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가 보여주는 요한과 예수
(Edwin D. Freed, The Stories of Jesus' Birth: A Critical Introduction [Sheffield, 2001], 122-135)
- 요한에 대해서 사가랴의 아들이라고 하며, 대부분의 경우엔 그냥 요한만을 말한다(3:15,20; 7:28; 9:7; 행 10:37; 11:16; 13:24). 침례를 붙이지 않는다(막 1:4; 6:14,24; 마 3:1; 11:11; 14:2,8; 그러나 눅 7:20,33; 9:19).
1. 소년의 부모들
- 강한 기독론적 동기: 요한보다 우월한 예수: 어머니들의 경우(1:41-44), 부모들의 경우에도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했다.
-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요한의 부모들의 의로움을 강조한다(1:6).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서는 의로움을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무마하려는 의도였는가?
2. 성장
- 요한에 비해서 예수의 성장은 두드러진다(1:15,76->1:32,35; 1:68->2:11; 1:16,77->2:29-32; 1:80->2;22-26; 1:80->2:40). 2:40,52의 지혜로운 성장은 솔로몬의 시편(17:37)의 반영이다. 요한이 유대인들 사이에 강조된다면(자신의 백성), 예수는 이방인들과 모든 백성들로 확장된다.
- 요한이 광야에 있는 것에 비해,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널리 알려진다.
3.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요한과 예수
- 요한은 첫 시대의 완성이다(1:68,72-73). 예수는 두 번째 시대의 시작이자 완전한 완성이다(1:54-55; 2:30-32).
①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 누가의 구원(2:30)은 빛(2:32)과 동일시된다. 이는 이사야의 반영(사 49:6)으로, 이사야는 유대인의 우선성이 제시된다. 한편, 이스라엘이 먼저이지 않겠는가?(롬 1:16, Fitzmyer, Horsley) 혹은 중립인가?(Brown) 그러나 누가는 표현에 있어서 분명히, 이방인-이스라엘 순이다(행 4:27; 9:15; 13:46; 14:5; 15:14-19).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행 26:23), 유대교에 전문인 아그립바와의 논쟁에서 어쩔 수 없었다.
- 초기의 누가전승은 예수를 ‘지극히 높은 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4:42-43). ‘유앙겔리조’는 누가가 선호한 단어로, 이는 하나님의 계획의 두 번째 단계인 예수를 대표한다(16:16).
4. 공관복음에서의 요한과 예수
① 엘리야의 역할
- 말라기는 두 번 종말론적 인물을 언급한다(3:1; 3:23). 막 1:2-3은 말 3:1과 사 40:3의 혼합이며, 마태와 누가는 단지 사 40:3만을 선택한다. 누가는 ‘구원’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 같다. 눅 7:27(//말 3:1)은 침례자와 엘리야가 비교되고, 눅 4:25-30; 9:54는 예수가 엘리야와 비교된다. 명백히 엘리야를 침례 요한과 비교했던 막 9:9-13(마 17:9-13)을 누가가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는 예수에게도 엘리야를 넣고 싶은 것일까? 이에 대해서 Brown은 초기엔 예수가 엘리야의 종말론적인 예언자의 모습을 보였지만,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면서, 엘리야의 모습이 침례 요한에게 넘어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② 누가 복음에서 침례 요한
- 누가는 침례 요한에게 호의적이다(3:15; 7:28[29-30!]; 11:1; 행 13:24).
- 예수에게 침례를 주다: 마가는 예수의 침례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이 없고, 마태는 마가를 따르지만 회개의 침례라는 성격의 문제(막 1:6; 마 3:6)를 침례 요한의 어쩔 수 없는 침례로 무마한다(마 3:13-15). 메시야가 무죄의 사람이라는 측면에서(솔로몬의 시편 17:41), 누가는 반대로 침례 요한의 옥살이를 먼저 기록하면서 무마한다(3:19-20; 막 6;17-18; 마 14:3-4). 누가의 특성상(5:16; 6:12; 9:18; 11:1-4; 23:46), 기도가 빠지지 않는다(3:21): 침례는 요한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기도의 결과로 성령이 온 것이다. 이것은 행 19:1-7에서 요한의 침례를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는 성령을 받게 하는 침례가 참된 침례라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것인가?(3:16)
- 예언자로서의 침례 요한: 요한이 예언자라면(1:76; 7:16; 13:33; 24:19) 예수는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이다(1:32). 모두가 인정했다고는 하지만(20:6), 마가와 마태에 있는 ‘참으로’를 생략하고 있다(막 11:32; 마 21:26).
5. 정리
- 누가의 기록은 무엇보다도 기독론적이다. 침례 요한은 예언자 중에 한사람으로, 메시야의 도래를 앞서서,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 이는 여전히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로 남아 있어서 예수의 메시야 됨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방편이다(3:15; 4:41).
참고: 요한복음에서의 요한과 예수
- 요한복음에 따르면 침례 요한은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는 예수를 알지 못했다(1:25-34). 그러나 저자는 기독론적 고백을 요한의 입에 자유롭게 집어넣었다(1:29.34). 아무래도 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쟁관계에 있었을 것이며(1:35-42), 눅 3:15는 그런 분위기를 보여준다. 한편 요한복음에 비해서(1:20; 3:28) 누가복음은 요한 스스로가 메시야를 부인하지 않고 기록자의 손[바울]을 통해서 고백되어지고 있다(3:16; 행 13:23-25).
- 요한복음이 기록될 시기엔 메시야직에 대한 해답이 나왔을 것이다. 요한이 공관복음서의 ‘신들메’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침례 요한의 겸손과 동시에 추종자들과의 논쟁을 위해서였다(요 1:41; 4:1; 3:30).
- 행 18:24-19:7은 요한의 추종자들과의 문제점을 말해준다. 한편, 침례 요한의 존재는 요세푸스도 증명하는데(고대사 18.5.2), 여기에서 요한의 죽음은 폭동 위협에 대한 결과로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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