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강해(3)
본문: 렘 1:1-3
제목: 예레미야서의 자기 소개(3)-“무너진 성전위에 세워진 신앙”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말씀에 들어가며
저는 지금까지 예레미야서의 명함과도 같은 짧은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레미야서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즉, 예레미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읽고 순종해야할 권위있는 문헌임을 뜻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에 대한 세명의 왕들의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사역의 방향을 말해줍니다. 즉, 예레미야는 왕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쉬지않고 외쳤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드리고자하는 바는 마지막으로 ‘예레미야서의 내용’입니다. 이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시대에 무엇을 외쳤는가를 뜻합니다. 즉, 예레미야서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바로, 3절 하반절인 ‘예루살렘의 사로잡힘’입니다. 보다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이며, ‘예루살렘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말씀을 읽기는 읽지만, ‘멸망’과 ‘끝’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구약성서가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사건을 경험한 후에 본격적으로 기록되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신명기적 역사서와 예언서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지난 한 주간 우리나라를 시끄럽게했던 일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주간 정치권은 새로운 장관들의 청문회로 시끄러웠습니다. 특별히,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유시민 의원’은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모두가 예상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은 유시민 의원을 ‘박멸’의 대상으로 보아 ‘유시민 죽이기’로 일관했고, 열린우리당은 ‘내식구’로 보아 똘똘 뭉쳐서 감싸기로 일관했습니다. 많은 언론은 하나같이 이러한 여/야의 행동을 비판했습니다. 즉,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써, 현행 문제점 파악과 개선방안이나, 혹은 유시민 의원의 청사진과 같은 실제적인 내용은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야는 한쪽은 죽이기로 일관했고 또 한쪽은 살리기로 일관했기 때문에, 심지어 ‘이러한 청문회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와 같은 국민의 원성만 살 뿐이었습니다. 저는 유시민 의원을 둘러싼 여/야의 행동에서 아주 중요한 ‘인간성’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입니다. 야당은 ‘박멸의 대상’으로 보고 싶었고, 여당은 ‘내식구’로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중요한 사항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의 특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우리는 성서에서 ‘복’과 ‘부유함’을 보고 싶어 합니다. ‘생명’과 ‘능력’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말씀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멸망’과 ‘끝’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 소위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빠져왔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의 신앙이 무조건 긍정적이어야 한다’라는 획일적인 사고에 메여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내용은 신앙이 아니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왜곡된 신앙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일하실 수 있으며, 또한 반대로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좋은 예가 창세기 6장 이하에 소개되는 노아홍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싹 쓸어버리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일을 실행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부정적으로도 일하신다’라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였습니다. 분명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부정적'이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특별히, 오늘 언급될 예레미야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가지고, 긍정적으로든지 혹은 부정적으로든지 일하실 수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가 증거하는 모든 부분들을 인정해야 하며, 거기에서 신앙의 비밀을 발견해야 될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3. 무너진 성전 위에 세워진 신앙
이제, 말씀의 중심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핵심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일까요? 그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은 곧 사로잡힌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이 사건은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은 곧 ‘여호와의 전’이 무너지는 것으로 실제화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의 제일 마지막장인 52장은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다름아닌 여호와의 전이 무너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17-23절). 예레미야의 메시지였던, ‘예루살렘이 사로잡힌다’라는 말은 곧, ‘여호와의 전이 완전하게 무너질 것이다’라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충격적인 것임에 분명합니다. 우리는 27장 16절과 28장 3절과 같은 구절에서 당시의 거짓예언자들이 ‘여호와의 전’ 곧 성전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또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여호와의 집 기구를 이제 바벨론에서 속히 돌려오리라’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이는 그들이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하셨나니...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선포했을까요?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있지만(7, 26장), 7장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하지만, 시간 관계상 몇 개의 구절만을 읽고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상황은 예레미야가 성전 문 앞에서, 예배하러 온 사람들에게 외치는 모습입니다(2절):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백성이 들어야 할 여호와의 말씀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4절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오! 놀랍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2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말씀을 선포했던 예레미야가, 4절에서 ‘이곳은 여호와의 전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로 해괴한 일입니다. 그러나, 27장과 28장에서 읽어본 거짓예언자들의 선포와는 분명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거짓예언자들은 외쳤습니다: ‘이 곳은 변함없이 여호와의 전이다!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틀림없이 잘 될 것이다!’ 거짓예언자들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조건적입니다(3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성전)에 거하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가 바르지도 않으면서, ‘이 곳이 여호와의 전이니깐 이곳에 오면 만사 오케이다’라고 생각하느냐? 그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그런 말은 거짓말이다!” 무조건적인 여호와의 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인 여호와의 전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5-6절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시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다른 모든 성서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뿐인 종교생활을 했던 것입니다(8-10절):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본다는 법칙에 딱 맞게,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보았습니다(11절):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고, 결국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신앙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기적인 신앙의 태도는 이웃에게 돌아갈 사랑을 빼앗는 도적의 행위이며, 이기적인 신앙의 자세는 하나님에게 돌아갈 사랑을 빼앗는 도적의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장소가 되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도적의 굴혈일 뿐입니다. 실례로,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보다, 우리가 은혜받는 찬양을 더 즐기지 않습니까?
이러한 현상은 여호와의 전에 대한 인식이 성서적이지 못함에 기인합니다. 즉,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만남의 장소’, 즉 ‘인격적인 교제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 행위’의 장소로 제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제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행위의 대상으로 비인격화되어질 때, 결국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신앙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22-23절):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은 화려하고 멋있는 ‘예배의식’을 원하시지 않으시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친밀한 교제’를 원하셨습니다. 청년부 수련회를 진행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큰 소리보다 작은 소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의 목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진실되게 아뢰는 것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하나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그리고 이웃들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성전을 고집하다가 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인격적 관계’없이 무조건적인 ‘종교생활’만을 고집하다가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너짐은 다른 아닌 성전의 무너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부정적인 일’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1: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여호와는 뽑으며, 파괴하면서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심으며, 건설하면서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의 멸망’ 즉 ‘성전의 붕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메시지입니다. 심으며 건설하시는 하나님은 무너진 성전위에 새로운 신앙의 진리를 세우십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장소에 하나님이 있다는 옛언약이 없어져버리고,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겠다는 새언약인 것입니다(31: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무너진 성전위에 세워진 신앙’
말씀이 삶속에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쳐버리면, 하나님을 잘못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전인격적인 교제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힘써야할 신앙의 방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얼마나 재미있게 살아갈까?’ 이것이 바로 신앙의 맛이며, 예수 믿는 재미가 솔솔 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의 모습은 여러모로 예수님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특별히,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마 24: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레미야와 같다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마 16:14).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성전을 고집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 4:21).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무너진 성전에 성령을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우리들의 마음에 성령이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6).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며(요 14:18), 그 약속은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성취된 약속은 성령을 통한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실제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새로운 신앙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라. 더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의 태도에 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가르칩니다(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은 더 이상 어떠한 장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 안에 거하십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전은 바로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원교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앙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며, ‘예배당’은 신앙인들이 모여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장소인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가 된 인격적인 관계란 예배당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언제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기도하면 잘 안된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왜곡된 신앙입니다. 직장에서 말씀을 읽으면 잘 안 깨달아 진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왜곡된 신앙입니다. 그건 기분의 문제일 뿐입니다. 집에서건, 직장에서건, 예배당에서건,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님으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보다 더 깊은 차원의 신앙의 세계로 이끕니다. 예배당 문만 나서면 신앙과 잠시 동안 별거를 나누는 이기적인 신앙과 차별됩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은 종교적 행위보다 전인격적인 관계의 소중함을 체험하게 합니다. 무조건적인 구원의 증표로서 성경구절들을 외우는 수준에서 벗어나, 모든 말씀 한구절 한구절이 생생하게 살아서 나와 함께 역사하는 체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저는 오늘 제목으로 “무너진 성전위에 세워진 신앙”이라고 잡았습니다. 사실, 이것이 예레미야서의 핵심 메시지이며,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절대적으로 원하셨던 참신앙의 맛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유전을 좇는 화석화된 신앙은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서적이며 살아있는 생생한 신앙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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