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예수닮기 프로젝트(14): 새 씨앗은 새 마음에

진실과열정 2007. 9. 19. 09:59
 

예수닮기 프로젝트(14) - 새 씨앗은 새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막 4:26)


두 번째 산을 오르다.


        마가산맥의 두 번째 산(3:7-6:6a)은 역시 예수님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남쪽)와 요단 강 건너편(동쪽), 심지어 두로와 시돈 근처까지(북서쪽) 사방팔방에서 허다한 무리가 몰려왔다고 말합니다(3:8). 당시에 두로는 경제적으로 예루살렘보다 더 발전했고, 인구도 더 많았습니다(참고 7:27). 예수님이 활동하신 ‘갈릴리’는 시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서울과 수도권에서부터 허다한 무리가 머나 먼 시골에 모여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사방팔방에서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왔을까요?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하신 큰일을 들었기 때문이다(8절). 그렇습니다.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저 갈릴리 시골 마을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가 ‘큰일’을 하더라” 라는 소문이 났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큰일’이 아니라 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그런 예수님의 모습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뉴스메이커였습니다. 그것도 그냥 뉴스메이커가 아니라, 굳뉴스(Good News)메이커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을 선포했다는 말입니다(1:14).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던 이유는 예수님이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소문은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였던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소문이 퍼져야 합니다; 내가 소문을 내야합니다; 내가 복음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움직입시다.)

        이렇게 마가산맥의 두 번째 산은 시작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말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아들임에 분명합니다(3:11). 그러나 두 번째 산의 끝은, 첫 번째 산의 끝에서와 같이(3:6),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6:3,6). 이것은 우리를 좌절시키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대로 마가복음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할래?’ 예수님이 우리에게 신앙을 도전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마가가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마가산맥을 오르면서 수 없이 많은 ‘거부/배척/불신앙’을 볼 것입니다. 그 때마다 반대로 예수님의 도전을 기억합시다. 그 때마다 예수님의 끈질긴 사랑의 가르침을 되새김질 합시다.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새 마음, 좋은 땅


        두 번째 산은 3, 4, 5, 6장으로 되어있습니다. 한절 한절을 꼼꼼히 읽고 살펴봐야 하겠지만, 우리는 4장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4장에서 예수님은 긴 말씀(비유)을 통해서 앞뒤의 사건을 종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장의 이 말씀을 비유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하는데, 모든 분들이 다 수긍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말을 ‘나그네 길’이라는 익숙한 말로 바꾸었더니, 이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말을 충분히 설명할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그네 길’이라는 우리 사람들의 익숙한 말로 쉽게 풀어주었던 것입니다(참고 창 47:9). 이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는 4장에서 두 가지 비유를 듣게 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것으로,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3-8절): 씨가 길가에 뿌려지고 돌밭에 뿌려지고 가시떨기에 뿌려지고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말씀의 뜻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단이 즉시 빼앗아 버리는 길가가 되지 말라는 경고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환난이나 핍박을 견디지 못할 돌밭도 되지 말라는 격려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염려와 유혹을 이기지 못할 가시떨기가 되지 말라는 다짐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이 백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되라는 도전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도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마 여러분은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를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관심이 많은 분은 절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3장에서 나옵니다. 3장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고(7-12절),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후에(13-19절), 예수님에 대한 모독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20-35절).

        우리는 3장에서 길가 마음을 발견하고, 돌밭 마음을 발견하며, 가시떨기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가짜 신앙인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들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장 21절을 이해하려면 모세오경의 율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 순종치 아니하고 ... 듣지 아니하거든 ...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신 21:18-21)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마치 사단이 빼앗아 가버린 것처럼, 그 말씀을 미친 사람의 것(사단)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이(이들 역시 율법주의적인 종교인입니다) 진상조사위원으로 내려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에게 사로 잡혀서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비난합니다(22절). 이 말씀 역시 모세오경의 율법을 알고 있다면, 서기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게 됩니다: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신 13:13-16)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은 지금 예수님이 ‘바알세불 신’을 섬기는 유혹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마을이 예수님을 계속 두둔하게 된다면, 모세오경에 규정된 대로 갈릴리는 저주의 마을이 될 것이라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은 정말로 사람의 의지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2000년 동안 복음을 선포해왔습니다. 그 중에는 엄청난 회개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고, 믿지 못했으며,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신을 믿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신을 믿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머리와 과학기술과 도덕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을 믿지만 다른 신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호메트를 숭배하고 부처를 따르며 돈을 섬기고 권력의 종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감사합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의 연장선에서 생각하고 싶습니다(2:22). 그래서 좋은 땅을 ‘새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유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과연 무엇이 ‘새 마음’일까요? 저는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기록한 빌립보서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었습니다(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습니다. 이 ‘새 마음’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이식수술을 받아야 되는 그런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에게 이식수술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모든 것을 내어버린 마음입니다(6절).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마음입니다(8절).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마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죽은 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거역했던 마음이 바로 아담과 하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땅’입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며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 제 마음에 들어오세요. 저를 다스려 주세요. 저에게 새 마음, 좋은 땅을 만들어 주세요.”


새 씨앗, 말씀의 능력


        이제 두 번째 비유로 넘어가 봅시다. 두 번째 비유도 ‘씨 뿌리는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 두 번째 비유는 많은 분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비유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비유도 분명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그 말씀을 친히 행동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간단히 말해서, 씨앗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말씀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등불을 숨길 수 없듯이(21절), 씨앗도 그 생명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라고 커져 거대한 나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27, 32절).

        정말로 그럴까요? 아주 작은 씨앗에 능력이 있을까요? 바람에 날라 갈 정도로 가볍기만 한 씨앗에 무슨 능력이 있을까요? 우리는 의심스럽습니다. 아마도 제자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물론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씨앗이 나무가 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능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한마디에 태풍이 사라지고, 귀신이 쫓겨나며, 불치병이 고쳐지고,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말씀 한마디에!

        예수님은 아직 완전치 못한 믿음을 가진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십니다. ‘새 씨앗’ 즉 말씀의 능력을 직접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4장 39절에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에 큰 광풍을 잠잠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새 씨앗’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마음이 빼앗긴 거라사 광인을 말씀 한 마디로 자유케 하십니다(5:8):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리고 자유롭게 된 그에게 ‘새 마음’ 즉 좋은 땅을 주십니다. 새 마음을 품게 된 그가 데가볼리(열개의 도시)라는 대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며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마가는 증언합니다(20절).

        ‘새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을 전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초자연적인 현상의 경험도 필요하기도 합니다(광풍사건). 그렇지만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간다는 ‘삶의 변화’에 있습니다(거라사 광인의 변화). 이렇게 예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삶의 태도의 변화에 더욱 무게를 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치병으로 12년 동안을 고생하며 가산을 탕진한 한 여자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5:25-34). 그 병은 혈루증으로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의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이란 병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을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레 15:25-30):


여인의 피의 유출이 ... 여러 날이 간다든지 ... 하면 ... 이런 것을 만지는 자는 무릇 부정한즉 ...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이 여인에게 있어서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은 부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8절에서 엄청난 도전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 어찌 운명의 장난입니까?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는 사람이, 손을 대면 낫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심리학적으로 스킨십을 연구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바로 이것이 여인에게 요구되는 믿음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율법보다 율법 자체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새 마음’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모세오경의 율법에는 위배될지 모르지만,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 마음’을 품게 되었기 때문에,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졌고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새 마음에 뿌려진 새 씨앗’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 마음에 뿌려져야 할 새 씨앗’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새 씨앗’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됩니다. 바로 죽은 자가 말씀 한 마디에 살아나는 능력입니다(5:35-43). 예수님은 주변의 비웃음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새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달리다 쿰’ 즉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는 아주 재미있게 그 상황을 표현합니다(42절):


소녀가 일어나서 걸으니 ...


마치 100미터 달리기 하는 사람이 심판의 출발소리를 기다렸듯이, 예수님이 ‘달리다쿰’하자마자 즉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새 마음에 뿌려진 새 씨앗’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 마음에 뿌려져야 할 새 씨앗’인 것입니다.


무엇을 위함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중심으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좋은 땅이 되자”입니다. 저는 이것을 “새 마음을 품자”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자”입니다. 저는 이것을 “새 씨앗을 품자”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때로는 율법에 위배가 될지라도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삶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마가산맥의 두 번째 산의 기록 목적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말씀의 기록은 오묘하고 계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산의 끝이 여전히 불신으로 끝났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메시지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공동체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종교제도(예루살렘의 서기관)도 실패했고, 심지어 기존의 가족공동체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3:33,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예수님은 ‘새 씨앗을 품을 수 있는 새 마음’을 가진 새로운 공동체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년 동안 혈루병을 가진 여인을 고친 것이고(5:25), 12살짜리 소녀를 살려주신 것입니다(5:42). 12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즉 이 말씀은 불치병에 걸려서 완전히 죽어버린 영적 이스라엘을 다시 새롭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공동체로 새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였던 것입니다(참조 사 6:13).

        그들이 바로 각 산의 처음부분에 등장하는 제자들입니다. 이들 제자들이 ‘새 씨앗을 품을 수 있는 새 마음’을 가진 새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직접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도전을 받게 됩니다. 내가 바로 이들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말입니다. 비록 우리들은 연약해서 두려워할지도 모릅니다(4:41). 예수님의 오묘하신 뜻을 깨닫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5:31).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에 나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5:40).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