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들어가며
영화를 보다보면, 때때로 다른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르는 경우가 생깁니다. ‘저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게 됩니다. 비슷하게 저는 성경에서 그런 점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이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더 풍성해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점을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준비하면서 큰 곤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설교의 본문이 너무나 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너무나 많은 것도 아닙니다. 내용은 너무나 단순한데, 설교 본문으로는 너무나 긴 본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 창세기 본문과 유사한 다른 본문은 없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했으니까, 혹시 모세가 쓴 다른 부분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읽다가 시편 90편에서 멈추었습니다.
시편 90편을 쭉 읽어보니까, 오늘의 본문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이 시편 90편의 저자로는 다름아닌 모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깐 시편 90편이 창세기를 요약한 것같은 착각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2절에 천지창조의 창세기 1-2장을 그려볼 수 있으며, 3절에 범죄한 아담과 이브가 나온 창세기 3장이 생각나며, 5절에 노아의 홍수인 창세기 6장이 바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90편 4절이 오늘의 진짜 본문인 창세기 4-5장의 요약판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정확하게 말하면 4장 17절부터 5장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묘하게도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4-5장의 총연대를 합하면 대략 1,600년쯤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나긴 대역사를 달랑 두장(4-5장)으로 요약했다는 것이, 시편 90편 4절에 단번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의 목전에서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지나간 천년에서 배우는 오늘”로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 그대로 천년의 역사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천년의 역사는 특이하게도 ‘족보’입니다. 게다가 ‘두개의 족보’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된 ‘두개의 족보’를 통해서,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일까?’를 깨닫고 반응하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이제 오늘의 진짜 본문인 창세기 4장 17절을 펴도록 합시다. 그리고 눈으로 4장 17절부터 5장 32절까지 훑어 보도록 하십시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늘의 본문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요약하겠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살다가 죽었더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천년의 역사가 이 한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정말 모세의 시편이 마음에 옵니다. 그렇습니다. 이 요약이 본문의 뼈대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족보를 세가지 방향으로 생각해보게 됩니다. 즉,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에서 세가지의 메시지를 듣게됩니다. 그러면서, 지나간 천년에서 오늘을 배우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1) 족보의 순서: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첫 번째는 족보의 순서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족보의 순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가인의 족보 다음에 셋의 족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창세기를 읽다보면 간간히 족보가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에는 9개 정도의 족보가 나와있는데, 창세기는 이 9개의 족보가 연결점이 되어서 그 이야기를 진행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족보는 단순한 집안의 내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해석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족보입니다. 이 족보를 통해서 창세기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도록 한가지 표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도표 1). 이 표는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족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도표를 보고 무엇이 발견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창세기는 한 아버지의 자녀들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징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족보와 그렇지 않은자의 족보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의 족보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를들면, 이스마엘의 족보가 왜 필요할까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족보만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표1) 창세기의 족보
가인의 족보(4장) 셋의 족보(5장)
노아의 족보(10:1-11:9) 야벳의 족보 함의 족보 셈의 족보
이스마엘의 족보(25:12-18) 이삭의 족보(25:19-35:29)
에서의 족보(36:1-37:1) 야곱의 족보(37:2-50:26) |
더군다나 더욱 의문이 되는 것은 족보의 순서입니다. 성경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족보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족보 뒤에 위치시켰습니다. 물론, 둘째 아들이니깐 그렇겠지요. 그러나, 노아의 경우에서는 어떨까요? 10장 1절은 이렇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즉, 우리는 셈이 장자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경우에서도 장자인 셈의 족보가 가장 마지막에 나와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의문을 던집니다. 왜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닌 족보가 앞서나갈까? 하나님의 사람들의 족보는 그 뒤를 졸졸 따르는 것처럼 보일까? 하나님의 사람의 족보를 거창하게 시작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족보는 뒤에다가 부록 비슷하게 첨가해놨으면 더 좋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지나간 천년에서 배우는 오늘의 신앙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여러분이 세상사람들보다 앞서지 못한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내 친구는 교회도 안다니는데, 벌써 연봉 1억이더라! 근데, 왜 나는 연봉 1000만원도 안되냐? 내 친구는 교회도 안다니는데, 남자친구가 장동건뺨치더라! 근데, 왜 내 남자친구는 옥동자같냐? 내 친구는 S 대학교를 특차입학해서 수석으로 조기 졸업해서, 벌써 S그룹의 과장감이라더라!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인생의 깊은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솔직히 그들을 보면 좌절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새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굉장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천천히 기도하고 준비한다면 더욱 멋진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이 표를 보신다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먼저된 자들은 성경에 얼마 차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서 하나님의 때를 맞이한 사람들의 삶은 앞서가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스마엘보다 이삭은 10배나 더 풍성해졌으며, 에서보다 야곱은 20배나 더 풍성해졌습니다. 다시금 말씀 드립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며 여러분의 삶을 준비하십시오. 100배나 더 풍성한 삶을 기대하십시오!
2) 족보의 내용: 문명의 발전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의 발전이 위대한 차이점이다.
이제 두 번째는 족보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이 되는 족보는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입니다. 똑같은 족보인데도, 그 내용에는 엄청난 차이가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인의 족보는 그야말로 화려합니다. 4장 17절에 가인은 도시를 세운 사람입니다. 20절에 목축생활을 시작한 사람으로 ‘아다’가 등장하며, 21절에 인류의 문화생활의 개척자로 ‘유발’이 소개됩니다. 22절에는 인류의 과학기술의 근간이 되는 기초적인 도구의 제작자로 ‘두발가인’이 나옵니다. 그리고, 19절에는 인류최초의 플레이보이인 ‘라멕’도 등장하여 정신나간 남자들의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인의 족보는 8절밖에 안되는 매우 짧은 족보이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인류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지대한 공헌을 한, 말 그대로 천년을 빛낸 위인들입니다. 이들을 소재로 동화책을 만들면 많이 팔리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셋의 족보는 어떨까요? 우리가 처음으로 창세기를 맞이하는 어린아이가 되어봅시다. 불신자의 족보가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의 족보는 과연 얼마다 더 위대할까? 아마도 손에 땀을 쥐면서 창세기 5장으로 눈을 돌릴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만 어린아이가 5장을 다 읽지도 못해서 잠이 들고 만 것입니다! 가인의 족보에 4배나 되는 32절의 긴 내용에서, 솔직히 건져낼 것이 뭐있겠습니까? 셋의 아들은 인류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그 어떤 것 하나 공헌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내용도 매우 따분합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아버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아들에 그 손자…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누가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살동안 향수하고 죽었더라”입니다. 단 한사람 에녹에서 우리는 위안을 받습니다(21-24절).
사랑하는 여러분! 소감이 어떻습니까? 저는 처음에는 우울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셋의 족보에서 노예해방의 뿌리를 발견하기 원했으며, 우주탐사의 기초를 발견하기 원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수레바퀴의 발명이나 전염병의 치료제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점에서 저를 실망시켰습니다. 결국엔 이렇게 생각을 했었지요: ‘나보고 오래 살아서 애나 많이 나으라는 것인가?’
여러분! 이 두개의 족보의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가인의 족보에서처럼, 셋의 족보도 비슷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는데, 뭐하나 못해보았겠습니까! 셋의 자손들도 문명을 이룩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가인의 자손들처럼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위대한 공헌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그들에게 자랑은 되지 못한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자랑해야 할 것으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습니다. 성경은 특별히 에녹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에녹은 신약에도 소개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다운 인생의 평가는 “얼마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보내었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네가 무엇을 남겼느냐? 인류앞에 어떤 문명적인 발전에 이바지했느냐?’라는 것은 이차적인 평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공제일주의원칙의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대박을 터뜨려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고 영웅시되는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간 천년에서 배우는 오늘의 신앙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찌우는 것이 인생의 의미이다”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지혜자는 가르칩니다: “헛되고 헛되니, 무엇보다도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5:7)”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이 가인의 족보에서나 나올법한 삶에 열중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홀한 나머지 여러분의 꿈만을 이룩하기 위해서, 삶의 목적을 정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지나간 천년의 가르침’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의 삶에서 후손에게 남겨줄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야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새것 그대로 남겨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성경이 시간이 지날수록 닳고 닳아서, 최종에는 여러분이 그 어떠한 큰 일을 이룰때에,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여러분의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였던, 헐어빠진 성경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3) 족보의 유사성: 진품과 모조의 차이는 누구에게 붙잡혔는가에 달려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는 족보의 유사성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를 주의 깊게 읽어보신다면 매우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발견하기 쉽도록 도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도표 2). 혹시 여러분들 특이한 점을 찾았습니까?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들과 셋의 후손들의 이름들이 매우 유사하지 않습니까? 에녹과 라멕은 이름이 똑같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어성경에서의 이름도 상당히 비슷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에서 연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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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셋 에노스 |
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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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 |
에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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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할랄렐 |
이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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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 |
므후야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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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
므두사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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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 |
라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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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 |
야발,유발, 두발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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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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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함,야벳 |
어떻습니까? 매우 깊은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려고 그러는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단절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살아가야 한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름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서 살아가되 세상과는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등을 지고서 사는 것도 말씀이 가르치는 올바른 삶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가인의 족보에서 등장한 라멕의 삶과 셋의 족보에서 등장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비교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셋의 족보에 등장한 사람들의 삶은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평범해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엄청난 신앙의 외침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 18절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인간들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히 인간의 씨를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단순하게 본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것을 최대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셋의 족보에서 병들거나, 사고로 일찍 죽었다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모두가 향수하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원어로 ‘모든 날’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을 끝까지 지켜내면서까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969살까지 살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눈물과 고통과 아픔 뿐인 세상속에서 빨리 죽어버리는 것이 속편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지극히 평범했던 신앙인들의 눈물과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죽기까지 담당했던 신앙의 거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자손이었던 라멕은 하나님과 관련없는 삶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뜨리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방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여자를 취해서 자신의 후손을 보존하려는 권력의 탐욕을 부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같은 수준의 복수만이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법칙에 불복하고 77배의 잔혹한 복수의 원칙을 세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속에서 살면서 우리가 세상과 달라야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여러분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삶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집념과 헌신으로 오늘을 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저도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놓고 계속해서 기도중에 있습니다. 그 길에 확신을 주시고, 그 목적을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되어지며,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으로 그 일을 궁극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천년의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처럼 보입니다. 그 길은 뼈를 깎는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쉬운 라멕의 방법에 유혹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다 뭐냐! 나는 내 멋대로 산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산다! 나는 나를 즐긴다!” 사랑하는 여러분! 끝까지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믿고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그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달성해 내는 것이 바로, 지나간 천년에서 배우는 오늘의 모습입니다.
말씀이 생활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해보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는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를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재는 족보의 순서에 있어서, 믿음의 족보가 뒤에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하며 열심히 준비한다면 하나님께서 더욱 크게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는 족보의 내용에 있어서, 세상의 족보는 문명의 발전을 자랑했으나, 믿음의 족보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만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여러분의 최고의 자랑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의 흔적이 될 수 있도록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족보의 유사점에 대하여,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 비슷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서 심각한 차이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달성하기 위한 사명자의 삶을 살았던 반면에, 라멕은 자신만을 위한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천년에서 오늘을 배웠습니다. 모세가 시편 90편 10절에서 노래했듯이, 우리의 삶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2절에서 노래하듯이, “우리에게 지혜의 마음을 주셔서 우리 날을 계수할 수 있는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다 멀리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 인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까지 보십시오. 그 능력의 손에 붙잡혀서, 여러분의 삶이야말로 셋의 족보를 닮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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