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창세기강해[02]-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라(창 1:24-31)

진실과열정 2005. 10. 14. 18:02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라(창 1:24-31)


말씀을 준비하며

인간의 가치

     요즘 조정래씨가 쓴 「한강」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조정래씨는 「태백산맥」과 「아리랑」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아직 완독을 하지는 못했는지만 책의 내용은 대략이러하다: 1950년 이후부터 경제발전의 시대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밑바닥 인생들의 눈으로 그린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이 아파왔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삶이 이렇게도 험하였단 말인가!” 조정래씨는 「한강」을 중의법으로 사용한 것 같다. 첫째는 우리나라의 물줄기인 한강 그대로이고, 둘째는 원통할 ‘한’(恨)자를 사용한 원통한 역사인 것이다. 왜 그렇게 마음이 아프냐면, 오늘날도 그렇지만, 우리의 과거는 사람을 사람으로 안봤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천두만과 나삼득은 소작농을 자의반 타의반의 이유로 때려치고 무작정 상경한 고향 선후배 사이이다. 이 둘은 할일이 없는 날에 서울의 부자 동네의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한다.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천두만은 생각한다. “천당허고 지옥이 죽어서나 있는지 알었둥마 그것이 아니여. 여그가 천당이면 나가 사는 디가 영축없이 지옥이여. 여그 사는 사람덜언 멀 혀묵고 살간디 요리 잘들 사는고? 사람이 사람이라고 다 똑겉은 사람이 아니여. 여그 사람들에 비허면 움막에 사는 것덜언 즘생 아니라고. 나가 평상 발싸심혀대도 이리 살아보기는 글른 것이겄제? 사람이 한 분 태어났다가 한 분 죽는 것이야 다 똑겉은디 워디서보톰 잘못되야 요리 차등이 나는 것이제? 삼득이 성님도 맴이 참 기맥히겄제…”(조정래, 「한강 1」, 157)

     물론, 위와 같은 상황은 이 세상 어디에도 있는 일이다. 하루 이틀의 이야기도 아니고, 계속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나는 부자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소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은 부자들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처럼 살지 못하는 사회를 미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지 못하는 사회란, 인간의 가치가 상실된 사회를 말한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 들어와서 편리하고 성장하는 사회가 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가치가 상실된다면 그것은 사람이 사는 사회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가치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가치를 과연 평가할 수 있을까? 그렇다! 인간의 가치는 분명히 있으며, 그 가치 역시 평가할 수 있다!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질문들: 무엇을? 누구에게? 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시대에는 인간의 가치는 평가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치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살기 3,000년전에 기록된 문서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오늘날의 가치관과 매우 유사하다.

     당시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동물이었다. 동물은 각 부족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이 탈출했던 이집트에서만 해도 독수리같은 동물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가장 가치가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바로,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믿었던 생각이 글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계획에도 없었는데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다: “원래 세상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었다. 이 세상엔 신들만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이 신들이 먹고 사는 것이 귀찮아졌다. 그래서, 신들이 고민하다가 인간을 만든 것이다. 사람들을 일 시키기 위해서…” 이것이 당시의 생각이고, 당시의 믿음이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운명의 장난으로,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물건”인 것이다.

     오늘날도 그렇다. 2차세계대전 시기에는 인간의 가치가 빨래비누 몇 개로 계산되었었다. 비록, 요즈음은 사람을 납치해서 1억정도 부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돈으로 계산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속에서 하나님은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리를 말씀하신다. 이 진리가 무기가 되도록 말씀하신다. 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잘못된 세상에 대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란 무엇인가?


말씀의 중심에서

대결 2: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피조물은 사람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피조물은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1장을 각 날별로 정리를 해본다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성경은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니다. 다음주에 말하겠지만, 창세기 1장은 특별히, 말 그대로 놀라운 신비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1)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다.

     우선, 첫번째로 창조의 분량에서부터 말씀하고 있다. 가장 많은 분량이 바로 인간이 창조된 여섯째 날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빛, 해와 달, 바다 괴물 같은 것은 그냥 목록만 기록될 뿐이고 그 분량도 상당히 짧다. 당시의 사람들의 관심은 해와 달, 별들처럼 생명이 없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의 관심 역시 생명이 없는 돈과 물질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오직 우리 사람에게만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엿새라는 시간은 똑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관심도의 차이는 우리 사람에게 월등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해와 달에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바로 사람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사람이 천지창조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사람보다 힘센 동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사람보다 빠른 동물도 셀 수 없이 많다. 사람보다 오래 사는 식물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에게 통치권을 주지 않으셨다. 오직, 사람에게만 다스릴 수 있는 통치권을 주셨다. 동물들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지만, 사람은 더 많은 복을 하나님께 받았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을 다른 만물앞에서 편애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닮아야할 하나님의 성품이다. 다른 만물보다 사람을 편애하는 그 성품이 우리가 회복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상당한 사람편애주의자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는 최고의 날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셨다. 그 어떤 것보다 사랑해야하는 대상이 사람이어야함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보다 사람을 편애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TV보다 사람을 편애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돈보다 사람을 편애해야 한다. 창조의 분량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편애이다.


2)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두 번째는 생명있는 것의 창조순서에 있다. 즉,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식물, 동물, 사람의 순서이다. 과연, 성경도 이러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세부류가 서로 차이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우선 식물의 창조를 보자. 우리는 10-12절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본문에서는 창조라는 단어가 없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식물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땅에게 명령하셨고, 12절에 “땅이” 식물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24-25절에도 계속된다. 24절에 “땅이” 생물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1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식물과 동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땅에서 생겨난 존재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의 창조는 그 표현이 상당히 다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사람의 창조와 관련하여 땅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렇다고, 사람이 땅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2장). 1장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다른 점’에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다른 어떤 만물보다 아주 특별하게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람이 땅에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난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땅의 것과는 비교되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땅의 가치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위배됨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들과의 만남이 바로 이것을 증거한다. 사람들은 땅의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땅의 가치를 극복하셨다. 예수님의 제자중에서 수제자라고 알려진 베드로를 땅의 가치로 평가해보라. 예수님의 명성에 먹칠을 할 사람이 바로 베드로 아니겠는가?(행 4:13) 그러나, 예수님은 땅의 가치로 베드로를 보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창조물로 보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앙의 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라”


3) 사람은 하나님처럼 연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사람 창조의 의미이다. 우리는 26-28절에 관심을 모아야 하는데, 이것은 좀더 우리에게 집중을 요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의 배경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삼위일체라는 것과 인간은 영과 정신으로 나뉘어진다는 교리이다. 26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하시고 계신다. 우리가 창세기 1장만 보면, 이 말씀은 신비이지만, 다른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신비는 풀려진다. 그렇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잘 나타나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격을, ‘모양’은 초자연적인 부분을 닮았다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열사람이 열가지 주장을 내세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턱대고 다른 성경의 말씀을 갖다대기 전에 우선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의 말씀에서 먼저 생각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창세기 5장 3절만해도, “아담이 일백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말하고 있다. 즉, 형상과 모양은 구별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같이 쓰이면서 뜻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그런 말인 것이다. 이렇게 교리적인 부분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본문에서 배워야 하는 창조의 의미에 관심을 갖도록 하자.

     우리는 사람의 창조가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밝혀내 한다. 우선, 사람의 창조를 다른 생물들의 창조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비교하는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식물의 창조인 11-12절과 동물의 창조인 21, 24-25절에 모두 반복적인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종류’이다. 천하에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그냥 ‘종류’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만큼은 그냥 ‘종류’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말씀에 이어서 ‘남자와 여자’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바로, 그냥 사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람 창조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라는 복수형이지만 하나이듯이, 우리 사람도 하나님처럼 남자와 여자로, 즉 복수형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더 나아가 말그대로 남자와 여자라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연합하는, 하나가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란, 하나님이 맡겨주신 만물을 다스리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사람들이 서로 연합, 즉 하나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 창조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오셔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하셨다. 그 많은 일은 기록해서 쌓아둘 수 없을 정도이다(요 21:25). 그런데, 그 많은 일들 중에서 사도 바울은 단연 십자가를 뽑고 있다(고전 1:17). 그러면서, 그 십자가가 한 일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연합’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제는 멀리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3-14)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인데, 그 구원이란, 우리로 태초의 창조의 모습, 즉 서로 다른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시듯이 우리도 하나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연합을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연합이 필요하며, 이차적으로는 우리 형제, 자매들과의 수평적인 연합도 필요한 것이다. 수평적인 연합을 위해서 노력하는 삶! 이것이 오늘 본문을 향한 우리의 적용이어야 한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무엇에 대결해야 하는가?

     말씀을 정리해보자. 소설 「한강」보다 요즈음 시대가 오히려 인간의 가치가 떨어진 시대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의 가치는 계속하여 떨어질 것이다. 말세가 되면, 사랑이 없어진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체념하라는 의도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런 시대이기에 오히려 더욱 힘을 내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보이라는 요구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은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하며,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인 것이다. 더 이상 여러분은 다른 어떤 것의 목적이 아니고, 도구도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임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도록 하라. 둘째는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는 세상이 알 수 없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여러분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라. 서로서로가 극히 존중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달라고 기도하라. 셋째는 우리는 연합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 혼자만’ 이라는 생각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에게도 더욱 그렇하다. 내가 교회라는 한 몸에 소속되어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도록 하라. 이 말은 우리 영적인 공동체가 진정한 삶의 나눔의 터가 되도록 나를 열어보이고, 나를 양보하며, 서로를 높인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삶의 연합체인 것이다.

     오늘의 제목은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라!”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의 검이었다. 인간의 가치를 알지못한 세계였던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간의 참 가치를 선포해야 했다. 오늘 우리의 세계도 인간의 가치를 알지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회복하며,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청년이 되게해 달라고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