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창세기강해[01]-신앙은 대결이다(창 1:1-2)

진실과열정 2005. 10. 14. 18:00

신앙은 대결이다(창 1:1-2)

말씀을 준비하며

닭이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인간은 태어나며 성장하면서, 수많은 ‘질문’이란 허들을 경험해 왔다.  어떤 질문은 아주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었고, 또 어떤 질문은 좀처럼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예를 들면,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질문은, “왜 사과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가 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대답으로는 “만유인력의 법칙 때문”이라고 하면된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몇 번의 관찰과 연구를 통해서 답을 산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과 관련된 질문은 결국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질문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 질문은 현상과 관련된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그렇다.  이 질문은 실제로 그 어느 누구도 현상을 보지 못했던, 한마디로 ‘기원’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의 허들을 뛰어넘으려 했다.  원숭이를 닮은 인간을 보고서 영감을 얻었는지, 어떤 과학자는 진화를 주장하면서, 오늘도 땅 속 깊은 곳에서 원숭이와 닮아보이는 인간의 작은 뼛조각을 채취하고 있다.  좀 차원높은 사람들은 우주의 다른 별들의 탄생과 죽음을 비교연구함으로써, 지구의 닮은꼴을 찾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할 정도로 차원높은 사람들은 외계인 E.T.를 생각해 냈으며, 바로 E.T.가 달 뒤편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닭과 달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는 명백한 대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창세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창세기라는 말씀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우주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질문하겠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그렇다면, 조금 다른 차원의 질문을 하겠다: “닭이 먼저 생겼나? 인간이 먼저 생겼나?”  여러분들은 잠깐 머리를 굴려본 다음에 닭이 먼저 생겼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닭은 다섯째날에 하나님이 창조했고, 인간은 여섯째날에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인간이 먼저 창조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창세기 2장 7절을 읽자.  그리고 2장 18-19절을 읽자.  다시 한번 질문하겠다: “닭이 먼저 생겼나? 인간이 먼저 생겼나?”

     갑자기 멀미가 나는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내 목적이 아니다.  내 목적은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바른 이해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3가지 질문에 답을 잘하면 된다.  그렇다.  성경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3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첫째는 ‘무엇을?’이라는 질문이다.  두 번째는 ‘누구에게?’라는 질문이다.  세 번째는 ‘왜?’라는 질문이다.  ‘무엇’이란 말씀의 내용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 신앙의 본질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란 그 말씀을 받아야 했던 ‘그때의’ 사람들을 말한다. 즉, 신앙의 본질을 받았던 사람들의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왜?’란 바로, 바른 성경 이해의 핵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당시 사람들의 상황에 연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왜?’에 대한 대답이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맞는 사람은 반드시 왼편 뺨도 맞아야 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옆 친구를 때린다.  그리고 이 말씀을 노래한다.  왜냐하면, ‘무엇?’만을 염두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대하여 아까의 질문을 하면 이렇다: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는 왼편도 돌려내며”라는 말씀이다.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뺨을 때리려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뺨을 맞는 사람이다.  ‘왜’ 말씀하셨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는 천국의 제자로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질문들: 무엇을? 누구에게? 왜?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이라는 질문만을 생각해 왔었다.  즉, “창세기 1장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만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2장을 성경공부하면, “인간이 닭보다 먼저 지음받았다구?”라고 놀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성경중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그 부분만을 붙잡는 고집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고집중에서, 구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있다: 즉,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예정이다”라는 것과 “구원은 인간이 마음을 열고 믿어야 한다”라는 서로 대립되는 생각이다.  성경은 이 두가지 내용이 모두 나와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1절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예정임”을 말한다.  다른 예를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찾아보자: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구원은 인간의 믿음”에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무엇을?’만 생각하면 답이 안나온다. 

     그런데, ‘누구에게?’라는 생각만 한다면 쉽게 풀린다.  바울은 누구에게 편지를 썼는가? 불신자가 아닌, 신자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란, “어떻게 나같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니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라는 신앙고백뿐인 것이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정”은 하나같이 구원받은 자로서의 신앙고백의 맥락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16장 31절은 누구에게 한 말인가?  불신자에게 한 말이다.  그렇다.  불신자에게 필요한 말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는 말이지, “당신의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니, 예수 믿어야되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중에서도 혹시 아직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믿지 못한 분이 있다면, 모든 말씀을 읽되 특히 복음서를 읽도록 하라.  특히, 요한복음을 읽도록 하라.  왜냐하면,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고,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20:31)”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중에서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믿어 구원을 받은 분이 있다면, 모든 말씀을 읽되, 특히 바울의 서신서를 읽도록 하라. 그리고, 바울의 그 신앙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도록 하라. 그리고, ‘벌레만도 못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날마다 기쁨의 고민을 하도록 하라.

     나는 그동안 기도하면서 다시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즉, 내가 청년부 사역을 통해서 힘써야할 부분이 성경말씀을 바르게 풀어주되, 그 방법으로 ‘무엇’과 함께 ‘누구에게?’와 ‘왜?’를 밝혀주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무엇을?’만을 들어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조금 충격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쉽게 굳어지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다른 이야기를 듣게되면 거부반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엇을?’만을 아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으며, 은혜가 된다.  그렇지만, 특별히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은 성경을 연구하며, ‘누구’와 ‘왜’까지도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다음 한주까지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서 말씀을 준비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도제목으로 붙잡고 있는 말씀을 읽어보면서, 이 말씀이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기를 기도한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하고”(눅 24:32)


말씀의 중심에서

신앙은 대결이다.

     우리들은 신앙인이다. 신앙인이란 무언가를 믿고 받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신앙인이다. 무언가를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도,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무엇을 믿는 신앙인인가?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받드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받들면서 사는 삶을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힘을 쓴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오직 성경에서 배워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이렇게 성경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받드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근본적인 길인 것이다. 창세기 1장의 말씀 역시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말하는 ‘신앙의 첫출발’을 보여준다. 창세기 1장이 말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첫출발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신앙은 대결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 창세기 1장은 ‘신앙은 대결이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거듭난다’는 말이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지․정․의 모든 것이 새로워짐을 말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이루어진 일은, ‘이전 것이 지나가는’ 사건이다. 즉,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자리 잡았다”라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은 이전 것과의 대결’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 것’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무엇과 대결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로 이 신앙의 도전자를 창세기 1장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결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전 것’과 대결하는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창세기 1장을 들었던 사람들은 모세의 지도 아래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 입성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민족들이었다. 바로 이들에게 신앙의 대결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서 살 가나안 땅은 완전히 깨끗하고 새로운 허허벌판의 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은 아주 오래된 무궁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리고성은 기원전 6,000년전부터 세워진 곳으로 가장 오래된 문명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오래된 이유중에 하나는 이 가나안이라는 곳이 예부터 중간다리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즉, 위로는 메소포타미아라는 문화가 있었고, 아래로는 이집트라는 문화가 있었다. 이는 마치 구한말의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위로는 중국이 있고, 아래로는 일본이 있는 꼴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의 연결통로가 되었던 것과 같이, 가나안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통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나안은 수많은 종교들을 수입하고 변형시켰으며, 수많은 사상 즉 삶의 방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타락할 수 밖에 없었다. 가나안은 마술과 주문이 넘쳐나는 곳이 되었다. 발견된 기록을 보면, ‘바알이라는 신이 송아지와 성관계를 맺는다’라는 글도 있을 정도이다. 동성연애는 새발의 피가 될 정도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들어갈 때는 다름아닌 가나안의 죄악이 극에 달할 때였다(신 7:1-5).

     바로 이런 때에 신앙인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이 ‘대결’이라는 것이다. 바로 가나안과의 대결이다. 그런데, 이 대결이라는 것은 칼과 화살의 물리적인 대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나안을 사로잡고 있는 정사와 권세와의 대결이다. 이것은 가나안을 사로잡고 있는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대결인 것이다. 바로, 가나안의 세계관과의 대결인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잘못된 세계관 앞에서 대결할 수 있는 진리의 검인 것이다.


세부적인 대결

     보다 자세히 들어가보자. 이스라엘 민족들이 대결해야 하는 것은 가나안 땅에 널리 퍼져있었던 세계관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관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창조, 곧 세상의 출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다. 우리는 성경에만 창조에 대한 말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창조에 대한 글이 있다. 가나안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거대한 문화도시인 북쪽의 메소포타미아와 남쪽의 이집트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곳이 바로 가나안이다. 이 가나안에는 창조에 대한 글 뿐만 아니라, 홍수에 대한 글들도 있었고, 태초에 일어났다고 생각되어지는 머나먼 옛 일들에 대한 기록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기록들은 성경 말씀보다 수천년 앞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나안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보내시면서, 그분 스스로가 정면 대결을 보여주신 것이다. 바로 창세기 1장을 통해서 였다. 우리는 세가지만 살펴보면서, 그들이 무엇과 대결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번 주는 그 첫 번째 대결을 살펴본다.


대결 1: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자이다

     우리는 성경보다 앞선 천지창조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하고 궁금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에게는 지성과 종교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들의 뿌리를 찾게되고, 신비한 것들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무엇보다 신비한 것은 자연이다.

     사람들은 물이 있는 강주변에 집을 짓고 살게 된다.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은 언제나 쉬지 않고 온 땅을 비춰주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준다. 그런데, 태양이 너무 뜨거우면 땅은 매마르고, 구름에서 비가 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비는 생명과 같다. 그런데, 이 비가 너무 많으면 강은 범람하게 된다. 결국, 옛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강의 범람이었다. 강이 넘쳐서 땅을 덮으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이다. 이런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속에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신으로 불렀다.

     가나안의 창조신화는 이러한 자연신들의 싸움 이야기로 가득하다. 강은 신들의 어머니이다. 이 강신에서부터 다른 신들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장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 바로 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강이 범람을 한다. 그래서 강신의 자녀들이 강신을 죽인다. 죽은 강신의 시체에서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든다. 그리고, 강에서부터 생겨난 여러 신들이 서로 독립된 자리를 잡는다. ‘난 태양신(히브리어로 ’샤마쉬‘), 낮을 주관한다’ ‘난 달신(히브리어로 ’야리‘), 밤을 주관한다’ ‘난 바다괴물, 바다를 주관한다’ 이렇게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신의 시체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하며, 각각 독립된 지역에서 최고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이러한 신들에게 잘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한 생각속에서 창세기 1장은 그렇지 않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가나안 사람들이 신이라고 섬기는 그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준다. 9절에, 가장 위험의 존재라고 생각되는 ‘물’이 하나님에 의해서 나뉘어지고 한곳으로 ‘모여졌다’. 이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강은 범람할 수 없는 존재라는 선포인 것이다!(시편 69편 1-2절을 읽어보면, 고대인들이 물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신으로 받들어진 ‘해’와 ‘달’을, 성경은 신의 이름(‘샤마쉬’, ‘야리’는 가나안에서 신으로 통했던 것이다)으로도 부르지 않는다. 16절은 단지 두 큰 ‘광명’일 뿐이다!  성경은 태양과 달이 신으로 높여지는 것에 대결하고 있다!  21절에보면, ‘큰 물고기’가 나온다. 이것은 고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괴물’을 말한다(영어성경을 찾아보라). 그런데, 바다를 주관한다는 이 바다괴물이라는 것도 단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창세기 1장은 신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모든 것들을 배격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주인이시라는 선포이다(시편 74편 12-17절을 읽어보라).

     이 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 바로,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쓰인 ‘창조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어일때만 쓰이는 동사이다. 즉,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에만 사용된 동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없는데서 있게하는 하나님만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시 148:5; 잠 8:22-27).  그래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은 어떤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시는 분이다”라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분은 단지 ‘말씀’만 하신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빛은 있어진다. “생물이 생겨라”하면 생명있는 것들이 생겨진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는 불가능이 있을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그들은 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들은 죽은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던 것처럼, 헛된 신들을 기쁘게하도록 이짓 저짓하며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붙잡아야 했던 진리였던 것이며, 대결해야 했던 것이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무엇에 대결해야 하는가?

     말씀을 마치면서, 오늘의 우리에게 비추어보자. 우리의 세상은 가나안과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삶의 원칙들이 있다. 오늘날에는 태양신, 달신, 강신, 바다괴물신은 없지만, 그대신 다른 신들이 있다. 오늘날의 시대는 무엇이 신인가? 돈, 학력, 외모, 취미, 행운, 쾌락, 자기 소유, 자기 고집… 그렇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붙잡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신앙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결해야 한다. 돈, 학력, 외모, 취미, 행운, 쾌락, 자기 소유, 자기 고집을 신으로 붙잡으며 살아가는 세계속에서 외쳐야 한다.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라고 외쳐야 한다. 당신이 붙잡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것에게 선포하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고 선포하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대결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반드시 대결해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이렇게 어려운 곳을 주셨을까? 이것은 동시에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갈등한다. 이 세상에서 신앙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게임이 안된다. 차라리, 산속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세상에 등지는 살아야되나? 세상과 관계없는 삶을 살아야되나? 그런데, 세상과 동떨어진 삶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잘못된 세계관과 대결하는 삶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던 것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심같이 저희를 세상에 보내시나이다”(요 17:14-18)

     오늘 대결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결국, 기도밖에 열쇠는 없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껍데기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도를 했던 우리 신앙의 선배를 소개한다. 그는 바로 여호수아이다. 그는 실제적으로 가나안의 세계관에 맞선 사람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신이라고 믿고 섬겼던 태양과 달 앞에서 그는 외쳤다. 태양과 달에 지배를 받던 세상에서 그는 반대로 태양과 달에게 명령했던 것이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수 10:12)

     오늘 하나님은 또 한명의 여호수아를 보시기 원하신다. 이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사단의 세계관에 당당히 맞서 대결할 수 있는 신앙인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 가운데, 내 삶 가운데 나타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열정의 신앙인을 기다리신다. 그 신앙인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부분을 찾도록 하자. 나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내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바로 그것에게 선포하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 그래서, 우리의 전 인생이, 이 세상속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능히 존재할 수 있음을 몸으로 선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