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창세기강해[12]-위대한 출발(창 12:1-9)

진실과열정 2005. 10. 14. 18:18

본문/ 창세기 12장 1-9절

제목/ 위대한 출발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말씀에 들어가며

    저는 지난주에 아브람의 부르심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으로 이동했었고, 그 무리들 중에 아브람이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아브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람의 특별함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브람의 부르심은 세상의 흐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인적인 지시하심을 받은데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브람의 부르심에 대해서 두 번째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지난주의 설교가 아브람의 준비작업을 말해준다면, 오늘은 아브람의 본격적인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가지를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1-3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4-9절까지는 아브람의 반응입니다. 어찌보면, 성경은 이러한 패턴으로 나타나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어지고, 그 뜻에 대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반응했던 기록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그 말씀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선택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하며,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위대한 출발”이라고 잡았습니다. 제목에 대한 설명은 이후로 이루어질 것이고, 우선 우리가 읽은 본문을 요약해보도록 합시다: 우선 1-3절까지를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만을 좇아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람이 복이 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들도 아브람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4-9절까지의 요약은 이렇습니다. 아브람은 75세의 나이에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가지를 같이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위대한 출발”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에 “위대한 출발”인 것이며,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인간이 반응한 것이기에 “위대한 출발”인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1) 하나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우선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발견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미리 그려논 하나님을 성경에서 거꾸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소부재․전지전능’이라는 어려운 말들을 써가면서 하나님을 머릿속에서 미리 정해놓습니다. 그리고, 그것들만 성경에서 찾아내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이 진짜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말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셔야한다고 미리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해야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셔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요?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배우자를 준비해주셔야하며, 좋은 직장을 얻도록 자리를 비워두셔야하며, 좋은 아파트를 얻도록 물가를 안정시켜주셔야하지 않을까요? 너무 이기적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주적으로 수천억개의 별들이 사고없이 운행하도록 부지런히 돌보시는 관리사일까요?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필요만을 채워주시는 요술방망이인가?” 혹은 그렇지않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우주적인 관리자인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을 찾기 원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제 본문 1-3절에 집중해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간단합니다. “너는 복이 되고, 땅의 모든 사람은 너를 인하여 복을 얻는다”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속에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우선, 우리가 한가지 고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2절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나와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어로 표현하면, ‘source of bless, root of bless, origin of bless’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어떠한 영어성경을 아무리 찾아서 읽어본다고 해도, source, root, origin이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원어에는 ‘근원’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어성경은 단순하게, “너는 복이 될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근원’이 있고없고가 무슨 차이가 있겠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복의 근원”하게 되면, 아무래도 ‘복’보다는 ‘근원’에 무게가 실려진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사람이 복이 된다는 것은 맞지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복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사람이 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복의 근원”이라고 하면, ‘근원’이라는 모호하면서도, 그래서 좋은 뜻으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가장 문자적으로 번역한 영어성경인 NRSV에는 “You will be a blessing”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놀라운 표현입니다. 이것은 지구 역사상 가장 놀라운 약속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벨탑의 사람들이 복이 되었습니까? 노아가 복이 되었습니까? 인류의 첫 번째 아들인 가인이 복이 되었습니까?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복이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모든 인류에게 사라진 단어가 바로 ‘복’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회복할 수 없는 단어가 바로 ‘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복’이 무엇일까요? 물론, 복은 내가 오래사는 것과 부유하게 사는 것이며, 이웃과의 평화와 많은 후손들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그런 것이 복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근본적인 복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관계의 회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람더러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며,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릴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복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유일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복이 된다”는 것은 “복주시는 하나님이 아브람과 함께 계신다”라는 놀라운 선포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 이후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전전긍긍했던 인생이었던 것을 기억하신다면, 오늘의 이 놀라운 선포는 온인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본문말씀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미리 예상해논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복받을 수 없는 인간에게 복 자체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복은 하나님 홀로 주시는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아브람이 복 자체가 되었다는 것은 아브람에게 복 자체이신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동행하시는 위대한 결정인 것이며, 패역한 인간과의 원수된 장벽을 스스로 허무시는 놀라운 은혜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장수나 부귀, 명예나 번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인 것입니다. “아브람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므로, 이제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임마누엘은 실제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2000년전 참 생명이신 분이, 참 능력이신 분이, 참 소망이신 분이, 참 하나님이신 분이 이 땅위에 오셨습니다. 생명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위해, 능력없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소망없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없는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은 영원히 살아있는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관계의 회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와 살아있는, 생생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원하시는 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쁘게만 움직이는 저에게 무엇이 가장 근본적인 것인지를 다시금 점검하게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가? 나의 삶의 여러 문제들을 하나님에게 상의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가? 이런 얘기가 생각이 납니다. 너무나 바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맨날 12시가 되어서 집에 들어왔고, 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아빤 한시간에 얼마를 버세요?” 뚱딴지같은 표정으로 아버지는 “만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은 “아빠 만원만 주세요”하더니 그 돈을 다시 아버지에게 전해줍니다. “아빠! 제가 아빠를 한시간만 사겠어요.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복음전파’라는 대의명분을 이용하기 위해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어떠한 목적만을 위해서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참된 복으로 아브람과 함께 하신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인자이신 예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인 것임을 다시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발견해야할 하나님은 턱이 빠지도록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아브람은 이미 복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의 회복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은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두 번째 메시지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4-9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어떠한 인간이 되어야하는지를 깨닫기 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브람의 심리적인 고민이 어떠했을까? 가정을 정착시키고 안정하게 살았을 40세 쯤에 아버지 데라 때문에 갈대아를 떠나왔는데, 이제 35년이 지나서 또 하나의 터를 세웠을 하란에서 떠나게 되었다니! 아브람의 고민이 어떠했을까? 더군다나 아버지 데라는 아직 하란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아브람은 장자인 것 같은데, 아브람이 부모님을 남겨두고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아브람의 심리적인 갈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단어라도 발견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같은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을 정도”로 그 때의 상황을 유추해보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우리는 갈등하는 인간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또 다른 인간의 이미지를 가르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순종적인 인간형입니다. 성경말씀은 아브람의 심리적인 단서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강력한 순종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4절에,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았다고 말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 75세입니다. 5절에, 아브람은 그의 영향이 미치는 수준에서 사람들과 소유물을 선택합니다. 결국, 성경은 간단하게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라고 마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세겜 땅에서 놀라운 행위를 보여줍니다. 즉, 세겜땅에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일생에서 야곱이 세겜땅에 잠시 머물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교도의 무리였던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 멀리서 알지도 못하는 무리들이 와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그런 종교형태를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당장 내 쫓으려 했을 것입니다. 6절은, 아브람이 세겜땅에 이르렀는데, 그 때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하였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모레 상수리나무”라고 나와있는 이곳은 종교적으로 신탁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모레’는 히브리말로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즉, 어느 지방에 오래된 나무가 있어서 신성화되어지며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종교적인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이곳은 세겜의 종교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그런 상황에서 아브람은 그곳에 단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아파트 건물 지하로 장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몇일후에 아파트 사람들이 단체로 거부 데모를 했습니다. 수많은 플렌카드들과 현수막들로 우리를 거부했습니다. 몇일후에 우리는 한번 예배도 못드리고 쫓겨났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아브람이 보인 행동속에는 놀라운 믿음의 결단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우상의 이방지역이었던 세겜땅에 있었지만, 그는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최고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대화와 타협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도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갑니다. 주일 저녁예배는 대화와 타협으로 주일 오후예배로 바뀐지 오래됩니다. 조금만 더 대화와 타협을 하면, 토요일 예배가 주일 예배를 대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신앙인의 모습은 심리적인 불안감이나, 대화와 타협같은 오늘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만 합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심리적으로 고민했거나, 세겜사람들과 대화와 타협을 시도했다라는 것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한 신앙인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본다면, 아브람은 “전진하는 기관차”와 같은 신앙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에서 신앙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브람이라고 고민이나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15장 2절에 보면 아브람은 자신의 안전과 후손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요, 갈등하는 사람이라고 보여줍니다. 또한 아브람이라고 대화와 타협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16장 2절에 보면 아브람은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는 대화하는 사람이요 타협하는 사람이라고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그런 나약한 사람입니다. 100% 강철 사나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의 본문은 “전진하는 기관차”의 모습만으로 일괄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많이 나약함에 자신을 정당화했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오늘 말씀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이되는 백성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말씀을 좇아서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비록, 주변에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소신껏 하나님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아브람의 후손이기에, 그들은 이 글을 읽고, 들으며, 암송하면서, “전진하는 기관차”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브람의 출발은 매우 미약했습니다. 이사야 51장 2절에는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길을 나섰다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출발이야 말로 위대한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출발의 시작은 아브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위대한 출발”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참 신앙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서 출발했으며,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주변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예배드렸으며, 거침없이 전진하는 활동가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전진하는 활동가” 이것이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속에서 새로운 출발을 놓고 고민하고 계십니까? 내년을 준비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망막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속에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담을 안고 출발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올 한해의 1년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계획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기원합니다. 이제부터는 청년부의 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고자하시는 일들을 다른 사람이 이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생활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성경은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우리에게 핵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과 성경이 원하는 인간입니다. 1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4절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았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궁극적인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이신 하나님이 아브람과 함께 있음으로 아브람이 복이 되게 하신 관계의 회복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소부재․전지전능의 하나님”이기보다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끊임없는 거듭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움직이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전적으로 주님의 일에 동참시키는 믿음의 결단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위대한 출발점” 앞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은 이미 관계의 회복을 허락하셨으며, 지금 우리앞에는 하나님의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슴 설레이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또 하나의 위대한 출발자를 원하십니다. 바로 여러분과 제가 그 길을 가는 신앙인이 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