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말씀을 준비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라구? 어떻게?
오늘 저는 “하나님 사랑하기”라는 주제로 3월의 첫 번째 토요일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지상 최고의 명령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신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다름아닌 우상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마 22: 37-8) 그렇습니다. 우리의 젊음을 다 태워버릴 정도로,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할 대상이 바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과연 무엇일까요?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드리는 것,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드리는 것’ 말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저는 참으로 다양하게 하나님께 드렸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매주 100원씩 헌금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토요일과 주일 예배를 하나도 빠짐없이 꼭 드렸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하루에 한 장씩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큐티도하고 매주 노방전도도 했습니다. 저는 물질과 시간과 열정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기 아들까지 바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람아! 맏아들을 드리는 것? 그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안타까와 하십니다. 미가서 6장 7-8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언자 미가는 자신의 예언 마지막에 놀라운 통찰력을 줍니다(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라는 실제적인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와 같으리!” 바로 이것이 미가의 이름의 뜻이라는 것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미가는 그 이름에서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출발점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출발점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우선 15절을 다시금 읽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이름이 최초로 선포되고 있는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참고, 출 6:2-3).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안에 들어있는 놀라운 비밀과 엄청난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간략하게 세가지를 함께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저의 설교는 여러분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조금 변화시킬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여러분은 오늘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1) 이름의 뜻: 야웨(여호와)는 현재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이름의 실제성).
첫 번째로, 이름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됩니다(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헬라어 말로는 ‘예수스’(Ιησους), 전통적인 히브리 말로는 ‘여호수아’(꘨וּשׁוֹהꖾ)로, 그 이름의 뜻은 ‘구원자’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여호와가 이름이고 하나님은 직분(신, God)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그 이름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4절에 이름의 뜻이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라는 뜻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스스로 존재하는 분’입니까? 그래서, 좀더 생각을 넓혀보면, 그 어떠한 존재보다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걸까요? 지구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태양이 열과 빛을 내기도 전에, 은하가 탄생하기 전에,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부터 존재한다는 걸까요? 여러분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말씀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다른 어떤 말보다, 이 ‘스스로’에 강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에는 ‘스스로’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여러분! 14절에서 ‘스스로’라는 단어를 빼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모세에게 존재론적인 고차원적인 철학을 가르치고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들보다 먼저 된 자가 바로 나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고상한 이념을 선포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분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나는 …이다’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뜻은 ‘나는 있다’입니다. 보다 쉽게 말한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너와 함께있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철학적인 것도 아니요, 존재론적인 것도 아닙니다. 아주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생생함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히브리어를 연구하면 자연히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간에 히브리어를 가르치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을 전체적으로 읽어본다면, 자연히 여호와의 이름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400년동안 종살이를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시종일관 주저합니다. 그러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12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여호와의 비밀은 머릿속에 들어있는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있지않았던 것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실제적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분인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가 왜 여호와되심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여기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표현을 발견합니다. 여호와는 고통을 보십니다. 여호와는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여호와는 우고를 아십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이니까? 아니오. 여호와는 그 이름처럼, ‘지금 여기에 그들과 함께 계시고 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그 놀라운 이름의 뜻입니다.
여호와,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이라구요?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신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 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가 되었는지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의 심장은 벅차오름으로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분을 말해줍니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으로 말입니다. 나의 고통을 보시려고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려고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며, 나의 우고를 아시려고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끝없는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은 여호와가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하나님의 여호와되심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여호와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로 풍성케되기를 소원합니다.
2) 야웨(여호와)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성경의 중심사상이다(예수와 성령).
이제 두 번째로 생각의 폭을 넓혀보도록 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사상입니다. 성경 이곳저곳을 찾아가면서, 하나님의 여호와되심을 구체적으로 찾아보게 된다면, 우리는 절실하게 이 비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두가지만 언급하려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보혜사 성령님으로 충만케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은 예수님의 의미가 구약의 하나님에게서 정통적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여호와되심을 결정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걸음과 그 분의 손길에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즉 여호와의 임재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30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기 위한 목적론적 존재로 축소하지 마십시오. 내가 구원받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먹지 말라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아야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모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어놓으신 유일한 다리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보혜사 성령님으로 충만케 됩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들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다시금 가르쳐주십니다(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하나님의 임마누엘은 예수님에게서도 동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근심된 일이 생겼읍니다. 예수께서 떠나시면, 임마누엘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염려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마누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더욱 풍성해질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할렐루야!
이 보혜사는 분명 성령님의 이름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쉬우며 실제적인 성령님을 가르쳐 주시려고, 보혜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란 헬라어 원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입니다. 이 말은 ‘파라’(옆에서)+‘칼레오’(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보혜사는, 말 그대로 ‘내 옆에 계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하고, 말해주는 거룩한 영’이 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충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분명 불같은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령님 자체가 불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 열정이라는 속성을 비유한 것일 뿐입니다. 역시, 성령은 능력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이며,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여호와되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님에게서 구체화되고 풍성케되는 것을 깨닫게되는 일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삼위일체적인 건강한 신앙으로 맺어주는 신앙의 핵심진리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기독교 역사 2000년에서 이단은 다름아닌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작은 생각에서 시작했던 것을 명심한다면, “임마누엘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만나고 교제해야할 궁극적인 대상이 됨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3) 야웨(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 이름을 부르는 실제적인 삶에 있다(임마누엘의 체험).
이제 마지막, 세 번째로 실제적인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 봅시다. 저는 오늘 제목을 “나의 이름을 부르라”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바르게 아는 것에 출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여호와되심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름아닌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계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보혜사 성령님인 것입니다.
내가 기뻐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 기쁩니다! 이 기쁨에 함께하기 원합니다!’ 내가 지치고 연약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 무력합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 이름을 부르는 실제적인 삶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시편 18편 1절을 묵상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깊이 하나님을 사랑했었는가를 조금 깨닫게 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제가 중학교 시절에 충격적인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무서운 남자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저의 담임선생님도 아니었었기 때문에, 복도에서 만나면 빨리 인사하고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어느날, 그 선생님을 복도에서 만났습니다. 인사하기가 무섭게 도망가려는데, 그 선생님이 저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선생님들에게서 들어왔던 호칭은 무척 짧았습니다. “야!” 아니면, “너!”입니다. 조금 길면, “학생!” 혹은 “임마!”입니다. 그런데, “양지웅”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경험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해보셨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속에서 그 이름을 불러보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서 가슴떨리게 듣지 않으실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 여호와를 여러분의 삶 시간 시간 속에 부르시기 바랍니다. 속삭이기 바랍니다. 부르짖기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현재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여호와의 임마누엘은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는 실제적인 삶에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저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장차 주님이 저를 부르실 때에, 제가 이 땅위에서 했던 수많은 말들중에서 제일 많이 불렀던 것이 바로 ‘여호와’가 되는 것입니다. 제 평생 힘써 부를 이름은 ‘대한민국’도 아니요, ‘서태지’도 아니요, ‘태극기’도 아닙니다. 제 평생 불러야 할 것은 주의 이름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신앙의 신비를 깨닫고, 그렇게 살았던 믿음의 선배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바울 사도였습니다. 그는 그의 신앙의 정수인 로마서에서 위대한 진리를 선포합니다(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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