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2007)]

진실과열정 2007. 12. 28. 15:12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김기철 역 (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

 

크로산의 예수: 뿌리가 뽑히는 혼동인가? 존재가 규정되는 새로운 뿌리 박음인가?

 

왜 예수에 관한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까? 특별히 구약에 전공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핏 생각하면 상관없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예수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연구되어지고 있는 분야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그 연구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연구 방법에 있어서, 소위 '역사적인 성서 본문 연구'라는 방법론에 있어서도 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특별히 지금 소개하는 책이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모두 만족할만큼 큰 빛을 비춰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크로산(실상 외국에서는 크로상이라고 부른다지만)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리고 정말로 이 책을 읽고서 느끼는 바지만) 다수의 갈채를 받지 못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탁월한 권위자'이다. 정말 그러하다. 권위자이기 때문에, 권위자로서의 주장을 과감하게 던져준다. (사실, 어설픈 소설을 고귀한 발견이나 된 양 내놓는 책들이나, 귀에 박힌 설교조로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들을 여기저기서 가지고 온 것들과는 분명 수준이 다르다.) 이 주장은 어떤 이들에게는 뿌리가 뽑히는 혼동으로, 또 어떤 이들은 존재가 규정되는 새로운 뿌리로 박히기도 한다. 1991년에 나온 [역사적 예수(500페이지가 넘는다!)]의 기본 뼈대를 200페이지로 압축한 것 같다. 하지만, 간결이 미덕이라고! 이 책은 몇 번이고 읽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1세기 사회상을 기초로, 예수가 사회 존재 기반의 의식 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어떻게 활동했으며, 그러한 활동이 주변의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예수의 그러한 도전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독교가 어떻게 조직화되었는지를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소유와 무소유로 계층화된 사회에서 명예-수치, 후견인-의뢰인 관계로 단축할 수 있는 당시의 가치관이 예수의 공동식사(p.132)와 치유(p.156)로 인해 깨어지고, 핵심적으로는 예수 자신이 그 어떠한 브로커가 되지 않으려는 일종의 무소유적 랍비('유대적 농민 견유학파')로 돌아다녔다는 것이다(p.188,196). 이것은 예수 이전에 종말론적 해석 운동의 일환이었던 침례 요한의 요단강 운동의 실패 이후에(p.88), 예수가 새롭게 개발한 전략이었던 점에서 예수는 탁월한 인물이었음에 분명하다(p.309). 그러므로 1세기 주변의 환경은 21세기의 휴머니즘이라는 여과의 틀을 제거한채 무참히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시켰으며(p.227), 아마도 십자가 밑의 개들만이 주검의 흔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p.207). '역사화된 예언(p.234ff)'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예수의 죽음 설명 이후(두 마리의 염소의 수난과 재림 모티프!), 그의 출생과 부활은 신화와 신앙으로 묘사되었는데, 바로 예수는 두 신 이야기의 한 쪽을 차지하게 되었고(p.49,65), 초기 기독교 '권위'의 기원으로서의(p.271,290) 부활 이야기가 창작되어져서 조직화된 신앙 체계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p.305).

 

저자는 교차인류학과 역사적 자료, 그리고 성서 본문의 세가지 선을 통해서 하나의 접점을 찾으려했다. 하지만 이 세가지가 공통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때(거의 모든 경우에 이 들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저자는 교차인류학을 의식의 전환점으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목소리는, 저자의 집요한 연구에 의해서, '왜곡되고, 꾸며진' 것이기 때문이다(저자의 말대로라면, 발전과 창작). 그런 면에서 공평치 못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저자가 진행하는 과정에서만큼은 일종의 비약이 없으며(없는 것은 없겠지만), 솔직하고 담담하며 정직하다는 점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저자의 말이 맞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 것도 같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운동이 꿈꾸었던 '순수한 평등주의'가 21세기의 투영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에서만큼은 말이다. 
 

결국, 저자의 주장 대로(이 것만큼은 논증이 뒤따르지 않는 주장인 것 같은데), "예수의 제자들 중에 ... 전적으로 본문과 책, 학식과 주해, 독서, 해석, 그리고 주석의 영역을" (저자가 그토록 놀랍게 역추적할 정도로 '이데올로기'와 '문학창작'에 정통할 정도로) 사용할 수 있을 사람이 "있었으며, 그들이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매우 초창기에 활동했으리라고(p.234)" 조심스럽게 제시하는 것이, 이 아슬아슬한 도미노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정말 그렇게 놀라운 엘리트들이 '유대인 농민 견유학파'인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러했다면, 그러한 부르심에 대하여 복음서는 침묵하고, 오히려 어부들만이 (베드로의 우월성이라고 해명할 수 있겠지만)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러한 부르심에 대한 문제까지도 '미리 예측하고' 계획적이며 의도적으로 기록했던 제자들이 예수를 따랐다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 제자들이 예수보다 더욱 놀라운 존재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그들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저자는 예수 이후의 상상력의 세계를, (저자는 어느 정도 강조는 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본래의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이, 그러므로, 시급하고 기독교의 자리 찾기에 대한 바른 해답이라고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기독교는 예수가 만들어논 밥에 재를 뿌렸으며, 기독교는 '그 밥'을 (그 밥의 재료, 형성과정, 그리고 본래의 의도)아무것도 모르는 손님들에게 비싼 돈을 받으면서 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의 말대로라면(p.318), 우리가 해야할 일은 기독교가 만들어놓은 '완벽해보이는 변증법 결과물들--그것이 교리이건 성서해석이건,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이건, 경제적-정치적으로 권력자들의 신적정당성이건--'에 대한 재고에서 시작해야할 것이다.

 

 

2007년 12월 28일 마지막 금요일에

진실과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