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다윗의 열매(요 15:4-10; 삼상 17:47)

진실과열정 2006. 7. 5. 16:20
 

본문: 요 15:4-10; 삼상 17:47

제목: 다윗의 열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말씀에 들어가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어찌 보면 상당히 긴장되고 급박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림의 색깔로 표현해본다면 짙고 검붉은 빨강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정반대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옅은 초록색이 가득 덥혀있는 한창 자라나기 시작하는 포도밭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클로즈업된 어린 포도송이 하나가 눈에 띄게 됩니다. ‘과연 이 포도송이가 좋은 열매를 풍성이 맺을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에 우리는 설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은 아마도 ‘풍성한 포도열매’라고 해야 좋을 것입니다(곧 포도의 시즌이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좀 생뚱맞은 제목을 정해봤습니다. 바로 ‘다윗의 열매’입니다.

     아니 무슨 생뚱맞은 제목입니까?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다윗이야기’를 하다니요! 물론 정말 생뚱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음서에서 나사렛 예수는 구약의 많은 인물들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침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약속된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14절). 그리고 마태복음 21장에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9절). 그러고 보면,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회당에서 듣고 배워왔던 구약의 위대한 영웅들의 모습을 예수님에게 뒤집어  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이라는 영역 속에 그대로 순응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건(fact)이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살았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살았고, 다윗이 살았고, 그리고 침례 요한이 살았었다.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지요. 그런데, 성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초월하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최후의 어퍼컷을 내리는 순서가 되었습니다(41-46):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복잡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생각해보도록 하고, 일단 우리는 예수님과 소위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당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시간의 제약에 갇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은 초시간적인 세계에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를 28대 손자야!”라고 하지 않고(마 1:17), “내 주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엘리야를 보았습니다(마 14:15-21; 왕상 17:14-16). 엘리야가 먼저 살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예레미야를 보았습니다(마 24:2; 렘 26:6). 예레미야가 먼저 살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사람들의 시각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초시간적인 예수라는 진리 앞에 믿음을 도전받는 것입니다(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할렐루야!

     예수님과 다윗을 함께 묶는 것은 우리 인간의 눈에는 헛된 상상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수님과 다윗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천년의 시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다윗의 생애 가운데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된 하나님의 법칙이 예수님의 시대 뿐 아니라, 천 년 전 다윗의 시대에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이 천년의 간격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놓아져 있지만, 그 광대한 시간조차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줄을 믿습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은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요 14:1)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가르쳐주십니다. 아까 앞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 앞에서 ‘시간의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영화 ‘넘버 3’의 송강호 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너, 너, 가지! 가지! 나, 나, 포도나무야! 너 나에게 딱 붙어! 붙어! 열매? 열매 넘쳐! 넘쳐! 하나님? 기뻐! 기뻐!” 이것은 예수님께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가장 쉽게 말씀하신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자! 한 가지 물어봅시다. 제가 자꾸만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별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멋진 표현을 남기십니다(요 13:36):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도다.” (그래서 다음 다음절이 14:1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어느 누구도 근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면, 눈앞이 깜깜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본다면, 교회에 와서는 마음이 편하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 같은데(찬송도 자기 혼자 나오고 말도 천사의 말을 하고), 교회에서 멀어지면 다시 말해서 집에만 가고 직장과 학교에만 가면 마음이 불편하고 신앙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아닐까요? 바로 ‘공간’의 문제입니다. 우리나 제자들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생각은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가르쳐 주십니다. 또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한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무엇일까요? 바로 ‘거하다’라는 단어입니다. 7절이라는 비교적 짧은 구절에서 무려 10번 나옵니다(우리말 성서 4,5절의 ‘안에 있다’가 원어로 ‘거하다’). 더 놀라운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도다.” 쉬운 말로 “빠이~ 빠이~” 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시고서 ‘내 안에 거하라!’를 10번이나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거하다’라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포도나무’라는 소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약성서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사 1:8; 렘 2:21). 그렇다면, 무엇에 집착할까요? 바로 관계에 집착합시다. 다시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를 강조하지 않으셨고, ‘거하라’에 강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거하라’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잠깐 여러분 속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쉽게 표현해보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원어의 맥락에서 생각해서 여러분의 생각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하다’라는 말이 원래 헬라어로는 ‘메노(μενω)’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살다, 머무르다’와 같은 뜻입니다. 단순하게 사전적 정의만을 가지고 ‘메노(μενω)’를 풀지 말고,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보다 그 뜻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1:33; 5:38; 6:27; 8:31). 여러 말씀 가운데 두 가지만 찾아봅시다(1:33; 6:27): 첫 번째는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머물다’의 뜻이 단순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여러 말씀을 찾지 않더라도 우리는 ‘메노(μενω)’가 단순하게 ‘살다, 머무르다’가 아니라,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는 효력의 차원’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영향력이며, 영원한 생명의 영향력이 끼치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거하다’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비록 몸으로는 함께 있을 수 없지만, 그 분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끼쳐지는 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외국에 나갔을 때, 애국심이 발동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비록 몸은 한국땅을 밟지 않았지만, 애국심이라는 영향력 때문에 더 ‘한국사람스러워’지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서 예수님은 ‘거하다’를 풀어주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다시 말해서,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려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공간의 차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 제자들에게는 대적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마 12), 자연(막 4:38), 심지어 죽음의 사자인 사단(요 11:43-44)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능히 이겼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사람들, 제자들과 자연, 그리고 심지어 제자들과 사단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만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주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집니다. 베드로가 문 지키는 여종 한사람에게 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요 18:17).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성령 하나님이 함께 거하게 되자, 베드로는 수많은 고관대작들 앞에서 넉넉히 이겼습니다(행 4:13). 이것이 바로 ‘새로운 공간의 차원’입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성령 하나님의 세계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서가 말해주는 ‘참된 신앙’의 구체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차원’은 하나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신앙의 원리 를 가지고 성서를 읽을 때, 아브라함은 시간과 공간이 새로워져서 바로 우리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로 성서를 읽을 때, 홍해를 건넜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간과 공간이 새로워져서 바로 우리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신앙의 원리 안에서 다윗을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간결하게 이러한 신앙의 원리, 즉 영향력의 원리를 표현합니다(삼상 17:47):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이성적인 차원으로 도저히 주장될 수 없는 선포입니다. 2미터의 거인 앞에서 돌멩이를 든 소년이 어떻게 이런 말을 외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영향력의 원리’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은 다윗과 사울왕의 대화가 길게 나옵니다. 사울왕은 소년 다윗을 설득합니다(17:33): “너는 소년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는 아직 애야. 애들은 가라.” 그런데, 다윗은 이상한 대답으로 사울왕을 설득합니다(34-35절).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본문은 계속해서 다윗이 설득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만, 잠깐 여기에서 멈춰봅시다. 여러분이 사울왕이라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다윗아! 너 잘났다. 사자나 곰은 나도 소시적에 얼마든지 잡아버렸다!” 혹은 “그래?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않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전쟁터에는 목동이 직업이었던 사람이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목축업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렇다면, 사자나 곰을 물리쳐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과연 그것이 2미터의 거인 앞에 싸울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서 다윗의 ‘새로운 공간의 차원’이 드러납니다. “그렇다! 나는 2미터의 거인 앞에서 싸울 수 있다! 내가 사자나 곰을 물리친 것은 전쟁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비록 외형상으로는 2미터가 넘지만 또 하나의 짐승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전쟁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가 함께 있다면 골리앗은 또 하나의 사자나 곰일 뿐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할렐루야! 이것이 신앙의 차원이었습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도 사자나 곰을 물리쳐본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물리쳤기 때문에, 2미터의 거인 앞에서 “이거랑 그거랑은 달라!”라고 도망했던 것입니다.


말씀이 삶속에서

     이제 본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깊이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의지적인 부분을 도전받으면서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어쩌면 우리는 다윗보다는 도망의 기회만을 찾았던 이름 없는 병사와 같을 것입니다. 여우 한 마리 물리쳤다고 뻐기는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다윗의 이러한 고백을 들었던 병사였다면, 이제 다르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다! 그동안 나는 나의 힘으로만 여우를 물리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바로 하나님의 도움이었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것이라면, 내가 그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거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사자와 곰을 물리치신 하나님이 골리앗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단순한 생각은 ‘영향력의 차원,’ 다시 말해 ‘거하라’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다윗이 돌멩이로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 천 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다윗이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서 골리앗을 원했을 때, 다윗은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15:8; 삼상 17:46).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이 천년이 지난 우리에게 동일하게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합니다(요 15:8). 예수님께서 포도열매를 말씀하신 것에 저는 무지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수박과 같이 달랑 하나만 맺는 열매라면 조금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재미있는 도전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포도열매에 여러분이 원하는 삶의 열매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차원의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원리가 다윗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시간은 정말 단지 숫자에 불과합니다. 100년 전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법칙은 오늘날 남녀칠세합석으로 바뀔 정도로 세상의 법칙은 시간에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천 년이 지나도, 이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습니다. ‘새로운 공간’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영향력이 끼치는 효력의 차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이 성서의 말씀으로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믿고, 그 영향력에 순응하도록, 그 영향력에 지배를 받으려고,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다윗은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거했고 골리앗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대로 이루어주셨고, 다윗은 이 사건으로 길이 남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2006년도 후반전이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올해의 목표를 위해서 얼마나 땀을 흘렸습니까? 아무리 땀을 흘려도 내 힘으로는 하나의 열매도 온전히 맺지 못했음을 기억합시다. 이젠 하나님의 나의 시간과 공간에 모셔 들이도록 합시다. 그래서 올해도 많은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