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여호수아 22장 1-9절
제목: 어제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자!
1. 서론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처음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처음될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을 갓 믿은 성도님이 간증을 하면서,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대속을 말하며 눈물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을 볼때면, 저도 모르게 “이게 바로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처음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대속을 들어도 가슴이 덤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기도를 하곤 합니다: “십자가만 내 심장을 뛸 수 있게 하옵소서!” 다른 것 때문에,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즉, 돈을 생각하면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내 님을 생각하면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 생각하면 내 심장이 뛸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래서, 저의 기도제목은 이렇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더 나은 신앙인으로 도전받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 본론
1) 여호수아의 최종적 완결은 인간의 반응이다.
참으로 여호수아서의 말씀은 길고도 긴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긴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그래도 감동이 되고, 새 힘을 얻으며, 나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 단순히 소설이 아니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라는 위대한 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고, 본문과 씨름하면서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3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첫 째는 “여호수아의 최종적 완결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수아의 최종적인 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여호수아의 머리말로 가보도록 합시다. 여호수아 1장 3-4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자! 우리는 여호수아의 머리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읽어보았습니다. 이 머리말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내가 다~ 너희에게 주리라!”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의 모든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을 2장부터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네, 우리가 전에 읽어보았듯이 하나님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여호수아서는 어떤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할까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21장 45절의 말씀이 여호수아의 결말이 아닐까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1장에서 약속하시고, 21장에서 다 이루어졌고” 만약에 교회에 처음온 사람에게 여호수아서를 1장부터 21장까지만 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도 “와! 딱 맞네!”라고 할 것입니다.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성실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하셨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만약에 여기에 무엇인가를 더한다면, 미스코리아의 얼굴에 구렛나루를 더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호수아 22장의 말씀이 엄연히 숨쉬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지만’, ‘더 이상 무엇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반응입니다. 여호수아의 최종적인 완결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때에’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던 그 때에, 이제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수아의 최종적인 완결인, 반응하는 신앙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2) 인간의 반응은 섬김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두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보여야할 반응하는 신앙의 핵심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섬김입니다. 인간의 반응은 섬김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2-3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일에 내 말을 너희가 청종하여,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우리는 이 짧은 말씀에서 다양한 표현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4개의 동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키며, 청종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지키도다. (그런데, 원어로는 세단어입니다) 실로 엄청난 단어들입니다. 우리가 읽은 단어들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키워드들입니다. 예를들어 본다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었던 신명기 6장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것을 원어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이여!)” 여기서, 쉐마가 바로 ‘청종하여’라는 말씀입니다. 한단어, 한단어만을 묵상하려해도 우리의 전생애를 바쳐야 할, 그런 놀라운 단어들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단어들을 자세히 설명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신앙의 키워드들로 사용되어진 이 단어들을, 그들의 삶속에서 이미 나타내고 있었다는 여호수아의 평가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들의 신앙이 기형적인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첫단어인 ‘지키며’는 아주 먼 과거이며, 그 대상은 모세입니다. 두 번째 단어인 ‘청종하여’는 가까운 과거이며, 그 대상은 여호수아입니다. 세 번째 단어인 ‘떠나지 아니하고’는 현재의 일이며, 그 대상은 공동체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어인 ‘지키며’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통틀은 개념으로, 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건강한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어떠한 지도자를 만나도 섬기는 사람, 그가 속한 공동체를 받들고 섬기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호수아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상태를 말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good!”입니다. 그런데, 이제 미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더욱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를 말해주고 있는 5절이라는 아주 짧은 말씀에 들어있는 6개의 단어들 때문입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그 6개의 단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행하여, 사랑하고, 행하며, 지켜, 친근히하고, 섬길지니라”입니다. 그들은 이미 좋은 신앙인입니다. 그들은 잘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더 좋은 신앙인이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때 Good으로 만족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꾸준히 Better로 성장하는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단어들이 원어로는 서로 틀리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여호수아는 그들이 보여주었던 신앙보다 두배나 더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그 두배나 요구된 신앙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하나님에게 친근히 하고, 하나님을 섬길지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원맨쇼’로 끝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배나 더한 섬김’이라는 인간의 반응이 있어야 진정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고해서 여러분이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경험”과 “인간의 섬김이라는 반응”이 조화됨으로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섬김이라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물론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섬김의 반응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를 소극적 섬김의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성한 생명력있는 적극적 섬김의 반응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적극적인 섬김의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사랑하신다!”라는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저녁 9시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배나 더한 섬김이 아닐까요?
3)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입니다: “섬김에 대한 결과는 무엇일까?”입니다. 섬김에 대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섬김에 대한 결과를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섬김에 대한 결과가 복이지, 복을 받기위한 섬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복신앙을 거부합니다. 기복신앙이란, 복을 받기위한 신앙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도 않으면서, 교회에 와서 “주시옵소서! 이것도 주시옵소서! 저것도 주시옵소서!”만 외치는 신앙태도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복과는 상관없는 분이냐”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살아계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우리가 잘 섬기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데, 하물며 온 천지를 창조하신 영적인 아버지 하나님을 잘 섬긴다면 우리에게 내려주실 하늘의 복이 얼마나 풍성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헛된 희망을 던져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를 전하려고 할 뿐입니다(7b-8):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일러 가로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금,동,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서’…”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의 복이 어떤 수준이라는 것인지,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성경은 ‘많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부족해서 ‘심히 많다’고 표현합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심히 많습니다!’ 이것이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의 정체입니다.
3.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왜 여호수아가 21장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참신앙의 비밀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참신앙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경험한 우리가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응은 섬김의 반응입니다. 이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복은 실로 엄청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참맛입니다. 여호수아가 22장으로 계속된 이유는 바로 이 신앙의 참맛을 경험하고 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인 것입니다.
저는 이제 2년의 대학원 과정에서 1개월을 마쳤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면서, 꾸준하고 성실히 하나님을 섬기리라는 결단을 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속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결단을 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도 왕년에 잘나가던 신앙인이었어!”라고 옛추억만을 되씹지만 말고, 이제 다시 한번 “어제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자!”는 고백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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