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무엇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가?(렘 34:8-22)

진실과열정 2005. 10. 23. 23:40

본문: 예레미야 34장 8-22절

제목: 무엇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가?



서론

     사람이 어떠한 대상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의 대상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를,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라고 하시고(시 118:8),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라”라고 하십니다(눅 11:4). 그래서 우리의 입술은 “난 너만 믿는다”라는 말을 줄여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도 용서하셨는데, 너를 용서할께”라는 말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서가 어떠한 대상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서는 신문의 기사라기보다는, 법정의 증언과 같습니다. 성서는 신문기사처럼 6하원칙으로 모든 일들을 낱낱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시편 24편 2절에서 시인은 “땅이 물위에 떠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수천년전 당시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입니다. 수천년전의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잘못 알아왔던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비과학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신문기사와 같은 정보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혼돈에 부딪히고 맙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신문기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진리를 말합니다. 시편 24편 1절은 “온 세계를 여호와께서 창조하셨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천년전 당시의 사람들이 “세상이 물에서 생겼다! 세상은 불에서 생겼다!”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생각을 말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니다! 온 세계는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성서는 신문처럼 매일의 사건들을 무작위로 나열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대한, 치열한 법정 싸움에서 생겨난 위대한 증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증언을 듣고 확신하며, 나의 삶을 전폭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본론

     제가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읽은 말씀은 예레미야서의 아주 작은 한 부분입니다. 사실, 8-22절까지 분량은 작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전체와 비교해 볼 때, 이 부분은 매우 짧습니다. 왜냐하면, 신구약 통틀어서 가장 많은 분량의 성서가 바로 예레미야서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길다고 생각되는 시편보다 무려 2000단어가 더 많이 기록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의 시대만큼 신앙의 증언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는 거짓과 혼돈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짧은 시간에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가지만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이 짧은 본문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그 마지막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 앞에 서있다는 충격입니다.

     8절에 등장한 ‘시드기야’는 이스라엘 최후의 왕입니다.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신탁을 선포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바벨론 군대)에게 명하여 이 성(예루살렘)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예레미야 34장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다윗의 왕국이 무엇 때문에 망하게 되었는지를 증언합니다. 22절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다시 오게 하리니’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그들(바벨론 군대)을 전에 한번 불렀다가 물러가게 했음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영원히 물러갔으면 좋았을 것을, 무엇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다시 오게’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어떠한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노예해방에 대해서 말합니다. 9절에, 언약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하고 그 동족 유다인으로 종을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비를 자유케했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물론, 노비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을 읽다가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얼핏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은 7년마다 노예를 해방해야만 했습니다. 출 21:2; 신 15:12; 레 25:10에 세 번이나 노예해방에 대한 법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4절은 이스라엘 역사에 그런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렸거든 칠년 만에 너희는 각기 놓으라. 그가 육년을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케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나를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성서를 몇 번이고 읽으신 분들이라면, 정말로 성서 어느 곳을 찾아봐도 실제로 노예를 해방했다는 증언이 없었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노예를 해방시켜주었습니다! 아까 읽었던 9절에서와 같이 그들은 자유의 언약을 세웠습니다. 18, 19절을 보면,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이 행동은, 언약을 어기면 쪼개진 송아지처럼 될 것이라는 엄숙한 약속을 뜻합니다. 그러나, 10, 11절을 보면, 그들은 언약을 어기고 맙니다: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들이 소유했던 노예를 놓았다가 다시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 사건입니다. “노예를 놓았다가 다시 끌어들였던 것처럼, 여호와께서도 바벨론 군대를 놓았다가 다시 오게 하리라! 그래서 이 성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황무하게 하리라!”라는 신탁이 22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흔들리는 촛불이 완전히 꺼지게 된 최후의 사건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예레미야서가 증언합니다.

     저는 여기까지 본문의 내용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으로 넘어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은 “왜 이스라엘은 망했는가?”입니다. 다른 말로, “무엇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가?”입니다. 저는 오늘 제목을 이 질문으로 삼았습니다: “무엇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가?” 이것은 쉽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앞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까? 성경을 하루에 10장씩 읽지 않은 것입니까?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하루에 10분도 기도하지 못한 것입니까? TV 연속극을 너무 좋아해서 장밋빛인생 하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까? “여호와 앞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앞에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서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여호와께서, 스스로 자신의 약속을 버리실 정도로 진노하실 이스라엘의 ‘그 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 그대로, 그들은 조상 대대로 노예를 해방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도 않았고, 지켰다가 바로 돌이켜 다시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멸망의 이유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서의 증언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만 모든 해결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종교라는 가면입니다. 성서는 여호와와 나와의 관계는 나와 이웃의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우리를 깨우칩니다. 여호와와 나와의 관계가 나와 이웃과의 관계와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연결점이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목소리인 것입니다. 종교는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참된 신앙은 우리를 세상과 만나게 합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22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잘 풀리게 하옵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목소리를 듣는 것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꽉 찬 성경 지식’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자를 돌아보라”는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신앙입니다.

     사실, 예레미야서가 아닌 열왕기하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멸망의 이유가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왕하 17:12).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서는 왕궁에서 역사기록이라는 일을 보았던 서기관들이 쓴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잘 모르는 저 윗분들이 신앙적으로 보면서 증언한 것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제 세계를 살았던 예언자들이 외쳤던 멸망의 이유는 서기관들의 증언과 확연히 차이를 보입니다. 바로 예레미야서 오늘의 본문이 그렇습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우상숭배’라는 차원이 아니라, 먹고 사는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바르게 먹고 살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이 바로 예언자들의 증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은 어떤 삶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평가했던 것일까요? 바로, 노예를 좌지우지했던 ‘이스라엘의 어떠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정체를 우리는 19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그렇습니다. 그들은 노예를 소유할 수 있는 충분한 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을 의심케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땅 모든 백성’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국민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어 그대로, ‘땅의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땅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땅을 많이 소유한 부자를 말합니다. 유식하게 말해서 ‘지주’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미가서 2장 1, 2절에 이스라엘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풍자합니다: “침대위에서 잠들기 전에 땅 생각만 하는구나! 그리고 날이 밝으면 부지런히 움직이는구나!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힘없는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구나!”



결론

     본문 말씀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할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도 노예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접근했습니다. 그 대답은 이스라엘의 힘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여호와의 마음에 안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힘있는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간에, 여호와의 법이 실천되지 못했던 것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하여,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충분히 이러한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노예로 부리고 임금도 안주고 성폭행까지 하면서 착취하는 우리나라를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실까요? 땅투기를 통해서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평생 집한채 갖는 꿈까지 산산히 무너뜨리게 하는 우리나라를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실까요? 교회안에서 파워가 있다고 파워없는 성도들을 좌지우지하는 공동체를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실까요? 돈있는 성도의 말이 돈없는 성도의 말을 이기는 공동체를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실까요? 누군가를 깔보는 나를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실까요? 이것이 과연 말씀을 사사로이 푼 것일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에서 해답은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