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여호수아 22장 10-34절
제목: 신앙공동체의 참모습
1. 서론
미국과 영국에 의해 시작된 이라크 전쟁이 이제는 거의 끝이 나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며칠전만해도 브라운관을 깔았던 장면은 검은 하늘을 뒤덮었던 미사일의 섬광이었는데, 이제는 사담 후세인 동상이 넘어지고 짖밟히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한때는 전세계적으로 반전 시위를 펼쳤던 모습들도 기억을 하게 됩니다. 양편 모두가 ‘평화’를 외치면서 그 방법에 대하여 견해차이를 보였던 경우가 바로 ‘이라크 전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미국와 영국은 지구촌의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을 하고 있으며, 반전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지구촌의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멈추라고 요구합니다. 모두가 지구는 하나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실행방법에 있어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인류에게는 그 어떠한 실행방법도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음을 이번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절실히 깨닫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방법이 지구촌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일까요?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에 한가지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담 이후로 사단의 포로가 되어버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은 한 인물을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브라함이 뛰쳐나온 곳이 바로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갈대아 우르’라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계획의 서곡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합니다. 두가지인데, 첫째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하시는 것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열방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근본적인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열방이 하나님 품안으로 돌아오고, 또 열방이 온전히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 원리는 계속되어져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복을 주시며,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이 복을 받도록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방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복의 통로를 막아버리고, 자신들만이 복을 받아야 한다는 선민사상에 빠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계속으로 흩으셨습니다. //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2,000년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올바르게 만들 수 있으며, 하늘 아래있는 모든 사람들의 깨어진 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10)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일,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하는 일을 2,000년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획은 변했습니다. 내용이 아니라, 그 방법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즉, 육체적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을 하나되게 하시려는 방법에서,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을 하나되게 하시려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이스라엘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교회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을 하나되게 하시려는 계획이 구약성경이라면,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서 열방을 하나되게 하시려는 계획이 신약성경인 것입니다. //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또한 에베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4:3):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온전히 하나되는 몸’으로서의 교회를 힘써 지키며, 열방으로 하여금 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드는 이 임무를 힘써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2. 본론
저는 오늘 여호수아의 말씀을 이 배경 아래에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즉, 오늘 “우리 청년부라는 작은 교회를 배경으로 오늘의 본문은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제목을 ‘신앙공동체의 참모습’이라고 정했습니다. 신앙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1) 신앙공동체란 서로의 상황에 민감한 모임을 말한다(10-18a).
우리는 지난 주에 두배나 더한 충성을 보여준 요단강 동편의 3지파(르우벤, 갓, 므낫세 반)를 보았습니다. 이들 지파는 good이 아니라, better로 나아가는 신앙의 지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이들이 중심이 되어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이 세지파가 요단강을 건너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러니까 자기들 땅도 아닌 9지파들의 소유지인 요단강 가에 단을 쌓았다는 겁니다. 10절을 읽어봅시다. 이 세지파가 쌓은 단이 얼마나 컸던지 ‘볼만한 큰 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때 동물이나 식물을 태워서 연기를 올려드리는 예배의 기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2절을 읽어봅시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싸우러가자!”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었습니다. 십계명의 제 1계명이 바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12장에 의하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6). 결국, 9지파가 볼 때에, 3지파가 행한 일은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곳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다른 신을 섬긴다’는 배교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러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신앙공동체란 어떤 무리를 말하는가를 듣기 원하는 것입니다. 10절부터 20절까지의 본문에서 첫 번째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앙공동체는 서로의 상황에 민감한 모임이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12절에 이런 단어가 눈에 띕니다. “이를 듣자 곧” 그들은 서로의 상황에 상당히 민감한 모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몸과 같습니다. 무조건 반사의 모습과 같습니다. 지체들의 상황을 접하고 그들은 즉시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절까지 말씀을 보면 그들이 왜 민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상황에도 민감해야 겠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인 상황앞에 그들은 민감했던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3지파가 하나님앞에서 올바르게 서지 못하는 모습을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16절). 신앙공동체란, 영적으로 올바르게 서지 못하는 지체들로 인하여서 마음 아파할 수 있는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싸우러가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전쟁 사령관 여호수아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제사장 비느하스와 각 지파의 대표자 10사람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싸움을 위해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3지파가 하나님앞에 올바로 서도록 돌이키려 갔던 것입니다. // 그런데, 말씀을 더 읽어보면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이렇게 말합니다(18절):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신앙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하는 일이,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전투에서 아간이란 사람이 범죄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혼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소유지까지 포기하면서 그들을 회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공동체란 서로의 상황에 민감한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우리 청년부는 과연 신앙공동체인가?” “우리 청년부는 과연 한 몸인가?” “우리 청년부는 과연 교회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이미 하나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령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나의 섬기는 말을 통해서 성령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나의 문자메시지를 통해서 성령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나의 전화나 편지를 통해서 성령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기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기도합시다. 우리의 모임이 서로의 상황에 민감한 신앙공동체가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2) 신앙공동체란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영원히 나누는 모임이다(21-34).
비느하스의 질문에 3지파가 대답을 합니다(22절). 그들의 대답에는 놀라운 신앙고백이 숨어있습니다. 우리 말에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라는 원래적 표현은 “הוהי םיהלא לא”(“엘 엘로힘 야웨”)입니다. ‘엘’은 당시 신의 총칭어였습니다. ‘엘로힘’은 ‘신들’이라는 복수형으로 전능의 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깐, 3지파는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신중에서 가장 위대한 전능한 여호와”를 우리는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쌓은 단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3지파는 요단강 건너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백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9지파들이 자신들을 이방인처럼 여길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막을까봐 그것을 두려워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다!”라는 증거가 되도록 같은 모양으로 강가에다가 단을 만들어놓았던 것이었습니다. 24-26절을 읽어봅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상상력을 조금만이라도 활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요단강 가에 1Km 떨어져도 보일만한 큰 단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패역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천만인의 두령들과 비느하스가 비장한 마음으로 3지파를 만나러 갔습니다. 마치 남북대화를 앞두고 있는 냉냉함이 둘러싸여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참으로 신앙의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이 단은 우리도 영원히 당신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증거물일 뿐이오!”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워했을까요? 30절에,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천만인의 두령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고 말하고 있으며, 33절엔, 이 사실을 알게된 이스라엘 온 자손들이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장 비느하스로 하여금 영적인 통찰력의 말씀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32)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공동체란 무엇입니까? 신앙공동체란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영원히 나누는 모임입니다.
3.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참다운 신앙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서로의 상황에 민감해하는 영적 감각을 가지도록, 그리고 한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주안에 한가족으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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