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패배의 교훈(여호수아 7:6-13)

진실과열정 2005. 10. 14. 17:34

본문: 여호수아 7:6-13

제목: 패배의 교훈



1. 서론

     여호수아 6-12장까지의 일곱장에는 정복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여리고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남부지역, 북부지역을 취한 기사가 그것입니다. 참 많은 전쟁과 전투의 기록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결과보다 그 내용에 있습니다. 10장 42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단번에’라는 말에 놀랐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니까, ‘in one stroke’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일격에’, ‘한번 휘두르기’로 그 엄청난 가나안의 왕들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 전투에는 패배라는 말이 없다”

     저는 야구를 매우 좋아합니다. 야구선수중에 투수가 있습니다. 투수란 공을 던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모든 선수들이 중요하지만, 특별히 한 선수가 중요한 운동이 바로 야구입니다. 이 투수를 말하게 될 때, 한 시즌에 20번 이상 승리하는 선수를 특급선수라고 말을 합니다. 20년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에 20번이상 승리한 선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80년대에 주름잡았던 박철순 선수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무려 22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2번 연속 마운드에 올라오기만 하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12장에서 볼 수 있듯이 여호수아는 박철순 선수보다 더욱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31명의 왕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31명의 왕을 여호수아가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31연승을 했다는 말일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는 티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패배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 전쟁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현대적인 개념과 거리가 아주 멀었습니다. 오늘날의 전쟁은 국가대 국가, 이데올로기 대 이데올로기의 전쟁입니다. 그러나,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신이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사기에서 드보라의 노래는 전쟁에서 이겼을때(삿 5) 바로 하나님께서 승리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전쟁의 상황속에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진 사건이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아이성에서 였습니다. 아이성은 매우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들이 정복했던 여리고성(어른성)과는 비교도 안되는 말그대로 ‘아이’성이었습니다(‘아이’라는 원뜻은 ‘파멸’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있게 ‘그들은 소수다!’라고 말했으며, 군사도 3,000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곳에서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졌다는 말입니다.

     내 삶에 터진 문제들-패배는 하나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하나님께서 패배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의 잇슈는 하나님에게 없는 단어인 ‘패배’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패배’에 관한 물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패배가 단순히 ‘졌음’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한 패배는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당시와 모든 시대에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방황이 패배가 아닌 이유가 신명기 8장 2-3절에 나옵니다. 모든 실패처럼 보이는 일들이 하나님의 시험(test)이며, 훈련임을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신앙인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훈련으로서 패배의 교훈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패배를 통해서 승리보다 귀한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요?



2. 본론

1)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합니다(7:6-8).

     왜 사람들은 실패를 경험했을 때,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은 자신의 모든 일이 하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제외한 어느곳으로도 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결국은 아버지의 품으로 가는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산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인은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옛 사람의 성품이 가끔 꿈틀거리기도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은 저를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숙제를 하면서 버그(bug)가 생겨서 돌아가지 않을때가 그랬습니다. 같이 쓰는 자취집 친구와의 인간관계의 문제가 그러했습니다. 이럴 때면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옛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피해버린 범죄한 아담의 모습입니다. 마치 선교여행이 너무나 힘이들어서 중도에 하차한 마가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저는 그때 PC방에서 오락을 하면서 잊어보려고 했습니다. 운동에 매달려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패배감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상실’도 아니요, ‘대리만족’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 만이 저의 하소연을 들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원인 분석’, ‘책임자 처벌’, ‘대안강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원인이 나에게 있든, 남에게 있든, 심지어 하나님에게 있다고 생각하든지, 우리가 넘어졌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여호수아의 목소리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아주 실제적입니다. 그는 솔직합니다. 그는 ‘슬퍼요’라고 합니다. 그는 ‘차라리 그게 낫는데, 이게 다 하나님 때문에 그래요’라고 합니다. 그는 ‘쪽 팔립니다’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 원망할 수 있는자가 바로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나의 솔직함을 보여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성인으로 흠없이 살아가는 초월적인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넘어지고, 다치고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솔직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 26:38ff)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애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원망하시기 바랍니다. 슬프고, 쪽 팔려 죽겠다고 눈물을 흘리시기 바랍니다.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마 5:4).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2) 패배는 나의 삶이 수정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10-13).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나, 차원이 다른 위로입니다. 삶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위로입니다. 마치, 우리가 병원에 왔을 때에 의사 선생님에게 ‘얼마나 힘들었느냐?’라는 위로와 함께 치료를 받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위로는,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요소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는 위로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면 참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이 버그를 잡게 되면 뻥뚤린 기분이랍니다. 우리는 패배를 경험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진단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두가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패배주의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둘째는 책임회피자입니다. ‘바로 너 때문에 그런거야’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큰 표준이 됩니다. 그들은 범죄했습니다(11절). 그들이 범죄한 것은 ‘언약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그들이 어긴 언약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신명기 13장 16-17절의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행한 전쟁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은 소득을 위한 전쟁입니다. A에게 없는 것이 B에게 있다면 A는 B에게 전쟁을 일으킵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 배후에 에너지 시장이라는 소득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많은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소득’을 바라보고 하는 모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전쟁은 ‘소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가나안이란 곳은 우상을 음란히 섬기는 가증한 문화의 온상지였습니다. 그곳에는 인륜도, 도덕도 없었습니다. 자녀를 불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공의를 베푸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멸’이라는 방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진멸의 도구가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대리인인 것입니다. 이 진멸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나타나야 했습니다(16절).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이 임하는 전쟁에서는 백전백승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하고 마는 것이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보장되지 않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패배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 언약을 어겼음을 지적해 주십니다. 그것은 여리고 전쟁시에 백성모두가 진멸하고 있었을 때에, ‘아간’(이름의 뜻이 ‘문제를 일으키다[to trouble]’입니다)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아간은 많은 것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외투 한 벌과 금덩이 하나가 전부였습니다(21절). 그야말로 새발의 피였습니다. 그러나, 이 한방울이 하나님이 보시는 언약 위반이었던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언약이 위반되어질 때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거룩한 도구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패배는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삶으로 살아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약속하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런 약속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을 때, 패배는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문제를 깨닫고 조취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중요한 행동을 합니다. 아이성을 정복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발산에 모입니다(8:30 이후).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한번 하나님과 약속을 합니다. 실패후에,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패배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교정해야 합니다. 그 핵심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약속이 이행되는 신실함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약속이 이행되는 성실함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약속이 이행되는 부단한 노력을 보여드러야 합니다. 당신에게 깨어진 약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기도생활이 있습니까? 말씀생활이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예배가 있습니까? 전도가 있습니까?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다시 약속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수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약속을 받아주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의 약속을 받아주신 것처럼 당신의 새끼손가락을 고리 걸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3. 결론

     여호수아에는 4개의 주요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 중 두 번째 키워드가 바로 ‘취하라’입니다. 이는 전쟁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수없이 많은 전쟁기사를 뒤로하고, 여호수아의 핵심은 두가지 전쟁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여리고 전쟁이고, 두 번째는 아이성 전쟁입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이 앞장설때 이길 수 있다는 참된 전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이성은 깨어진 관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참으로 다양하고, 삶의 환경이 다른 곳에서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와 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된 전쟁’을 수행하는 청년부,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싸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