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4장 10-14절
제목/ 신앙의 세대교체
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 그 약대를 성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 12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말씀에 들어가며
최근에 유명한 책이 소개되었습니다. “100억 만드는 방법”입니다. 의외로 책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100억을 벌만큼 열심히 살면된다”입니다. 그러고보면, 요즈음처럼 서점가에는 “~하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대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실용주의의 사회에 살고 있기때문에, 무엇보다도 ‘실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러고보면, 기독교 서점 역시 “~하는 방법”의 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에서부터 “전도하는 방법”같은 단과반부터 시작해서, “신앙생활 압축가이드”와 같은 종합반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은 모두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볼수록, 저에게 강하게 밀려오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안에는 “신앙생활의 기본원리”같은 실제적인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안에는 “기도하는 방법”이나 “전도하는 방법”, 심지어 “신앙생활 압축가이드”와 같은 세세한 사항들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놀랄 정도로 암송하고 있는 “주기도문” 역시 기도에 대한 완벽방법으로 보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6장 전체를 읽어본다면, 이 “주기도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가르치는 기도는 첫째,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아버지에게 하듯 솔직하게 하라”는 것이고, 둘째, “했던말 반복하는 주문이 되지 않는 측면에서, 짧게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실제로 써먹을 수 있도록, 간단하게 요약되거나 번호순으로 정리되거나한 “신앙생활 10단계”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의 커리큘럼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커리큘럼이나 방법이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잘짜여진 커리큘럼과 탁월한 방법론은 청년부 운영과 발전에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들이 커리큘럼이나 방법론에 매여있어서, 그만 성경 자체에 눈이 어두워질까 두려운 마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생생한 삶, 그 자체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더더욱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24장입니다. 우리는 10절부터 14절까지 매우 짧은 부분만을 읽었는데, 한번 눈으로 24장을 훑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길죠? 네! 맞습니다. 24장은 창세기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자그만치 67절입니다. 다른 장들은 기껏해야 20절 안팎입니다. 다시말해, 이야기 단위가 20절 정도면 충분히 요약되는 거죠. 그런데, 24장은 정말 다릅니다. 요약해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건의 생생함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단편 소설과 같은 치밀함이 보이는 것이고, 룻기나 에스더서와 같이 기승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24장은 신앙의 커리큘럼이나 방법론은 말하지 않지만, 신앙생활의 살아있는 모습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응답받는 신앙의 비결같은 것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말씀 그대로가 내 삶에 이루어지도록 읽고 또 읽고, 마음에 그리고 또 그려야 합니다. 저는 이 길고도 긴 말씀에서 두가지만을 말하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와 “우리는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가” 이 두가지 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9절에 나오는 ‘환도뼈’의 정체나, 47절에 나오듯이 리브가의 코를 장식으로 꿰는 것과 같은 주변적인 것은 잠시 잊으셔도 좋습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1) 야웨 하나님: 변함없이 신실하신 분
첫째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요약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생생한 삶속에서 늘 함께, 그렇지만 다양하고도 오묘하게 함께하실 뿐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러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창세기 24장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실까요?
무엇보다도 아까 읽은 본문 10-14절에서 시작하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 내용인 즉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임종이 가까워지게 되자, 아브라함은 한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들 이삭이 가나안 여인이 아니라, 고향 사람과 결혼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지금도 그렇지만, 아브라함 당시에도 매우 신성했고 중요했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 가장 믿음직한 아브라함의 충복(엘리에셀)을 메소포타미아 땅으로 보내게 됩니다. 이 엘리에셀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지혜롭고 백전노장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7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위한 신부를 구해오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늙은 종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마치, 기드온의 양털기도와 같습니다. 기드온의 기도는 하나님이 양털을 젖게하시는 물리적인 문제였지만, 늙은 종의 기도는 제3의 여인이 움직여야 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수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TV 착한이웃찾기”를 보게됩니다. 당시에 우물은 우리나라의 우물과는 달랐습니다. 즉,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를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우물은 계단을 딛고 내려가서 떠오는 방식의 우물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채워 올라왔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우물은 계단만 40m가 된다고 할 정도이니, 늙은 종의 기도는 확실히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 주에 KBS에서 방영하는 “착한 이웃찾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고구마를 배달하는데, 그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지까지 왔다가, 이 고구마가 잘못된 고구마라고 해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어떤 아저씨가 성공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늙은 종의 기도는 더 합니다. “나도 마시게 하고, 자발적으로 10마리나 되는 약대에게 물을 마시우겠다고 자원하게 하는 그 여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부인줄 알겠나이다”
여러분들중에서는 24장이 왜 이렇게 긴 이유를 이렇게 추측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 수많은 사람들이 중도실패했던 이야기를 말하기 때문이구나!” “TV 착한이웃찾기”라면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 24장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15절을 읽어봅시다: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7절부터 20절까지 읽어봅시다: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우기를 다하고 가로되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긷는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마치 늙은 종하고 리브가하고 짠 것 같습니다. 특별히, 1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약대를 위해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10마리나 되는 약대가 물을 얼마나 먹겠습니까? 그것들을 배불리 먹이겠다면 도대체 얼마를 먹여야 할까요? 리브가는 몇 번을 왕복해야 했을까요? 성경(15절)은 그녀가 ‘하나의 물동이’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성경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장 1절을 봅시다(아브라함이 나이 많이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땅을 주시고,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로 21장에서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23장에서 아브라함은 드디어 가나안의 영구적인 소유지를 구입하게 됩니다(16-20절). 정말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지키시는 복을 한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이어집니다. “과연, 이 복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의 복은 그 다음 세대에서도 효과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지키셨던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에게도, 그 아들에게도, 그 아들에게도 동일하게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삭에게 다름 아닌 리브가를 주신 것은 생각만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복’이라는 단어가 ‘바라크’(ךרב, brk)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리브가’와 똑같은 스펠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은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기 때문에, 복(brk)과 리브가(rbk)는 단어순서가 바뀐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4장 1절에 아브라함에게 ‘바라크’(복)을 한없이 주셨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그 아들 이삭에게 ‘리브카’를 주신 것입니다(67절).
놀랍게도, 67절이나 되는 긴 본문안에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범사에 복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섬세한 솜씨를 충분히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시대나, 사도 바울의 시대나, 그리고 오늘 여러분의 시대에서도 동일하게,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엡 3:20)”이십니다.
저는 특별히 12절에 여러분의 초점을 모으고자 합니다. 어찌보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늙은 종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소서” 이 말이 무슨 뜻인줄 아십니까? 원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나에게 당신의 헤세드를 만드소서(보여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헤세드’라는 단어는 쉽게 번역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쉽게는 ‘인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창세기 24장 전체를 조용히 묵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헤세드를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04년을 나에게 끊임없이 함께 하시며, 복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신앙이란?
이제, 두 번째 “우리는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수많은 등장인물을 발견합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늙은 종(그와 함께 한 종들-엑스트라), 오버 친철 소녀 리브가와 이후에 악역으로 등장하게 될 라반,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과 마지막으로 외로운 묵상가 이삭까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 합당한 신앙의 자세”를 베우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둘사이에 약속을 할때에는 환도뼈 아래에 손을 넣어야 한다”라든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기면 코를 꿰뚫어야 한다”와 같은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혹은 늙은 종이 기도했던 것처럼, 이 기도를 우리 기도의 모델이라고도 제시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전화를 딱 걸어서 세 번만에 끊겠습니다. 정확히 1분뒤에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와서 ‘나도 너를 좋아해. 우리 사귀자.’라고 할 경우에, 이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사람으로 여기겠나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는 오버 친절 리브가와 같이, “그 누구가 도움을 청한다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도록해라”와 같은 도덕적인 가르침도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본문의 말씀은 아마도 우리 예수님께서 직접하셨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적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할까요?” 저는 간단하게 몇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앙인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12-14절). 기도보다 앞서지 않은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둘째, 신앙인은 사람 살아가는 이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다는 ‘경건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21절). 눈앞에 일어나는 일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더듬어갈 수 있는 영안이 열리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셋째,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저없이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50절).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으며, 단번에 그물을 내려놓은 베드로가 바로 신앙인입니다. 넷째, 신앙인은 기도의 응답에 대하여 찬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26-27절). 영광을 자기가 빼앗지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다섯째, 신앙인은 조급해하지 않으며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63절). 세월이 지날수록 겉모양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말씀의 훈련으로 날마다 내공이 쌓여가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러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특별히 한가지만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늙은 종을 보내며 했던 아브라함의 말이며, 늙은 종이 이 모든 일을 경험하고 나서 했던 놀라운 고백의 말에서 발겨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7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앙철학을 담긴 말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그 사자를 네 앞에서 보내실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너는 하나님 앞에서 걷지 말고, 하나님 뒤에서 걸으라”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다. “내 평생에 남길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 뒤에서 걸으라” 할렐루야!
아브라함의 이 말 처럼, 늙은 종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뒤에서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했습니다(27b절):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이제, 늙은 종의 신앙철학은 보다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자신의 것이 된 것입니다.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40절) 사랑하는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말처럼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이 늙은 종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계셨으며, 평탄한 길까지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귀로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의 레벨 업(level up)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4년 한해를 어떻게 보내실 작정이십니까? 올 한해만큼은 정말로, 하나님 뒤에서 걸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눈앞에 일어나는 일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더듬어갈 수 있는 영안이 열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저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의 응답에 대하여 교만하지 않고 꿇어 엎드려 찬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조급해하지 않으며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묵상의 고수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신앙인이 되시는 2004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생활에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신앙의 세대교체”라고 잡았습니다. 요즘 정치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이 ‘물갈이’입니다. 이제 썩어빠진 정치인들은 물러가야 한다는 자성의 자아비판일 것입니다. 동일하게, 우리 신앙인에게도 ‘물갈이’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속사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오래된 능구렁이 신앙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의 본문은 아이러니하게도 늙은 종을 통해서, 우리 속에 참신한 바람이 불도록 요구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사라지고, 이삭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24장 끝부분에서 이제 가문의 주인은 이삭으로 변했음을 알게 됩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들의 세대교체’가 신선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 위대한 사건속에서 하나님은 더욱 헤세드를 창조해나가시는, 인자와 신실함이 다함이 없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뒤에서 겸손히 따라가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내가 하나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걸으셨다는 놀라운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 1월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결단을 할 여유가 충분합니다. 2004년,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속에서, 신앙의 신선한 세대교체를 이루시는 믿음의 젊은청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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