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창세기강해[04]-중매쟁이 하나님(창 2:18-25)

진실과열정 2005. 10. 14. 18:06

중매쟁이 하나님(창 2:18-25)

 

말씀을 준비하며

  청춘과 창조주

     청춘이라는 젊음의 시간은 우리들의 긴 인생의 여정중에서 참 매력적인 기간이다. 저 깊고도 거친 바다를 거침없이 헤엄칠 수 있을 것 같은 패기로 가득찬 시기가 바로 청춘일 것이다. 저 높고 끝없는 창공까지도 넉넉히 품을 수 있는 열정의 사람들이 바로 청춘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청춘의 때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전 11:9)”

     그러나, 동시에 청춘의 시간만큼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가진 시대도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세상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없으며, 자신의 꿈이 날마다 작아지며 소멸되는 현실속에서 자신의 존재이유에 심각한 회의를 품기도 한다. 그렇기에, 성경의 지혜자는 청년들에게 한가지만은 잊지 않기를 부탁하고 있다. 지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그렇다. 청년의 시기에 꿈과 고민은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속에서 우리가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붙잡아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꿈을 나의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을 맺게 될 때, 그 꿈은 현실이 된다. 우리의 모든 고민을 나의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을 맺게 될 때, 그 고민은 기쁨의 찬양이 된다.


  젊은날의 고민-결혼

     젊은날의 최고의 고민중에 하나가 바로 결혼이다. 이성을 만나 교제하며,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걷던 두사람이 한집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미스테리를 푸는 것이다. 생각만해도 젊은날의 최고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이 고민이야말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잠 못이루도록 만든 각성제였을 것이다. 어둠 깊은 밤 홀로 떠있는 반달을 보며, 나머지 반달은 어디에 있는지 끝없는 밤하늘을 뒤지는 것이 젊음의 고민일 것이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샘물이다. “젊음의 고민을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을 맺으라”라는 지혜자의 충고처럼,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밝은 섬광으로 고민하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24절은 아담이 한 말이 아니라,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가 첫 번째 결혼의 원리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일종의 덧붙임이다. 결국, 18-25절까지의 사건을 통해서 창세기의 저자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몸을 이룬다”라는 결혼의 원리이며, 남자와 여자의 심각한 고민을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풀어주신다는 삶의 원리인 것이다.


말씀의 중심에서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세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 세가지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 나와 너, 나와 세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가지는 서로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중매쟁이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의 절대적 필요를 아시는 분이다.

     우리가 읽은 짧은 본문안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토기장이로 등장하신다. 19절을 보면, 흙으로 동물을 지으시는 모습이 나온다. 이 표현은 앞의 7절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는 표현과 같은 표현이다. 즉, 하나님은 토기장이로 나타나고 있다. 흙을 정성껏 빚어서 섬세하게 사람을 만드시듯이, 하나님은 동물들도 각 종류대로 빚어서 지으셨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외과의사처럼 등장하신다. 우리는 21절에서 하나님의 수술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하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꺼내고 살을 봉합하는 엄청난 일을 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담의 몇 번째 갈빗대를 꺼내었는가? 수혈은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21절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잠들다’라는 표현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잠들게 한 내용이 몇군데 나온다(사 29:10; 삼상 26:12). 여기서 ‘잠들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방법의 신비로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사람의 관찰에 의해서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일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21절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수술장면을 선명하게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신비로운 간섭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겸손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짧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외과의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가지 모습을 더 찾고 싶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이다. 그것은 바로 중매쟁이 하나님이시다. 22절을 통해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셔서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것이 바로 중매쟁이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이시간 우리 사람들 앞에서 중매쟁이로 등장하신 하나님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다.

     2장에 들어와서 최초로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이 바로 18절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셨다”라는 것은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참으로 중요한 표현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1장 26절에서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스스로에게 말씀하시는가?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해서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만 하나님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계신다”라는 놀라운 감격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지금도 깊이 생각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18절에 나타나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좋지 못하다’라는 하나님의 평가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1장에서는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7번이나 등장하고 있는데, 2장에 넘어와서 ‘좋지 못하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1장의 창조가 ‘좋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것일까? 그런 말은 아니다. 1장 31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은 그것 자체로 좋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관계이다. 24절에서 보여주는 것은 연합과 한몸이라는 관계의 아름다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관계를 맺지 못하는 남자의 홀로있는 모습에서 좋지 못한 것을 보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결심하신다. 영어성경은 suitable helper, 즉 “남자에게 적합한 도우미”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의 원래적인 표현은 “남자에게 반대되는 도우미”이다. 이 표현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하나님은 남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여자를 지으셨다. 이 말은 여자가 힘이 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남녀 상호간에 동반자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되는’이라는 표현은 말그대로 여자를 말한다. 그러나, 폭넓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말그대로 하나님은 나에게 반대되는 사람을 도우미라고 주시려고 하셨다. 나랑 다른 사람이 나를 도울수 있다는 말이다. 성격이 다른 사람도, 재산이 다른 사람도, 성장배경이 다른 사람도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을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은 나와 같은 사람을 주신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종하는 그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점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절대적인 필요를 아신다. 하나님만이 내게 중매쟁이가 될 수 있다.


  나와 세상: 세상은 나의 짝이 아니다.

     두 번째로 세상과 나와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결심하시고 엉뚱한 일을 벌이신다. 하나님이 흙으로 동물을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끌어 내셨다. 아담은 각 생물에게 이름을 준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고서 감탄한다. “와! 아담, 머리 좋은데!” 그러나, 실상 이 말씀은 아담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의 아담은 생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면서 점점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8절에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지으시려는 계획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실행하고 계신 것이다. 모든 생물을 만드셔서 아담에게 보여주시면서, “자! 이것이 너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느냐?”라는 것이다. “자! 이것이 너에게 돕는 배필이냐?”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생물에게는 감사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에 반대되는 도우미’로는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20절의 표현은 더더욱 실감이 난다.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각종 새를 아담에게 이끌었다. 그런데, 20절은 더 세분화시키고 있다. 즉, 집에서 기르는 가축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모든 육축). 성경은 이렇게 단정한다: “이 모든 생물에게 아담의 돕는 배필은 없다”

     그렇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에 필요한 충고였다. 당시 고대인들에게 동물은 오늘날보다 더 높은 존재였다. 그 옛날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신의 지위를 부여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들의 종교는 바로 동물을 신격화한 것이었다. 여로보암이 송아지 상을 만들었듯이, 동물은 신상이 된 것이다. 이렇게 동물들을 신으로 떠받드는 종교들에 둘러싸여 있는 고대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동물도 인간보다 우월하기는커녕 동등하지조차 않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충고이다. “모든 생물들은 사람을 돕는 배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동물에는 창조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7절과 19절을 비교하면 알 수 있는데, 똑같이 흙으로 빚어서 사람과 동물을 만들었지만, 사람에게만 한가지가 첨가되고 있다. 그런데, 그 차이점은 7절의 “생령”과 19절의 “생물”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말로 “생령”하면 신비롭고, “생명”하면 덜신비롭게 느껴지지만, 원어로는 “생령”과 “생물”은 똑같은 단어이다. 즉, 이 말은 원어로 네페쉬 하야, ‘숨쉬는 생명체’라는 뜻이다. 인간도 숨쉬는 생명체(네페쉬 하야)이고, 모든 동물도 숨쉬는 생명체(네페쉬 하야)이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이냐면, 우리에게 불어진 숨의 종류의 차이이다. 즉,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생기 즉 하나님의 영이 들어갔다는 것이 큰 차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7절의 “생령”과 19절의 “생물”은 원어로는 똑 같은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영적인 존재, 영적인 숨을 쉴수 있는 영적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호흡하는 생물체’를 보았더라도 자신과 같은 영적 생명체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동물은 인간의 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세상은 동물이 인간의 짝이되고 있는 세상이다. 동물이 옷을 입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세상이다. 동물을 아끼며 보호하는 것은 인간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명령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보호하는 것이지, 인간의 짝으로 대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 바로 동물을 짝으로 삼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인 것이다.


  나와 너: 부끄러움 없는 연합

     세 번째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하셨다. 오히려 이것은 아담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어느것도 나의 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더 이상 깨어나고 싶지 않은 어둠에 그는 떨어진 것이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이러한 깊은 잠을 경험해보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분들에게 오히려 복된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고 싶다. 하나님은 아담의 깊은 잠중에서 위대한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23절을 보자. 23절은 인간의 선포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포가 아닌가 한다. 23절은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아주 아름다운 시이다. 5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안에 거의 모든 문학적인 표현법이 들어있다고 학자들은 감탄한다. 쉽게 우리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이거야! 이거! 내 뼈중에 뼈! 내 살중에 살! 이것은 여자로 불리울 거야! 왜냐하면 남자에게서 취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진 여자였다는 것을 아담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갈빗대를 꺼내었을까?”라는 생각에 이렇게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마음을 지켜주는 부분이 바로 갈빗대가 아닌가! 나를 지켜줄 수 있도록 나와 반대되는 돕는이! 그것이 바로 갈빗대의 비밀이다.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묵상은 더 커진다. 언어학적으로 갈빗대(rib)라는 말은 ti라는 말이다. 그런데, 생명이라는 말이 바로 til이다. 결국, 같은 생명을 나눈 한몸이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은 갈빗대 하나를 꺼낸 것이 아니라, 생명을 꺼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몸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사람이 나눈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성경은 이 사건을 인간이 범죄하기 전의 일로 보여주고 있다. 25절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25절을 읽으면 곧바로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했던 아담과 여자를 기억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결혼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깨어진지 오래이다. 이혼은 범죄한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혼을 안타까와한다. 우리는 이혼을 슬퍼한다. 우리는 이혼을 정죄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는 이혼을 정당화해서도 안된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이 있을 수 있으나, 본래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9:4-9). 계속해서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치 사도 바울과 같이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고자된 사람은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마 19:11-12).

     그렇지 않는다면, 젊음의 시절에 배우자를 위한 기도보다 중요한 기도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 아버지, 내 생명을 바쳐서 도와야 할 나의 반대되는 도우미를 내게 허락하시옵소서.” 할렐루야! 아담과 그 아내 모두 벌거벗었듯이 우리 모든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약점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부끄러움없이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되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중매쟁이

     이제 말씀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짧은 본문에서 세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중매쟁이이다. 즉, 하나님은 나의 결정적인 고민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내게 딱 맡는 사람을 허락하실 분도 하나님이요, 내게 딱 맡는 직장, 학교를 준비해 놓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도 하나님은 바로 나를 위해서 생각하고 계신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두 번째는 나와 세상과의 관계이다. 세상은 나와 짝할 수 없는 관계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의 세상은 개인주의가 심각화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사람보다 다른 것으로 더 좋아하게 된다. 개와 같은 애완동물, 인터넷이나 음악같은 정신세계…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진정으로 나에게 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복음으로 다스려야 하지만, 세상과 짝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나와 너와의 관계이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교회라는 한몸을 이룬 지체이기에 우리가 바로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며 보호해주며, 도울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배우자를 위한 기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평생 연합하며 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상대방의 모든 약점까지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준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세 가지 고민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질문’이라는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세 가지의 고민을 안고 고심한다. 그 문제인즉 “인생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그리고, “일생을 통하여 꼭 만나봐야 할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고민을 하던 주인공은 한 현인을 찾아가서 문제의 해결을 찾게 되었는데, 그 현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며, 그리고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도 지금이라는 시간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