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아픔과 은혜를 배우는 오늘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말씀에 들어가며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참 모르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이들의 자식들로 “네피림”이라는 용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6절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근심하십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사람이 잘못했는데, 모든 피조물까지 멸한다는 부분도 궁금합니다.
솔직히 본문을 연구하면서(원어성경, 영어성경, 영어책 4권, 한글책 2권),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참으로 많은 의견들이 있었고, 그만큼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얼마되지 않는 분량의 말씀에서도 수많은 책을 쓸만큼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들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본문에서 기억해야 할 부분들을 세가지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일단, 우리 이렇게 인사하고 시작합시다: “당신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자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1) 하나님이 아파하시고, 결심하신다.
제가 첫 번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묵상에 관련된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6절의 말씀은 저에게 많은 충격을 줍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신이 했던 일 때문에 한탄하셨고, 그 마음에 근심하셨다.”라는 것입니다. 보다 정확한 번역을 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땅위의 사람을 지으신 것 때문에 후회하셨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워하셨다.”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왔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은 후회도 없고, 고통스러워 하실 필요도 없으신 분이라고 알아왔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그리고 사무엘상 15장 29절에,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뜻을 돌이킴)치 않으심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변치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6(7)절의 말씀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땅위에 사람지으셨음을 … 마음에 고통스러워했다(아파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통(아픔)이 무슨 뜻인지 상상해보셨습니까? 우리는 이 ‘고통’이라는 단어를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것을 통해서 조금 더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고통’은 창세기 37장에 나옵니다: 야곱이 세겜에 머물렀을 때, 디나라는 딸이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디나의 오빠들이 느꼈던 감정이 바로 고통(아픔)입니다(34:7). 이 ‘고통(아픔)’은 요나단이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왕에게서 느꼈던 감정입니다(삼상 20:34). 이 때 요나단은 식사중이었는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옵니다. 이 ‘고통(아픔)’은 다윗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며 아끼던 아들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느꼈던 감정입니다(삼하 19:3). 여기에서 다윗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우는 상징적인 표현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실제적인 ‘고통(아픔)’이 사용된 성경본문은 이사야 54장 6절에 있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고통(아픔)’은 버림받은 어린 아내에게서 나오는 감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고통은 인간의 감정중에서 최고로 강력한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고통이 하나님에게는 과연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고통에 놀라게됩니다. 더욱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지금 그러하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은 바로, 마음에 심히 고통스러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결국, 우리는 후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새로이 결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7절입니다: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러하리니…” 여기에서 말씀하고있는 후회는 태도의 변화를 말하는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은 감정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변하신다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함없는 하나님, 처음에 뜻을 정하시면 돌이키지 않으시는 하나님, 다시말하면 결정론안의 갇혀있는 하나님을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굳어버린 하나님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역동적인 분입니다. 활발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마음이 여린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세우신 것에 똑같이 후회하십니다(삼상 15:11).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나라 이스라엘도 범죄할 경우에, 그들을 복주실 것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렘 18:10). 한편, 하나님은 심판중에서도 뜻을 돌이키십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금송아지를 만든 백성을 모두 진멸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 아모스에서도 아모스의 간구를 들으시고, 무시무시한 황충심판, 불심판의 뜻도 돌이키십니다(암 7:3).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의 주권과 대응하는 인간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인간의 마음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님도 변하신다는 하나님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들
이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 봅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후회하게 하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십니까? 멋진 행성이 그만 충돌해서일까요? 우주가 너무 깜깜할 정도로 어두워서 우울한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그토록 중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존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아주 자세하게 말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불효, 우매, 배신, 무정함, 무자비(1:29-31) 그런데, 본문은 딱 한마디로 줄입니다: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5b)” 즉, 속과 겉, 모두 언제나(always)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1-4절에 나와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땅위에서 번성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무분별한 결혼형태를 고발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수명단축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떠나심으로 이어집니다. 한편, 먼 옛날의 싸움꾼으로 유명했던 네피림이라는 전설속의 거인족으로 끝납니다.”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물론, 아까 말씀드린대로,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잘못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외면적인 표현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 불신자와의 결혼일까요? 일부다처제일까요? 저는 꼭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인 야곱이야말로 일부다처제이며,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아버지의 우상인 드라빔을 훔칠 정도로 불신자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측면에서 보려고 합니다. 즉, “밖으로 나타나고 있는 인간의 죄라는 것이, 최초의 범죄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이 보여주는 범죄의 공식은, “보고 … 좋게여겨 … 취했다”입니다. 그런데, 본문도 그것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취한지라)’” 불신자와의 결혼, 일부다처제같은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원초적 범죄를 그대로 따라했다는 것이 고발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적감각과 우리의 선택(취함)은 무조건 나쁜 것인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보고, 좋게여겨, 취했다”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 배경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홀로 있으려는 거역이 죄인 것입니다. 즉, 이 “보고, 좋게여겨, 취했다”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에게서 쓰여졌던 단어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즉,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을 박탈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죄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6장을 보십시오. 6장 어디에도 인간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있습니다. 계속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태도의 결정판으로 네피림이라는 거인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계실 곳이 없어집니다. 인간 스스로가 거부한 하나님은 결단하십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여러분의 지난 한주일은 하나님과 함께한 시간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박탁했던 시간이었습니까? 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도움을 사모했어야 했을까요! 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바라고 바랬어야 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아까 1-4절까지에서 논쟁이 될 수 있는 어려운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푸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외침을 듣는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마음쓰고 있는 그 일에, 여러분이 지금 마음쓰고 있는 그 사람에, 여러분이 지금 마음쓰고 있는 그 계획에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좋아하시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하시게 하십시오.
3) 노아-진노중에 베푸시는 은혜가 있다(말씀의 오늘을 찾아서…)
이제 마지막으로, 본문의 세 번째 목소리를 듣도록 합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오늘을 다시금 결단하게 하는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것 처럼, 오늘의 본문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의 무궁함을 말해줍니다. 그것을 우리는 8절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노아에게서 진노중에서라도 은혜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노아라는 이름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노아(ꖙꗿ)의 발음과 매우 비슷하게 오늘 본문에서 3가지의 단어가 함께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첫 번째가 6절의 ‘후회’입니다(םחנ). 두 번째는 7절의 ‘쓸어버림’입니다(החמ).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8절의 ‘은혜’(ןח)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노아의 이름에 세가지 의미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악함 때문에 사람창조를 후회하셔서, 지면에서 사람들을 싹 쓸어버리시려고 하셨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의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야말로 똑같이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은 또 한명의 노아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생각해본다면, 이 말씀을 누구보다도 들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은혜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은혜에 대한 감사였으며,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가나안의 문화를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즉, 가나안에서는 신과 인간의 결혼식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성전창녀가 있어서 만신전의 신들에게 시집을 가는 종교문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본문말씀에서 오늘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느닷없이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언급되었을까요? 성경에서 ‘네피림’은 딱 두 번 나옵니다. 신과 인간의 결혼식 문화세계를 보여주는 본문에서 한번 나오고, 12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나서 보고하는 민수기 13장에 한번 나옵니다(33절).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네피림’이라는 거인 용사(싸움꾼)들은 홍수로 인해서 죽었을까요? 죽지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네피림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렇다면, 지금 가나안 땅을 들어가야할 백성들은 네피림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모세는, 거인들을 만나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하여, 즉 홍수 이전에 거인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두 멸종하고 지금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일 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9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볼때, 그들은 고대 옛날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거역해서 사막가운데 죽음을 당했던 이전세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웠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야말로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인간의 제한 수명으로 주어진 120년의 인생을 꽉 차게 살았던 사람으로, 자신들을 이끌었던 모세였음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단지 먼 옛날의 헤라클레스를 떠올리는 신화와 같은 상상속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도전을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날마다 필요없어지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하는 임재가 나의 자유함을 점점 억압하는 것과 같은 세상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세상속에서, 바로 오늘의 본문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 동행하는 삶이란, 세속의 문화속에서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며, 하나님이 선택하는 실제적인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삶속에서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픔을 알았으면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임을 다시금 알았으면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과 은혜를 아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오늘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살아야하는지를 결심했으면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제목을 “하나님의 아픔과 은혜를 배우는 오늘”로 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한시라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잊을때, 하나님의 마음은 무너집니다. 바로, 여러분 한사람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시는 살아계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조직적인 신학원리안에 가두어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되시게 하십시오.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늘 함께하시기 원하시는 여러분의 동행자로, 여러분의 결정책임자로, 여러분의 위로자로, 여러분의 치료자로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동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은 해오면서, 정작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엉뚱한 것들을 느끼고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저부터 하나님의 아픔과 은혜를 배우고 실제적으로 오늘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우리 아까 시작하면서 했던 인사를 다시금 해봅시다: “당신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자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서로 인사해봅시다: “당신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자처럼 살아가십니까?”
'Preaching > [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강해[11]-바벨: 심판과 새출발의 장소(창 11:1-9) (0) | 2005.10.14 |
---|---|
창세기강해[10]-노아를 통해서 본 신앙의 본질(창 8:1) (0) | 2005.10.14 |
창세기강해[08]-지나간 천년에서 배우는 오늘(시 90:1-5; 창 4:17-5:32) (0) | 2005.10.14 |
창세기강해[07]-얻은자와 헛된자의 아이러니(창 4:1-16) (0) | 2005.10.14 |
창세기강해[06]-복음의 시작(창 3:15) (0) | 2005.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