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6:9-13
제목: 놀라운 기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말씀에 들어가며
예수님은 사람들을 ‘놀래키는 은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씀드리는 ‘놀래키다’라는 뜻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짓궂은 골탕을 먹이셨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놀래다’라는 뜻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예수님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놀랐다고 복음서 여러 부분은 증거합니다. 눅 4:32; 막 1:22; 6:2; 10:26; 11:18에 의하면,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도(22:33; 19:25; 13:54; 7:28!) 예수님은 사람들을 놀래키십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구절에서 ‘놀라다’라는 단어는 똑같은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εκπλησσω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εκ 즉, ‘밖으로/밖에서부터’라는 뜻과 πλησσω 즉, ‘부딪히다/깨지다’라는 뜻이 합쳐져서 ‘밖에서부터 부딪혀 깨지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저는 ‘놀라다’라는 단어를 사전적으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안에서 이 εκπλησσω(밖에서부터 부딪혀 깨지다)의 보다 자세한 뜻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제일 가까운 마 7:28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우리는 ‘놀래니’라는 의미의 차원을 조금 눈치 채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관련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유독, ‘놀래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난 후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13:54)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19:25)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22:33)
그렇습니다. εκπλησσω 즉, ‘밖에서부터 부딪혀 깨지다’라는 뜻은 이제 더욱 확실해 집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밖에서부터 들려온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의 생각이 부딪혀 깨졌다’라는 실제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단지 기분상의 변화를 나타내는 ‘놀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권세를 경험한 사람들이 느꼈던 실존적인 충격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이 완전히 깨어져버리는, 하나님의 파워에 대한 겸손한 반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
당시에 서기관들은 ‘최고의 지식인’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7장 29절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수준을 뛰어넘었다’라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은 ‘땅의 사람들이 생각해낸 하나님’을 가르쳤기 때문이지만, 예수님은, 그 분이 직접 하늘에 내려오신 분으로써, 직접 경험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하나님’을 보았으니, 사람들이 정말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늘의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며,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떠한 하나님을 소개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더욱 깊이 발견하고자 합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1. 놀라운 기도
모두가 아시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 5-7장은 ‘산상수훈’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주기도문’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외우지는 못하지만, 주기도문은 외울 수 있습니다(산상수훈을 조금은 외운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우리는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누가복음에서도 ‘주기도문’이라고 부를만한 기도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눅 11:2-4):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누가복음에도 이렇게 주기도문이 나와 있건만, 예배를 마치며 주기도문을 올릴 때 예배자들은 하나같이 마태복음의 기도문을 드립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배우며, 바로 우리가 기독교 전통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기독교 전통을 배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 13절에서 우리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부분에는 없는 괄호가 눈에 띄지 않습니까? 이 괄호란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괄호는 ‘더 오래된 사본에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지금부터 2,000여년전 우리가 들고 있는 좋은 책과 같은 성서가 나올리는 만무했습니다. 더군다나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서기관)에 의해서 성서는 필사되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서는 수많은 사본(copy)들로 기록되어져 각처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본들이 전해져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적으로 앞선 것이 있고 시간적으로 나중의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흩어졌던 사본들을 모으고 정리한 결과, 오늘날 우리의 손에 한권의 성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말 성서에 괄호가 있다는 것은 ‘보다 앞선 사본에는 그 내용이 없다’라는 표시입니다. 즉, 마태복음 6장 13절에 대해서 수많은 사본들이 있는데, 보다 오래된 사본들-그래서 보다 권위있는 사본들-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고 저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잘못되었구나!’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에서 보다 확실하게 기독교의 신앙 전통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 예수님은 괄호부분을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괄호 부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지켜야할 핵심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면서, 예배의 시작과 마지막을 알리는 ‘송영’(頌榮)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중에 마태복음의 기도문을 초대 교회가 받아서 예배의 ‘송영’이라는 기독교 전통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이 지난 우리도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신앙의 고백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엉뚱한 방향으로 주기도문을 고쳤습니다. 바로 ‘대개’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붙인 것입니다. ‘대개’가 무슨 뜻입니까? ‘일반적으로’ ‘대체로’라는 뜻입니다. 혹은 ‘대충’도 됩니다! 오히려 ‘항상’이 낫지 않을까요?)
이제, 주기도문 자체로 돌아와 봅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 너무 놀라운 진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놀라운 진리였을까요? 저는 이 시간 주기도문에 대해서 한절 한절을 자세하게 풀어보기보다는 핵심 키워드를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주기도문은 앞선 잘못된 기도에 비교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8절이 바로 잘못된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예수님은 그 가르침의 완성으로 주기도문을 말씀하십니다. 잘못된 기도는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바로 5절의 종교인의 기도이며, 7절의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종교인은 회당과 큰 거리에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합니다. 즉, 사람에게 기도합니다. 5절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저들은 목소리를 높인다고 합니다. 저는 이를 ‘큰소리기도’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들의 기도는 사람을 향한 설교일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의 기도가 바로 훌륭한 설교이지 않습니까! 한편, 이방인은 자기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기도합니다. 즉, 그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기도를 하는 독특한 기도를 말합니다. 7-8절에서 이들은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말을 많이 하기만 하면’ 장땡인줄 아는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를 ‘말많은기도’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들의 기도는 주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기도가 바로 ‘이방인’의 주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5-8절의 잘못된 기도를 바로 잡으시는 의도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던 겁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기도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바로 잡아줍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대상은 고개숙인 세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쳐주십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포입니다. 주기도문에 의하면,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인님’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누구입니까? ‘주인님’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종’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종이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종이라면, ‘주님. 말씀만 하시옵소서. 내가 준행하겠나이다’가 맞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인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상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놀라운 기도의 세계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아버지께 하는 것이다’ 사실, 마태복음 6장에서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너희 아버지’입니다(1,4,6,8,9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이다!”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여’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습관적으로 그냥 ‘주여!’하면서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농락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여’하고 기도하신다면, 여러분이 큰소리로 구하기보다는 주인님이 무엇을 나에게 명령하시는가를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을 구해야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실제적인 내용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자세하게 설명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저는 다른 부분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바로 우리말 성서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저는 헬라어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9-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번역한 것이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캐치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렇습니다. 바로 ‘당신’ 즉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의 이름이 높여지기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도록 위해서 기도해라. 너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라. 너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지 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제목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후에 이어지는 11-13절의 기도가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뜻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 무엇이 또 필요하겠습니까! 일용할 양식과 죄를 멀리하는 기도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잊혀졌던 신앙의 전통을 기억하게 합니다. 바로, 잠언 30장 7-8절의 아굴의 기도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그렇다고, 11-13절의 기도가 하찮은 기도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우리가 그동안 하찮게 여겼던 9-10절의 기도에 더욱 신경을 써야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캐내야 할 보석들입니다. 기도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는 것입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말씀이 삶속에서
이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생활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더 이상 기도를 통해서 누구를 가르치려는 교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대표로 기도하는 경우에 조심스러워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기도를 어떠한 수단으로 이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으시다면 ‘돈 만원’ 들고 노래방에 가시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기도 제목으로 내 자신이 무엇을 기도했는지도 모를 신비의 수준까지 올라가지 마십시오. 실제로, 금요 기도회는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기도제목들로 꽉 차있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중보기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한몸된 우리 성도님의 질병의 치유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세계 선교지의 구체적인 도움을 위한 기도까지, 우리는 꼭 필요한 중보기도의 제목들을 매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차량운행이라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30분 이상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한 분들이 많이 계시고, 또 많은 분들이 일찍 일어나시기 때문에 기관총에서 총알 쏟아 붙듯이 빨리 기도를 마쳐야 되는 압박감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신도 기억 못할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정말로 차분히 인도자가 제시한 중보기도와 특별한 기도제목들만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이번주에는 무엇을 기도했는가를 한 주간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우리가 모일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응답(Yes, No, Wait)을 나누고 찬송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기도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전 7:12에서 바울이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나타냈던 것처럼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사실, 기도는 훈련된 습관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아버지를 만나며, 그분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놀라운 기도라고 잡았습니다. 정말로, 기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내가 완전히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정말로 ‘놀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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