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133편 1-3절
제목: 우리안에서 발견되는 영생의 참맛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한글 개역)
말씀에 들어가며
오늘 우리는 참으로 익숙하면서도 또한 참으로 어색한 말씀을 읽어보게 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짧은 구절에서, 동성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성애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잘못된 행위임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레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시편의 본문에서 ‘동성애 없는 동거’까지를 기쁘시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제 여러분은 제가 왜 이렇게 말씀을 진행하고 있는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익숙한 말씀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말씀들은 아닌가요? 예를 들어봅시다. 시편 2편은 어떨까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요? 왜 이 말씀을 한 것일까요? 놀랍게도 이 말씀은 다윗이 받은 하나님의 계획을 노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3절에서 말하듯이(“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하도다), 다윗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모압민족들이 그 지배에서 벗어나려는(독립운동?) 시도에 대해서, 그러한 시도는 쓸데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2:4) 우리가 찬송으로 많이 부르는 ‘너는 내 아들이라’는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로(신의 아들) 담대하게 적국들을 부수라는 격려인 셈입니다(2: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요,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편 2편을 간단히 요약하면, ‘독립운동을 막기위해 다윗에게 힘을 부여하신 여호와’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시편 2편에서 오직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짧은 구절만 가지고, 신앙의 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신앙을 세워가는 재료인 말씀에서, 앞뒤를 잘라내고 내 마음에 드는 부분만 선택해서 신앙의 탑을 쌓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수원교회는 ‘기초를 바로 세우자’라는 주제로 올 한해를 시작했습니다. 이 주제는 청년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장 필요한 기초가 ‘말씀의 기초’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예를 들어 설명한 것과 같이, ‘내 마음에 드는 말씀’의 기초를 세우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기초’를 세우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두가지 원칙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여라’입니다. 사람들끼리도 대화를 할때, 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예의이고, 또 그래야 그 사람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서의 어떤 한 책을 보려면, 그 한 책을 전체적으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원래 성서는 장과 절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고린도후서 15장 58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이 ‘더욱 힘써야 한다’라고 말했던 ‘주의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헌금’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16장 1절(성도를 위하는 연보)은 우리를 머쓱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라’입니다. 이 원칙 역시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불변의 원리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서로 너무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라는 최소한의 배경지식입니다. 등산하기 싫어하는 여자에게, 다음 데이트 장소로 지리산을 권하는 것은 자멸하는 것이지요. 혹시, 우리는 성서를 이렇게 대하지는 않았을까요? 말씀의 배경을 모른채, 나의 입장에서만 바라 보는 것 말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제 곧 우리는 133편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기초’가 되는 ‘말씀의 기초’를 위해서, 저는 두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선 제가 맡은 사명이 바로 이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전체로 볼 수 있게 도와서 여러분 마음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여러분이 말씀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속에서 원하시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것”
말씀의 중심에서
시편 133편의 말씀은 첫 번째 원칙처럼 전체를 읽어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원칙에 더하여 두 번째 원칙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 과연 어떤 배경에서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일까요? 다행히도, 133편에는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정에 올라가는 노래’ 그러고 보면, 이러한 제목이 120편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34편까지 계속됩니다). 공통된 제목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132편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매우 짧다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119편을 읽은 다음 얼마나 기쁜가!). 우리는 120편부터 134편까지가 ‘시편’중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모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일년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찾아서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신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과 초막절(=장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정도의 땅을 소유했습니다. 넓지는 않지만, 지금부터 3,000년전에는 좁지도 않은 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주시고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일년에 최소한 세 번정도는 모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로 기본적인 일입니다. 그렇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정말로 귀찮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속에서 시편 133편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1절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감탄사를 우리는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수백리나 떨어져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한 곳(예루살렘)에 모여서 한 지붕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지 않겠는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연합된 모습은 2절의 ‘보배로운 기름’같고, 3절의 ‘헐몬의 이슬’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과 이슬’은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정말이지, 여호와께서는 3절 하반절에서 ‘복을 내려주신다’라고 하십니다. 그 복이 바로 ‘영생’입니다.
배경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시편 133편이 동성애를 옹호하는 말씀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그 모임을, 하나님은 정말로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시편에서 사용된 ‘영생’이라는 개념이 구약시대에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습니다(시 90:10).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는 공동체’의 가치를 ‘영생’으로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생각이 아닙니다. 사실, 히브리어 자체가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영생’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임’입니다. 그런데, ‘형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힘’입니다. 저는 원어로 본문을 읽으면서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우리의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시는구나!”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수련회의 주제로 다른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임원회의를 통해서 ‘연합’이라는 주제가 더 절실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주제 성구중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시편 133편을 택했습니다.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말씀을 이용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면서 정말로 이 말씀이 우리 청년부에게 꼭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생은 하나되는 우리안에 있도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공동번역)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새번역)
말씀이 삶속에서
이제 우리는 시편 133편을 전체적으로 읽어보았고, 그 배경도 이해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는가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몇가지 구체적인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처음엔 청년부의 나이 폭이 너무 넓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8세를 기점으로 해서 제1청년부와 제2청년부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저의 생각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찬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아주 중요한 사항을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교회학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가족됨’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청년부가 ‘교회학교’로서 출발한다면, 1/2청년부로 분할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 청년부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출발한다면, 우리는 굳이 나누지 않아도 ‘한 가족됨’을 기쁘게 여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보다 학년이 낮고 높은 수준이 아니라, 나의 형/동생/오빠/누나의 관계입니다. 서로가 경험하고 관심갖는 세계가 너무나 다르지만, 우리는 ‘한 가족’으로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방금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과 예수님과 동갑내기인 청년들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하나되게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청년부는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즉, 여러 곳에서 교회를 위한 봉사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분들이 바로 청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을 보면서, 저는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즉, 청년부 안에서 모이지 못하고, 교회 봉사를 한다는 것은 신앙의 기초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러한 현상을 집안 살림 못하고, 집 밖에서 딴집 차려놓고 사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두가지 중요한 도전은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교회 공동체가 온전하게 하나되지 못하게 했던 고질병입니다. 뿌리가 아주 깊이 박혀서 쉽게 빠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나쁜 질병입니다. 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깊이 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아픈 과거들을 기억해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치료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청년부의 연합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치료를 받으면서 한가지만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바로 변화된 자신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청년부도 한가지만을 바라봅시다. 바로, ‘기뻐하시는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의 미소’말입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 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1) 2006년 청년부 겨울 수련회 주제 설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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