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강해(4)
본문: 렘 1:4-10
제목: 예레미야의 소명(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하시니라. (개역개정)
말씀에 들어가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아주 기쁜 일입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나중에 누군가와 함께 꼭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집을 연구해보면, 그 맛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쉽게 알게됩니다. “몇십년 동안 전해 내려온 깊은 정성이 오묘한 맛을 만들어낸다”라는, 단순한 비결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손쉽게 만들어진 화학조미료는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깊은 맛을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세상의 그 어떤 맛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하늘의 맛’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성서야말로 손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셀 수 없는 오랜 시간과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세계를 경험하면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바로 이해하는 것에서 우리의 신앙은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리모콘으로 로봇을 조종하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조종하는 방법으로 성서가 기록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사람이 로봇처럼 사용되었다면, 그것만큼 손쉽게 만들어진 책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의 증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이집트에서부터 당시엔 땅의 끝이라고 여겼던 바벨론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경험해왔던 일들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가르쳤던 것이 바로 성서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출애굽’의 사건이 지도자 모세의 혁명적인 탈출사건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안으로의 개입이었다는 ‘증언’이 바로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가나안 땅의 점령’이 지도자 여호수아의 탁월한 전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안으로의 개입이었다는 ‘증언’이 바로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바벨론으로의 포로됨’이 강대국의 무자비한 점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안으로의 개입이었다는 ‘증언’이 바로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어떻게 여호와께서 일하셨는가를 ‘증언’한 것이 바로 성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지상 최대의 맛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맛이 바로 ‘신앙의 맛’이며, 그 맛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맛’입니다. (그 맛을 사모하십시다)
이 ‘증언’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생각을 해봅시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증언’했는가라는 생각입니다. 이스라엘의 ‘증언’, 즉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은 크게 세가지로 나뉘어집니다. 바로 왕, 예언자, 제사장입니다(이러한 흐름으로 이사야[왕], 예레미야[예언자], 에스겔[제사장]을 읽으면 구약의 신앙 전통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구약성서의 주축을 이루는 ‘증언’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가 예언자 전통 중에 속하게 됩니다. 왕과 제사장들에 비해서 예언자들은 유달리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바로, “예언자들은 세습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왕들과 제사장들은 철저하게 세습적입니다. 아버지가 왕이면 아들은 자연스럽게 왕이 됩니다. 아버지가 제사장이면 아들은 자연스럽게 제사장이 됩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결정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유독 예언서에서만 우리는 ‘예언자들의 소명’에 대해서 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1. 소명
이제, 말씀의 중심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레미야 1장은 예레미야가 어떻게 예언자가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4-10절은 여호와와 예레미야의 대화를 중심으로 ‘시(시문)’로 기록된 반면, 11-19절은 여호와께서 보여주신 비전을 중심으로 구체화된 ‘글(산문)’로 기록되었습니다. 11-19절은 다음 시간에 나누도록 합시다. 시간 관계상 모든 부분들을 자세하게 다룰 수 없으므로 중요한 몇 부분만 설명을 드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적용하고 도전할 부분들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로,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여기서의 선택은 ‘구별됨’, ‘성별됨’을 뜻합니다. 사실, ‘선택받았다’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갈 1:15)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는 이사야서에서도(44:2,24; 49:1), 멀리는 모세에게서도(출 7:1)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이 ‘하나님이 알았고,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호 13:5; 암 3:2). 그러고 보면, 누구나 선택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꼴이 됩니다. 바로,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구별’했던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두가지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자기 스스로가 ‘선택되었다’라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이며, 예레미야서에서 발견하게될 거짓예언자입니다. 두 번째는 ‘신적 부르심’을 경험한 경우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울이며, 예레미야입니다. 거짓예언자와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말을 외칩니다. 그러나, 바울과 예레미야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 받은 말씀을 외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 즉 ‘신적 부르심’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받았던 ‘신적 부르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5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해서 정말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저는 이 짧은 구절에서 저도 잘 모르는 ‘예지예정설’과 같은 심각한 설명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차원 모두를 지배하시는 여호와의 절대적 주권’에 대해서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의 인생이 나 자신의 노력으로만 되어지지 않음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께 내 인생의 핸들을 기꺼이 맡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내 인생의 핸들을 하나님께 내어 드립시다) 사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핸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우주를 좌우하는 분이 보잘것없는 내 인생의 핸들을 무엇 때문에 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은 시공간을 모두 주관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열방을 위한 예언자가 반드시 필요했음을 말해주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필요에 절대적으로 응답해야할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로, ‘예레미야의 응답’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인광고를 들은 예레미야의 첫마디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6절):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슬프도소이다.” 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선택에 대한 한 사람의 응답입니다. 새번역 성서는 이 말을 잘 풀어 놓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의 반응은 두손을 내밀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이유를 찾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이’는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험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예레미야를 부정적인 사람으로 매도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해서, 모세도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했으며(출 4:10), 솔로몬도 왕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했으며(왕상 3:7), 심지어 바울 사도조차 ‘말에는 졸하다’(고후 11:6)고 인정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선택하셨던 많은 사람들은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추지는 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말을 잘 못한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이지 예레미야의 한탄이 절로 수긍될 것입니다. “정말 슬프네요. 주님 눈이 있으면 좀 봐요. 저는 말할 줄도 모른다구요. 그런 제가 어떻게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라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곧이어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7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레미야가 그동안 고집스럽게 보아왔던 대상을 바꿔주심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는 6절에서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여호와여 보소서! 여호와여 나를 보소서! 여호와여 지금의 나를 보소서!” 그러나,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바라보아야할 대상을 바꿔주십니다(9절):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야! 네가 네 자신만을 본다면, 경험이 있건 없건 간에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이제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입을 이제부터 책임지겠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합시다! 하나님의 선택이 얼마나 설득적인지요! 예레미야의 반응에 대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모든 말을 바꾸셨습니다(6절->7,9절). 하나님의 선택은 실제적이며, 구체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증표’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증표는 ‘임마누엘’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선택의 증표인 것입니다. 9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6장의 숯불이 입에 닿았던 것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래서,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도라”라는 말씀이 임마누엘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씀이 가능한 것입니다(8절). 여기에서 ‘그들’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사실, ‘임마누엘’이야말로, 최고의 증표인 셈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이 있기에 예레미야는 감히 한사람이 품을 수 없는 비젼을 갖게 됩니다(10절):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말씀이 삶속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오늘의 우리의 삶속에서 도전과 반응을 위해서 기도제목들을 만들어봅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부름을 받았다고 착각했던 사람들과 예레미야와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둘의 차이점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는 것’의 유무입니다. 예레미야는 진짜 소명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한가지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렘 33:3) 사랑하는 여러분! 부르짖는 것에 기도의 목적을 두지 마십시오.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목적을 두고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로, 우리는 예레미야의 나약함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생각의 전환을 요구하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은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모하면서, 사람이나 환경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믿음의 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세 번째로, 우리는 예레미야에게 임한 구체적인 부르심의 증표를 보았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열방의 예언자라는 세계적인 비젼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꿈꾸십시오. 오직 여러분들만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은 때가 차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오늘의 본문이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모든 소명의 모델로 주어진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각각의 개인차가 있으며, 서로 다른 경험들이 분명히 있음을 기억하시고, 예레미야와 다르다고 모든 소명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갖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레미야와 똑같은 경험을 할 순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소명에 대한 누가복음의 증언은 우리에게 부르심에 대해서 보다 새로운 차원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말씀을 깊이 읽으면서, 그 말씀속에서 자신을 향한 부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눅 4:18).
'Preaching > [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설교-06] 사랑과 배신의 전주곡 (0) | 2006.03.10 |
---|---|
[예레미야설교-05] 예레미야의 소명(2) (0) | 2006.03.10 |
[예레미야설교-03] 예레미야서의 자기소개(3)-무너진 성전위에 세워진 신앙 (0) | 2006.02.13 |
시편 133편: "우리안에서 발견되는 영생의 참맛" (0) | 2006.02.08 |
[예레미야설교-02]-예레미야서의 자기 소개(2) (0) | 2006.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