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도피성(여호수아 20장 1-9절)

진실과열정 2005. 10. 14. 17:38

도피성-하나님의 인자한 품(여호수아 20장 1-9절)

1. 서론

     드디어, 땅을 나누는 일이 모두 끝이 났습니다. 14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 이 아래와 같으니라”라고 시작한 일이, 19장 51절에서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서 회막 문 여호와앞에서 제비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라고 완결을 고합니다.  이제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본문은 도피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refuge’라고 나와있으며, ‘피난처’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말 그대로 ‘도피할 수 있는 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열둘로 나누어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장소를 적당한 거리로 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6장소를 정하였습니다: 갈릴리 게데스, 세겜, 헤브론, 베셀,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지도를 참조). 이 도피성이라는 곳은 살인자들이 도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모든 살인자들이 도망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알지못하고(‘부지중’-실수로-) 사람을 죽인 그런 살인자(‘오살한 자’)들이 도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겁니다. 왜 도망을 가야되냐면 살해당한 가족이나 친척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복수를 하려고 살인자를 쫓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살인자는 도피성으로 가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자기의 사고난 일들을 설명합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살인자를 ‘피의 복수자’의 손에서 구원해주는 겁니다. 그렇지만, 살인자의 말이 사실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살인이 일어난 지역에서 재판을 합니다(민 35:25).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인정이 되면, 도피성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고향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영원히 도피성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의 기름부음받은 대제사장이 죽으면, 이 살인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상당히 짧기 때문에, 여러번 읽어보면서 묵상하시면 여러분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참으로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말씀대로 해야되는가? 실수한 것도 과연 너그럽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실수인가? 완전범죄를 꾸민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도피성이 더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도피성이 오늘날에는 형무소와 같은 것인가? 사람들이 과연 옳은 판결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의 사형제도는 하나님의 뜻인가?  우리의 질문은 끝도 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어려운 말씀이 현실에 적용되기 이전에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있어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2. 말씀의 중심

 

1)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한 분입니다(시 118:1).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원불변하시며, 무흠하시고, 무궁하시며, 광대하시고, 부소부재하시며, 달리 말하면 ‘지존무상’하신 분일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렇게 들어왔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존무상(‘지극히 높으심’의 한문표현)’하시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답니다(사 57:15). 과연,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경험해야 겠습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동의할 수 있는 신앙의 수준까지 성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까지 저도 이런 하나님은 머리에서만 인지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한다면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아나, 장성한 사람이 되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 같이 온전히 알 수 있을 것(고전 13:11-12)”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비록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어떤 분은 무서운 재판관처럼 알고 있고, 또 어떤 분은 사랑이 많은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군대의 최고사령관의 이미지였습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이 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직접하셨습니다(1:6; 5:13-15; 10:14,42; 1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다스려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멸하라”라고 하셨습니다(6:21; 23:1). 멸하는 수준입니다. 이 말 뜻은 단순히 ‘destroy’가 아닙니다. ‘철저히 부수다’이며, 완전한 뜻은 ‘사지를 절단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의 사지를 절단해라”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며칠전 모일간지에 실린 사진이 저의 눈을 잡았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된 (발목에 뼈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소녀를 안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만약에 있다해도 ‘잔인한 분’이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전쟁과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나타난 현실이 진정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이 진정한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쟁은 끝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렇기에 우리의 관심이, 비록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있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마 24:7, 44; 25:34-40).

     여호수아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전쟁을 좋아하는 피의 하나님이 절대 아닙니다. 여호수아에서 말씀하고 있는 ‘멸절’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지를 절단하다’라는 말은 번제같은 제사를 상상하게 합니다. ‘멸절’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행위인 것입니다. 바로,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서 가나안의 민족들은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호수아에서 ‘멸절’을 원하셨던 하나님은 바로 ‘선하신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여호수아를 통해서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불의에 가득찬 가나안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멸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어두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과 어두움은 즉시 소멸되고 맙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선하신(진리이신) 하나님’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인자하신(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하신(공의의, 진리의) 하나님’과 ‘인자하신(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삼위일체가 모순되지만 그런 분이 하나님이듯, ‘선하시며(공의로우시며, 진리이시며) 인자하신(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한쪽면만을 보고서 오해합니다. 분명히 출애굽기 21장 23-25절에는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똑같이 갚으라’라는 것이 아니라, ‘이 보다 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후손으로 라멕을 언급하면서, 그의 ‘더한 복수’가 하나님의 성품과 위배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4:23).

     하나님의 인자하심(은혜)은 영원하십니다. 태초에도 하나님의 인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창 3:21). 살인자 가인의 생명을 지켜주시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타났습니다(창 4:15). 불의가 온통 덮은 세상에 물로 심판을 하시면서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인자를 베푸셨습니다(창 6:8).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면서, 동시에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도피성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도피성은 모든 범죄가 무조건 용서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도적이지 않은 살인 사건(예를들면, 나무하러 갔다가 도끼가 자루에 빠져서 이웃이 죽을 경우[신 19:5])만 해당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말해줍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에게 따라오는 것은 나약함입니다. 우리는 실수앞에 언제나 넘어지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회속에서 한번 실수는 치명적입니다. 재기불가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도피성제도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실수하는 사람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런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지도를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참으로 골고루 배치시키신 점입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갈 수 있습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실수를 했을 때 믿고 들어가면, 그는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너무나 딱딱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적지않게 놀랐었습니다. 그런데, 도피성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고는 감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로 실수투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한 품이 바로 도피성이 아닐까요? 세상 그 누구도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을 받아주시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한 품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어디에도 줄 수 없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실수하여 넘어졌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도피성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면서도’ ‘인자하시기’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더욱 빛이 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앙이 집약된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18:1)


(2) 참 도피성-예수 그리스도

     도피성에 대한 말씀은 성경에 골고루 등장합니다(출 21:12-14; 신 4, 19장; 민 35장). 이것은 도피성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성경의 흐름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도피성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인자한 품이 바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삼하 22:2-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중에 우리의 피할 도움이시라♪”  사망의 물결이 우리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우리를 두렵게할 때(22:5) 우리는 우리의 도피성되시는 하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음부의 줄이 우리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우리에게 임할 때(22:6), 우리는 우리의 도피성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셨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는 최고조에 달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저는 본문의 6절의 말씀에 우리의 눈을 모으기 원합니다. 본문에서는 살인자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재판을 받거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롭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대제사장이 죽어야 자유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얻기 위해서 다른 성경구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민수기 35장 24-25절입니다: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살인자는 사고난 곳에서 재판을 받고, 실수가 인정되면 다시 도피성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어야 도피성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민수기 말씀에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여호수아서에는 없는 단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음이 살인자를 자유롭게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히 9:11-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자한 하나님의 품인 도피성으로 들어갈 때에, 바로 거룩한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들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합당치 못한 일을 했던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들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사형에 해당되는 일을 저지른 자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적용되는 것입니다. 단지 믿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에 있던 사람이 대제사장의 죽음을 믿지 못한다면 영원히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직접 보지 않더라도, 믿기만 하면 그는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인자에게 자유를 선포할 수 있는 분이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참자유를 선포할 수 있는 분은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3. 말씀을 마치며

     오늘날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진짜로 도피성을 만들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보다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그때에도 있고, 오늘에도 똑같이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케한다는 선포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도피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도피성을 이웃에게 전하는 삶입니다. 도피성을 알지 못하여 피의 복수자에게 죽음을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본문에 6개의 장소를 자세하게 언급한 이유도 그곳을 알리기 위함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한 품인 도피성을 경험합시다. 먼저 우리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더욱 깊이 경험합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먹은 사마리아 여인이 그 이웃에게 달려갔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에게 달려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