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12:5
제목: 사명자여! 일어나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한글개역)
만약 (다른 사람도 아닌) 일반 보행자와 달리기를 해서 지친다면,
네가 어찌 전투마와 다툴 수 있겠느냐?
만약 아무런 문제없는 땅에서도 네가 흔들린다면,
요단강이 요동칠 때는 어떻게 네가 (내가 맡긴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
(개인사역)
말씀에 들어가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또 반대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오늘 새벽예배에 참석하시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차를 타고 오셨을 겁니다. 누구나 차를 탈 수는 있지만, 아무나 차를 몰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또 예를 들어본다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만, 아무나 구원받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임을 깨달은 분들이라면 모두가 수긍하실 겁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 주변에서 참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저는 오늘 본문 말씀과 연관해서 한가지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구나 주의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주의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실 아무나 주의 일을 할 순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러한 영적인 비밀을 무수히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나 ‘애굽땅에서 노예가 된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고 구원해야 겠다’는 큰 계획을 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나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성취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애굽은 오늘날 미국보다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에 여러 나라들의 전쟁포로를 포함해서 노예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탈출에 성공했던 소규모의 무리들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껏해야 자기 몸뚱아리 하나 달랑 구했을 뿐, 더 이상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모세만이 성서가 말하듯이 장정만 60만이나 되는 거대한 민족을 당당히 이끌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가지만 더 예를 들어 봅시다: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위대한 왕국을 세우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사울이라는 준수한 인물이 자신들을 억압하던 주변의 족속들을 물리치면서 힘을 길러나갔었죠. 그러나 그는 엄격하게 말해서 왕은 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이라면 행정적인 조직을 만들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사울은 국가의 기본이 되는 그 어떠한 조직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울을 단지 추장이었을 뿐이라고 평가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시는 바와 같이 국가는 다윗이 세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누구나 주의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많은 예들을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구약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 모세와 다윗, 이 두사람만 예를 들어도 충분할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에 또 한사람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성서에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있습니다(요즘말로 로또번호 딱딱 맞추는 그런 예언의 의미가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예언자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꼭 들어야 하는 사람/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가 하는 핵심적인 사명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했던 이유가 바로 그는 예언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왕상 17:1). 이사야가 남유다의 왕인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했던 이유가 바로 그는 예언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사 37:30-32). 그러한 예언자 중에 바로 예레미야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에게 예언자였고, 이사야는 남유다에서 예언자였다면(national), 예레미야는 ‘열방의 예언자(inter-national)’였다고 성서는 말합니다(1:5): “내가 ... 너를 열방의 예언자로 세웠노라”
그렇다고 예레미야가 더 위대하고, 엘리야와 이사야가 덜 위대하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여부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달란트 비유와 같습니다(마 25:14-30). 달란트가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맡겨 주신 그 일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열방’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사실 거기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시대는 세계의 열강이 충돌하는 시대로, 지구 역사를 바꾼 손꼽히는 순간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이 시간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나 역사상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겠지만, 아무나 하나님의 일을 할 순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 앞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것인가?’라는 쓰임받은 사람들의 자격이나 조건을 설교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자체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미 쓰임받은 사람에게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시간 여러분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은 사람은 과연 어떠한 것을 극복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막연한 어려움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이해하기 쉽도록 평이하게 ‘교회일’이라고 해봅시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교회일’하면서 과연 어떠한 것을 극복해야 할까요? 게으름? 돈문제? 건강? 성경적인 지식을 많이 모르는 것? 직분이 없는 문제?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저는 딱 한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앞선 모세와 다윗, 그리고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예레미야에게 모두 동일하게 해당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그것도 멀지않은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짧지만 그 배경을 설명하자면 1시간도 모자랄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레미야가 진짜로 경주마와 달리기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성서 어디를 찾아봐도 예레미야는 경주마와 누가 빠른가 내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사람이 있다면 바로 엘리야가 되겠지요[왕상 18:44-46].) 본문 말씀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시대적인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는, 그래서 역시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런 멋진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예레미야는 ‘열방’의 예언자였기 때문에, 그만큼 고충이 심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예레미야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가까운 곳만 읽어봅시다(11:19, 21):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아나돗 사람)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우리가 읽은 것처럼 예레미야는 정치적으로 어떠한 힘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예언자들은 많은 제자들을 이끌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혈혈단신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오죽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바룩이라는 서기관을 붙여주시기도 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을 ‘끌려서 잡히러 가는 어린 양’이라고 표현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겸손에서 나오는 시적인 표현이 절대 아닙니다. 절망의 끝에 달린 자포자기의 넋두리입니다. 21절은 더 합니다. 예레미야 자신은 예언자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아서 예언해야 하는 것이 사명이건만, 사람들이 그것을 억지로 막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서 나온 ‘그들’은 다름 아닌 고향사람입니다(렘 1:1). 고향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왕궁의 모든 사람들이 귀를 막고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받았을 외로움과 스트레스는 사이에 들어있는 짧은 한 말씀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20절): “...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주의 보수’라니요? 개역개정 성서는 ‘주의 보복’이라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내용을 더 이해하기 쉽도록 고쳤습니다. ‘보복’이 더 가까운 의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님의 일을 하는데 정말 힘들어 죽겠습니다. 다름아닌 주변의 사람들이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미워 죽겠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내려주십시오! 내가 두눈을 뜨고 보겠나이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이 기도가 우리의 것은 아닐까요? 혹시 이 기도가 누구누구 집사를 향한 나의 기도가 아닐까요? 혹시 이 기도가 누구누구 성도를 향한 나의 기도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쉬운 질문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과연 복수해 주셨을까요? 안해 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복수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은 주어집니다. 22-23절을 보면 마치 복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3절 끝부분에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라는 말씀은, 이것이 예레미야를 위한 복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임을 잘 보여줍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보채십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저는 히브리어로 된 원어성서를 읽고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번역해보았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도 아닌) 일반 사람과 달리기를 해서 지친다면,
네가 과연 전투마와 다툴 수 있겠느냐?
만약 잔잔한 땅에서도 네가 흔들린다면,
요단강이 넘칠 때엔 과연 네가 (내가 맡긴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비교의 대상을 잡아주셨습니다. 개역성서에 ‘보행자’라는 말은 말 그대로 두발 다린 일반 사람을 의미합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지도 않은 보통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보통 사람과 달리기를 해서도 숨을 헐떡거리고 힘들어한다면, 어떻게 전투마와 다툴 수 있겠습니까? 개역성서에 ‘말’이라고 되어있지만, 원어에 보면 ‘말들’로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가 수많은 말들과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차를 이끄는 ‘말들’과 다툰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전차를 이끄는 말들은 보통 준비된 말이 아닙니다. 명마중에서도 명마가 바로 전차를 이끕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과 전차를 이끄는 말들 말입니다.
그리고 5절 하반절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라는 부분은 원어성서를 연구하게 되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그대로 읽으면 5절 상반절과 의미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서는 격동의 시기에 기록된 것이니 만큼, 원문의 보존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크게 두 개의 서로 다른 본문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보다 오래된 본문에 따르면, ‘네가 평안한 땅에서 조차 무사하지 못한다면’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성서는 이러한 번역을 선택하고 있습니다(NRSV, JPS). 그래서 본문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평안하다’는 말은 많이 알고 있는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평안한 상태, 즉 미동도 없는 잔잔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흔들림이 없는 잔잔한 땅에서 조차 네가 흔들린다면”이라는 말이 됩니다. 사실 상식적으로 땅이 흔들리는 거 보셨습니까? 땅이 잔잔하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잔잔한 샬롬의 땅에서조차 흔들린다면, “정작 요단강이 넘칠 때에는 어쩌려고 그러느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전차를 끄는 전투마’라는 말이나, ‘요단의 창일한 중’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데에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습니다(23:21). 이것은 열방의 나라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예레미야가 ‘열방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로(보행자, 평안한 땅) 인해 피곤해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야! 너는 보행자와 달려도 피곤하면 안되는 사람이고, 평안한 땅위에서 흔들려서는 안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사명을 가르치십니다. “너는 전투마와 다툴 준비를 해야하는 사람이며, 너는 요단강이 넘치는 날을 준비해야 될 사람이다. 왜냐하면 너는 ‘열방의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변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자의 삶’입니다.
사명자는 자신에게 주신 임무외에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물론 신경은 쓰지요. 쓰다 마답니까? 주변의 사람들로 인해서 미칠 지경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신 임무외에 아무 것도 신경쓰면 안됩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갔을 때, 모세에게 가장 심한 태클을 한 사람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자신의 형제들인 아론과 미리암입니다. 아론은 황소 우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을 섰고(출 32:21-24), 미리암은 모세의 결혼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다가 문둥병에 걸리는 집안 망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민 12:15). 다윗은 어떨까요? 왕국을 탄탄하게 세워야 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에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삼하 15:14) 예레미야도 똑같았죠. 그리고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뒤통수를 얻어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하거나 사명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려고 하나님께 나아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에 새기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사명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씀이 삶속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명자입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듯이 일의 경중은 우리의 차원이 아닙니다. 1달란트도 가치 있고, 5달란트도 똑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일은 온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여러분에게만 주신 여러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큰 도전을 받곤 합니다. “과연 예레미야가 ‘열방의 예언자’이긴 한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서를 찬찬히 읽다보면 바벨론이라는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조차 예레미야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40:1-6). ‘열방의 예언자’라는 사명을 가지고 끝까지 충성을 하게 되니, 정말 ‘열방’의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예레미야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열방의 사명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주어진 말씀처럼 우리를 ‘열방의 사명자’의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나만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된다면, 우리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 목사님도 지금보다 더 유명하게 되고, 심지어 외국에 가셔서 부흥집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목사님께서 외국에서 부흥회를 하신다면, 과연 누구를 자랑하시겠습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시겠지만, 우리 교회의 ‘사명자들’을 자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게 바로 ‘열방의 사역자’가 되는 간단한 비결입니다. 예레미야가 해외에까지 소문나듯이, 여러분들도 쉽게 해외에까지 소문나는 비결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독단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바로 로마서 16장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한결같이 바울 사도가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통해서 1장부터 15장까지 하나님을 자랑했고, 보너스로 16장에서 ‘사명자’들을 자랑했듯이, 우리 목사님도 보너스로 ‘사명자’들을 자랑할 때,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 꼭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여자분들이 많은데 도전이 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16장 7절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니아라는 (이름에서 아시겠지만 여자입니다) 사람이 있는데, 이 여자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았다.” 여기에서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다’라는 말의 본뜻이 뭐나면,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16장 7절은 유일하게 여자가 사도로 인정받고 있는 본문인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도들보다 뛰어난 여자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성 여러분! 바울이 16장에서 사명자를 자랑할 때, 여자들을 상당히 많이 자랑했습니다(뵈뵈,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율리아, 네레오). 우리 목사님께서 자랑하실 때, ‘누구 여집사/여성도가 나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해준 그 기도가 지금의 나로 만들었다’고 하시도록 끝까지 나만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한가지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누구나 주의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명자만이 할 수 있다. 사명자는 주변의 사람들의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잡고 가는 사람이다. 나는 전투마와 달려야 할 사람이며, 나는 요동하는 요단강을 건너야 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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