통이 깨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머리에 금이가는 수준이 아닙니다. 마치 담뱃불을 밟아 비벼끄듯이, 사단의 머리는 박살이 났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가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한다면, 머리통이 깨진 마귀는 우리를 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손안에서 다윗이 작은 돌을 던질때에 거인 골리앗의 머리가 깨졌던 것처럼, 세상에서 살면서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손안에 붙들림을 받아서 사단의 머리를 더 확실하게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저주의 삶에서 벗어났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4:24)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매여 있어서, 주님을 믿고서도 참으로 자유로운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고달프고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해야 합니다.

    즉 3장에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노동의 수고와 출산의 고통은 예수안에서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자의 후손과 관련하여 묵상해본다면, 성경은, 모든 아이의 출생에 있어서의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안에 놓여있는 소망임을 말해준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해산의 고통은 단순히 타락의 무익함만을 상기시켜주지 않고, 또한 임박한 기쁨에 대한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3.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오늘의 짧은 본문에서 “복음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도 “복음의 시작”으로 잡았습니다. 복음은, 첫째로, 우리의 처절한 현실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 15a는 우리의 현실이 죽음으로 현실화되는 악과의 치열한 전투임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두 번째로, 사단에게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승리가 무엇이며,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에 현실의 개혁을 요구합니다. 박살난 머리를 가진 사단에 흔들리는 삶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500년전 루터가 박살난 사단의 머리를 향해서 잉크병을 던졌던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단이 자신을 유혹하고 좌절시키려할때, 루터는 박살난 사단의 머리를 향해서 믿음의 선포를 했으며, 끝내 이겨냈던 것처럼, 우리들도 이 세상속에서 사단의 박살난 머리를 기억하며 담대하게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본문과 대응될 수 있는 성경말씀이 마음을 떠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인 창 3장 15절이 복음의 시작이라면, 그 다음 절인 3장 16절이 바로 복음의 완성이 아닐까 합니다. 떠올리는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