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빌립보서 2장 12절(배경본문 창 12-19장)
제목/ ‘제대로 살고 싶어’(아브라함의 사람들[1]-조카 롯)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에 들어가며
한해가 끝나갈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대박의 블록버스터 영화들, 상큼한 후배들의 깍듯한 인사,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 그리고 나이 한살 더 먹는 묘한 기분 등이죠. 저도 개인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 분야의 시상식입니다. 특별히, 연기자나 가수들의 시상에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면, 그들이 우리 사회의 문화코드를 이끌어가는 선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년전 ‘가요 톱10’시절부터 시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들어선 옛날과 다른 현상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옛날에는 한명의 가수가 몇 년씩 인기를 이어갔었습니다. 속칭 ‘장수하는 연애인’이지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매년마다 새로운 얼굴들로 바뀝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이 없겠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얼굴을 원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합니다. 오래 끌면 안됩니다. 짧고 굵게, 반짝하고 신선하게, 생각보다는 감각을 건드려주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요즈음 유행처럼 번지는 ‘누드’열풍도 어쩌면 대중들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꾸준하게 한우물을 판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고,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소개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과 관련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만큼 꾸준해야되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한 길만을 고집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여기고, 중도에 포기해버리거나, 아예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매일 매일 힘을 얻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히 6:11)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도록 합시다. 그래서, 약속을 실제로 이루었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내 이루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5주에 걸쳐서 전하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12장부터 25장까지입니다. 즉 14장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한 장씩 나가볼까도 했는데,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부적인 나무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했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숲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5개의 주제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간단히 올려놓겠습니다. 참고하시면서, 들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들어야할 첫 번째 메시지는 그의 조카 ‘롯’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즉, 창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부분의 앞쪽 상당부분이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브라함의 사람들 중에 롯에 대해서 ‘창세기가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를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저는 특별히, 이 말씀을 받아야 했던 믿음의 공동체를 생각하기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했던’ 자신의 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신앙공동체에게, “무엇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인가?”를 가르쳐주는 살아있는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아브라함이 이랬데”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삶을 원하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롯’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어떠한 삶을 원하시고 계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두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저도 아브라함과 롯의 비교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롯은 ‘끝이 좋지않은 사람’을 보여준다.
우리가 롯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첫 번째 가르침은 “‘끝이 좋지않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영화를 보거나 할 때, 처음이 아무리 대단해도 끝이 좋지않으면, 관객들의 평가는 냉혹하게 됩니다. 옛말에 ‘용두사미’라는 말처럼, 머리는 용처럼 위대했지만, 꼬리가 뱀꼬리처럼 초라하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롯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롯은 12장부터 등장해서 19장에 퇴장합니다. 12장의 주연급에 해당하는 등장인물은 세사람입니다. 아브라함, 그의 아내, 그리고 조카 롯입니다. 롯의 출발은 아주 멋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퇴장은 최악입니다. 롯에 대한 마지막 기록인, 창세기 19장 30절부터 38절까지 읽어봅시다:
30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33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35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6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38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나이 75세라고 나와있고,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나이 99세라고 나와있습니다. 25년정도가 지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19장의 롯이 고향을 떠나온지 최소한 25년쯤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 사람이 25년 지난 최종적인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녀의 약속을 받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여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롯은 어떠한 복도 약속받지 못했습니다. 롯의 결말은 ‘두려움’이었다고 19장 30절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경은 롯의 결말을 아주 비참하게 보여줍니다. 롯은 자신의 두딸에 의해서 자손을 남기게 되는 치욕의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던 모세오경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왜냐하면, 롯의 자손이 출애굽해서 가나안땅에 들어가려던 이스라엘 백성이 살던 시대에 버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모압이고 암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과 암몬족속들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엄명하셨습니다(“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신명기 23장 3절). 이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각인되는 것이, 절대로 관계를 맺지 말아야 할 이들이, 바로 “오늘날 모압족속이고, 암몬족속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롯의 최후였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롯은 아브라함과 같이 시작했으며, 시작부터 큰 재물의 복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종말은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은 오늘의 두 번째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보다 먼저, 저는 “롯의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롯이 좋지않은 마지막을 보였던 것처럼, 우리 신앙인도 그럴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생각의 관점을 바꾸어봅시다. 즉, 이 말씀을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이 말씀을 받았었던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롯이 안좋은 마지막을 보였던 것처럼, 우리 신앙인도 그럴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인 출애굽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보지못하고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중에는 모세의 권위에 도전해서 땅에 삼키움을 당한 고라도 있었고,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빼돌려서 돌로 맞아죽은 아간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성인들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막에서 무덤하나 만들지 못하고 한줌의 가루로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롯이 좋지않은 마지막을 보였던 것처럼, 우리 신앙인도 그럴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신앙인도 그럴 수 있다’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작하면서 읽어보았던 히브리서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한 것이라”(히 4:1)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자”라고 6장 11-12절에 말씀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처럼 저도 오랜 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은 다양했습니다. 저를 가르쳤던 주일학교 선생님은 이단적 교회에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학생부시절 회장을 했던 친구는 종교를 비교하며 모든 종교가 같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러분들 주위에 그렇지 않습니까? 학생부시절에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생각되어져도, 바로 지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단순화해보도록 합시다. “이 말씀을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까요?”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같이 시작했는데, 롯이 최악으로 끝난 것처럼, 너희들 중에서도 분명히 그런 사람이 있을거야!”라는 운명적인 선포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말씀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생생한 교훈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 출발이 같다고 결과가 같은 것이 아니구나! 신앙이란, 출애굽의 구원받아서 천국티켓받는 것이 아니구나! 신앙이란, 내가 아무렇게 살아도되는 그런 부적같은 것이 아니구나! 신앙이란,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겸손함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과정이구나!”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나도 롯처럼 좋지않은 최악의 인생을 살게되는구나!”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도전을 드리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들어야 할 목소리는 “신앙생활 제대로 해야겠다”라는 “결심”인 것입니다. 성경은 교리적으로 절대 완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리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삶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롯의 목소리를 들읍시다. “제대로 살고 싶어”
2) 롯은 ‘말씀을 좇지 않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제 롯을 통해서 두 번째 목소리를 들읍시다. 바로 이것입니다. ‘제대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사람들은 모두가 제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롯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이 그 기준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그 기준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롯의 비교를 통해서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읽어볼 말씀은 창세기 12장 4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그렇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갔지만’, 롯은 단지 ‘아브라함과 함께 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핵심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13장으로 이어지면, 아브라함과 롯이 결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13장 10절(“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을 보면, 롯은 자신이 눈을 들어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눈에 보기에 좋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12절에는 ‘평지 성읍’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당시에 평지는 도시와 같다는 말입니다. 롯이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는 평탄한 삶이 보장된 그러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그렇지 않습니다. 14-15절을 읽어봅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눈을 들어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눈을 들어 사방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18절에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산’이라는 말입니다. 험하고 사람도 살지 않으며, 식량을 얻기위해 고생을 죽어라하는 그런 산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18절 하반절에 그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습니다. 우리는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아브라함과 롯은 비교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교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제대로 사는 삶과 제대로 살지 않는 삶의 비교입니다. 말씀을 좇아사는 사람이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말씀은 창세기 18장과 19장입니다. 18장에서 아브람은 세 천사의 방문을 받습니다. 특별히 롯과 비교해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섬김의 자세입니다. 분명 나이많은 할아버지인데, 아브라함은 시종일관 급하게 돌아다닙니다(2,6,7절). 그만큼 마음을 다한다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그는 최상급의 음식으로 천사를 섬깁니다(6-8절). 그런데,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될 점이 있습니다. 18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저는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 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무 생각없는데, 하나님께서 ‘얘 내가 너에게 나의 뜻을 보여줄게~ 제발 나의 말을 들어줘~’라고 하셨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이 바로 18장 17절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19장에 와서 롯은 아브라함과 비교가 됩니다. 그의 섬김은 최하입니다. 롯은 ‘무교병’을 천사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롯이 그들의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3절). 당시에 손님들에게 최선의 대접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다시말해, 최선의 대접이라 함은, 소금이 들어가는 음식을 대접해야 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롯은 소금이 없는 무교병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이 표현은 ‘그의 대접이 수준이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의 종말입니다. 성경은 소금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기에 아까워했던 그 소금이 자기 부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두딸이 모압과 암몬을 출생하기위해서 롯에게 준 그 술에 바로 소금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그것에 자신이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우리는 19장 16절에서 단적으로 알게됩니다(“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하나님의 말씀에 롯의 반응은 바로 ‘지체함’입니다. 그는 솔직히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아브라함과 롯은 비교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교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제대로 사는 삶과 제대로 살지 않는 삶의 비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삶을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해주면서,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해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용기가 있는 삶이 제대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우선적인 사명은 바로 ‘말씀의 사람’이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좇아가는 것이 바로 그들의 숙명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롯의 추락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훈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하라”(신 4:9)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좇아서 사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좇아서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 읽을 시간이 없으면, 잠을 줄이시고, TV를 줄이십시오. 맹목적인 습관을 좇아서 하지말고, 하루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간절함으로 성경말씀을 읽으십시오. 제대로 살고 싶다면,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생활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많은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롯을 통해서, 창세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첫 번째로, 롯은 끝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겁주기 위함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오히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일상적이며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으시고 도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롯이 제대로 살지 못했던 이유는 ‘말씀을 좇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좇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일상적인 삶의 모습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태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노래의 일부분이 생각납니다. 유행가인데, ‘비’가 부른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라는 노래입니다. 다른 가사는 하나도 안들리는데,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제대로 살고 싶어…” 바로, 이 노랫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대로 살고 싶어…”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제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제대로 신앙생활하며 살고싶지 않습니까? 오늘 롯은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살고 싶었는데…”
“제대로 신앙생활하며 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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