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1장 1-9절
제목/ 바벨: 심판과 새출발의 장소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말씀에 들어가며
몇일 전 날씨가 매우 추웠습니다. 그날은 일찍 집에 들어왔습니다. 저녁을 먹고, 근처에 있는 쇼핑몰에 갈 계획으로 옷을 든든히 입었습니다. 그런데, 제 조카가 두꺼운 오바를 달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자랑스럽게 “외삼촌, 날씨가 쓸쓸하거든요.”하고는 오바를 입더군요. 갑자기 엄청 쓸쓸해 지는 이 기분-여러분 아십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도 잘못된 언어생활에 빠져있기도 합니다(“역전앞에서 만나자”). 신문에서 오해될 수 있는 영어사용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우리은행인데, 미국사람에게는 ‘우리’(woori)라는 발음이 ‘워리’(worry)와 매우 유사하다는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워리은행’(worry-bank)에 돈을 맡기겠습니까?
그러고보면, 말이라는 것이 아주 쉬운 것 같지만, 정말 혼돈스러운 것, 그 자체가 아닐까요? 특별히 외국어를 배우는 분들은 머리에 쥐가 나는 신비한 경험을 가질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갑자기 중국어 열풍이 불었습니다. 영웅본색 노래를 틀어가며, 친구들이랑 장풍을 쏘아대며 취권에다 별에 별 중국무술을 고등학교시절에 연마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를 들어가면서 언어와의 전쟁은 영영 이별을 고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가 컴퓨터를 전공했는데, 컴퓨터에도 언어가 있다는 겁니다. 어셈블리, 포트란, 파스칼… 이게 다 컴퓨터 언어입니다. 여기에다가 거부감까지 주는 언어가 있으니 바로 C 언어입니다. 이름이 C가 뭡니까? 알고보니깐 B언어가 발전해서 된 거랍니다. 한창 C 언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언어가 C++입니다. 이게 윈도우용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또 C++을 공부하는데, 이번에는 인터넷 프로그램을 만드는 언어가 등장하더군요. 이름하여 JAVA! 이 JAVA가 무슨 뜻인줄 아십니까? “나 자바봐라~”입니다. 이렇게 대학생활 내내 컴퓨터 언어랑 숨바꼭질만 하다 보내서, 저는 언어에 대해서 학을 띌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언어랑 작별을 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웬 말입니까? 우리의 귀한 성경말씀이 세종대왕님께서 쓰신 것이 아니랍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라는 말로 쓰였고, 신약은 헬라어라는 말로 쓰였다는 겁니다.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말도 잘 사용하기 힘이 드는데, 외국말은 오죽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 주변에서도 외국인 관광객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도록, 외국인을 만날 때 도망가지 않는 방법 세가지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I am sorry.” 입니다. 무조건 “아이 엠 쏘리”만 하면 상대방이 금방 이해를 합니다. 절대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What?”을 크게 외치는 겁니다. 외국인이 뭐라고 하든, “왔? 뭐가 문제야? 왔? 다시 말해봐!”하면 상대방이 지쳐서 그냥 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으흠~”입니다. 상대방이 뭐라고 하든 “으흠~ 그런데, 으흠~ 그래서, 으흠~ 그래 네 말이 맞어”만 하면 상대방은 자기가 알아서 이해하고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어공부 열심히 하십시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의 고민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사람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의 아까운 시간을 영어공부하는데 허비해야 하는 것일까?”인 겁니다. 비록 오늘의 본문은 매우 짧지만,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언어가 달라지게 된 이유와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 설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언어가 하나이었던 시절에 동방 시날땅에서 사람들이 회의를 합니다. 즉, 도시를 건설해서 흩어지지 말고 높은 탑을 쌓아서 우리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자라는 겁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시고 내려오셔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건축은 중단되고, 뿔뿔히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1) 바벨탑은 인간의 끝없는 반역을 상징한다.
본문이 말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바벨탑은 인간의 끝없는 반역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범죄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있는 그 위치가 단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한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10장 31절을 읽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벨탑 사건이 먼저 일어났습니까? 10장의 야벳과 함과 셈의 자손들이 먼저 였습니까? 잠시만 생각을 해보면, 바벨탑 사건이 먼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자는 바벨탑 사건을 뒤에 위치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있는 위치 자체가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범죄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10장 1절은 “노아의 아들들의 후예가 이러하니라”라고 시작해서 11장 9절로 끝나는 이야기 단락입니다. 10장은 노아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약속처럼 생육하고 번성했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노엽게 합니다. 더 나아가 볼까요? 6장 9절은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라고 시작해서 9장 29절로 끝납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 마지막 9장은 벌거벗고만 노아로 끝이 납니다. 조금만 더 봅시다. 5장 1절은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라고 시작해서 6장 8절로 끝이 납니다. 여기에서도 믿음의 족보에서 시작하지만, 6장에서는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으로 끝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2장 4절에는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라고 시작해서 4장 26절로 끝입니다. 여기에서도 천지창조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에서 시작했지만, 가인의 자손들의 폭력과 범죄로 끝이 납니다. 오직, 천지창조만을 말하는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에서만 인간의 범죄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장부터 11장까지의 4개의 큰 이야기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인간의 범죄함으로 끝이 납니다. 4개의 이야기가 지나가면서 한가지 주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은혜와 범죄”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사람들의 힘만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며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노아 홍수 이후인, 심판받지 않은 사람들만 남은, 그들만의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끝없는 반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인간이 얼마나 무모한 존재입니까? 얼마나 무모하면, 탑을 쌓으면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될 수 있다는 첫사람의 무모한 헛된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찌보면, 바로 이러한 주기가 우리의 생활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나의 추악한 범죄.” 이것은 나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강력한 고리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인간의 힘 스스로는 절대로 끊을 수 없음을 강력하게 반증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말입니다. 바로 다음 장인 12장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까지는 ‘은혜와 범죄’라는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악순환을 끊으시려는 하나님께서, 2000년전 온 인류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셨음을 찬양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이러한 악순환의 영원한 고리를 단번이 끊어버리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오늘의 이 말씀은 더 이상 우리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로 남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하며, 그분을 신뢰하게 하며, 그분을 섬김으로 범죄의 악순환을 끊게하는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6장 4절부터 14절까지를 선포하도록 합시다: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십시오. 우리는 연약해서 창세기의 악순환의 싸이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이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2) 바벨탑은 새로운 삶을 열어놓는 출발점이다.
이제 본문이 말하는 두 번째 메시지를 듣도록 합시다. 이 두 번째 메시지는 우리에게 소망을 던져줍니다. 바로, 바벨탑은 새로운 삶을 열어놓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바벨탑 사건을 마지막으로, 역사이전의 시기 즉, 원역사라고 알려진 창세기의 첫부분이 종결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지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만 국한된 사건기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와 관련된 일반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12장에 들어서며 즉, 아브라함이 등장하면서부터 비로소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대서사시가 구체적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바벨탑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바벨탑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최후의 심판의 표징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게되는 출발점도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는 오늘 본문말씀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이 말씀이 누구에게 선포되어졌을까?”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선포되어졌길래, 이 말씀은 소망이 되고 힘이 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기록된 것이지, 뭐 특별한 목적이 있었을라구~” 네! 정말 그랬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성경말씀은 신문기사와 별다른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11장과 10장과는 순서상 논리에 맞지 않기도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의미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을 받아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 대하여 우리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생깁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냈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유독 한 사건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포로가 되었던 시기입니다. 당시에는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최강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했다는 최악의 범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벨론 역시 우상으로 가득한 세상이었습니다. ‘바벨’이라는 말 자체가 바벨론 언어로 ‘밥’(bob)+‘엘’(el) 즉, ‘신의 문’이란 뜻입니다. 이곳에 신들이 가득하다는 뜻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우상만 섬기더니, 하나님은 우상이 가득한 곳으로 그들을 사로잡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지 않게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70년만 포로생활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생활에 익숙해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이 너무나 좋기만할 뿐입니다. 바벨론의 국력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뛰어났으며,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기 때문에, 이곳에 그냥 머무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예언자들을 통하여서 선포하십니다. 바벨론은 무너질 것이며,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함께 계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14장 13-15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은 사단을 일컫는 말씀이 아닙니다. 14장 4절만 보더라도, 이 예언의 말씀이 바벨론왕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오늘의 본문말씀과 이사야를 통한 이 예언의 말씀이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바벨탑이 바로 지극히 높아지려는 것 때문에 심판받은 것이 아닐까요? 이 바벨론이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을 것이라고 예언자 이사야는 선포합니다(사 13:19).
19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더욱 현실성이 느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해서 높아지려는 망령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행동하십니다. 바로 5절에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강림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함께하심, 즉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바벨론의 일들을 멸하시는 위대한 행동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늘에만 계시는 줄 알았던 그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내려오셔서 바벨론을 멸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구속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흩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네 고향땅을 향해서 움직여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벨은 바벨론어로 ‘신들의 문’이었는데, 이제 바벨의 진짜 의미인 히브리어의 뜻을 찾게 된 것입니다: 바벨-“혼란”
그렇습니다. 이 바벨탑은 포로기에 갇혀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출발점을 열어놓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이 자리가 좋고 편할지라도, 자신의 바벨론 생활을 박차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그 곳-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루살렘 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언어를 내어버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찾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거듭나야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새로운 출발점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의 시대가 아닐까요? 누가는 성령으로 인해서 회복된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행 2:8-21):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언어를 회복하심으로 세계선교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이 성령의 시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새로운 출발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자기네 목소리를 찾은 것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 역시, 성령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았던 것과,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자기네 목소리를 찾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루어진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를 찾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가치에 우리의 뜻을 종속시켜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목소리에 나의 목소리를 빼앗겨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전쟁이 필요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거룩한 전쟁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말씀이 생활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우리의 생활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을까?” 고민해보도록 합시다. 우선적으로 바벨탑은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인간의 무모한 교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홍수 이후의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모함은 끝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무모함을 제어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사도바울이 가르치며 외쳤던 복음의 능력의 말씀을 날마다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두 번째로 우리는 ‘바벨탑의 삶의 현장’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탑에서 벗어나와야 했습니다. 자신의 언어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저는 이 강림하셨다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강림하심’이, 이 ‘함께하심’이 바벨론에서는 심판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위로요, 능력이요, 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놀라운 말씀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시니 너는 일어나 너의 길로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들어야 말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시니! 너는 일어나 하나님이 명하시는 그 길로 담대하게 가라! 너는 일어나 세상의 목소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가지고 가라!” 그렇기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벨탑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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