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24편 7-10절(배경본문: 창세기 14:13-24; 21:22-34)
제목/ 왕의 귀환(아브라함의 사람들[3]-왕들)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말씀에 들어가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왕에 대한 찬송의 노래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이 시에서 문(gate)이 의인화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부터 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비한 영역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안과 밖의 경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문지방을 밟으면 안되는 금기사항이 있었고,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을 나갈 때, 신전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인류학적으로, 사람들은 이 문이라는 것에서 신비한 힘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남긴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상황속에서 진정한 왕이 누구신가를 만민에게 선포하면서, 문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신비하고 금기화된 문까지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놀라운 선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노래합니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다윗왕이 진정한 왕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장면입니다. 진정한 왕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왕의 귀환”이 아닐까요?
저는 오늘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창세기가 보여주는 몇가지 중요한 사건을 가지고 섰습니다. 제목하여, “왕의 귀환”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제목은 엇그제 개봉한 “반지의 제왕”의 부제입니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저는… 물론, 봤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면, 정말로 많은 왕들이 등장합니다. 늙은 왕도 있고, 싸이코같은 섭정왕도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혼령의 왕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왕 중에서, ‘아라곤’이라는 사람이 진정한 왕이 되어서, 징그럽고 혐오감스러운 오크족들을 무찌른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는 여러분들이 직접 보시도록 하시고, 왜 이 내용을 먼저 말씀을 드리냐면, 오늘 우리의 아브라함이 아주 비슷한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사람들이라는 세 번째 주제를 맞이합니다(첫 번째는 롯, 두 번째는 아내 사라). 오늘 설교의 제목은 “왕의 귀환”이고, 부제로는 “아브라함과 왕들”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우리의 배경 본문은 창세기 14장과 21장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주에 봤던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멋진 사나이(할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14장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한 다섯왕은 12년동안 그돌라오멜을 포함한 강대국인 4나라를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13년째가 되자, 갑자기 반역을 꾀하게 되고, 14년째에,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게 됩니다. 그런데, 안좋은 일이 생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었던 아브람의 조카, 롯과 그 가족이 그만 그돌라오멜 왕의 포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훈련된 병사들을 이끌고, 야밤을 틈탄 기습작전을 통해서 적들을 물리치고 롯을 구출합니다. 이후에, 패장인 소돔왕이 나타나 아브람을 영접했는데, 아브람에게서 전리품을 고스란히 전해받는다. 한편, 제사장이자 살렘의 왕인 멜기세덱이 나타나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에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됩니다.
이제 21장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랄이라는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누이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랄에서의 ‘누이사건’이 잘 해결되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은혜로 그랄 땅 주변에서 살게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늘 함께계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으므로, 왕은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그랄왕 아비멜렉은 군대장관과 함께 아브라함을 방문하여 상호평화조약을 세우게 된다. 아비멜렉이 먼저 제시한 것이지요.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했기때문에, 아브라함은 우물과 관련된 언약을 세우고, 그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일곱 마리 암양을 따로 세워서 언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말로 브엘이 우물이고, 세바는 일곱을 뜻합니다. 브엘세바는 일곱 마리 암양의 언약을 통해서 얻은 우물이라는 뜻이되는 겁니다. 이후로 아브라함은 블레셋 땅에서 오랫동안 살게 되는 것입니다.
1) 성경은 자신들의 생생한 삶의 간증이다.
자!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내용상으로는 매우 쉬운 것처럼 보입니다. 간단하게 설교의 대지를 몇가지 뽑을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첫째, 배신하지 말것(배반자에게는 조직의 대가가 따를 것이다). 둘째, 십일조를 잘 낼 것. 셋째, 약속을 끝까지 철저하게 지킬 것. 시간이 남으면, 네 번째, 아브라함처럼 틈틈이 힘을 기르도록 할 것. 어떻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실제로. 오늘 우리가 접하는 본문은 정말로 어려운 말씀들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못 느끼십니까? 우리 한번 본문을 읽어봅시다. 내용은 아니까, 궁금한 점이나 이상한 점을 찾아보면서 한번 읽어봅시다.
어떻습니까? 발견하셨습니까? 힌트를 드리자면 시대착오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전에 신문에서 대장금에 NG가 나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궁에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한쪽 구석에 그만 가스버너가 찍히고 만 것입니다. 그야말로, NG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보는 본문에, 그러한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14장 3절을 읽어봅시다. 여기에서 성경은 ‘곧 지금 염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는 겁니다. 2, 7, 17절에도 똑같이 ‘곧’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이말은 홍길동전을 말해주다가, ‘한양 곧 지금의 서울’과 같은 표현법입니다. 다시말해, 3절에 나와있는 ‘지금’ 사람들에게 창세기는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 창세기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 시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을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후대의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지요.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말씀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또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는 출애굽한 사람들만을 위해서도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후의 신앙인들이 필요에 따라서 조금씩 성경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이 말씀이 자신들의 지금 상황에 너무나 절묘하게 필요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살아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특별히 이 말씀을 사랑했고 수정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조상들의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생한 체험이 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왕들과 관련있는 이 말씀은, 출애굽 시대 이후에, 즉 사사시대 끝에서 다윗의 초기 왕국시대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4장 14절에 나오는 ‘단’이라는 지명 때문입니다. 이 ‘단’이라는 지역은 여호수아 19장 47절에 나와있습니다. 한번 읽어봅시다: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여호수아 전까지는 ‘단’이라는 지명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창세기 21장 32절을 읽어봅시다: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여기에서도 시대착오적인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블레셋’입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족속’은 사울왕시대 전까지는 팔레스틴지역에 등장하지 않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이들은 해양민족으로 사울 왕시대, 즉 초기 왕국시대에 철기문화를 가지고 지중해를 건너와서 팔레스틴 해안에 정착한 민족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조금 어렵게 여기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중에는 “감히 사람이 성경을 뜯어 고쳤다는 말인가!”, 혹은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조금 유식한 분들은 “성경말씀에, ‘일점 일획이라도 고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라고 했건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성경에 대한 오해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죽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살아있는 책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처음 시기엔 필요에 따라서, 고치기도 하고 했다는 겁니다. 단,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었지요. 오늘 지금의 사람들에게 이해되도록 고쳤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오늘 우리 마음대로 성경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창세기 14장과 21장은 아브람시대의 놀라운 일을 말해줍니다. 이 놀라운 일은 출애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그 이후의 신앙공동체에게서도 역시 의미있는 일로 날마다 새로워졌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말씀의 포인트를 잡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2) 무엇이 의미가 있었는가?
자! 여러분. 이제 본문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도록 합시다. 저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 말씀의 무엇이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는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의 무엇이 그들에게 의미가 되었을까요? 그래서, 자신들 시대의 지명까지 써가면서 다시금 기억하고 싶고, 다시금 체험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 오늘 본문의 깊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십일조 내라”같은 거 말구요). 이것을 풀기위해서 우리는 몇가지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누구와 만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14장 13절에 나와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 사람입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을 여러분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히브리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자기가 자기들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외부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칭할 때 사용했던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히브리’라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사회의 주변인, 즉 아웃사이더(outsider)를 일컫는 기분 나쁜 말이었던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히브리’라는 말은 외국인 노예들, 멀리 여행하는 상인들, 심지어는 약탈자를 부를때 사용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그런 outsider, ‘히브리’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는 것입니까? 네! 왕들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지금 ‘히브리인’ 아브라함은 영광의 ‘히브리인’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을 이긴 승리의 영웅으로 지금 우뚝 서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해서 다섯나라가 12년동안 섬겨야했던 5대 강대국을 단번에 무찌르고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300명 정도되는 많지 않은 군사들 만으로 말입니다. 마치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을 완전히 물리쳤던 것처럼, 아브라함도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계속해서,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영접을 받습니다(17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이라는 왕이자 제사장을 만납니다.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이후에 말씀드리기도 합시다. 중요한 것은, ‘히브리인’ 아브라함이 지금 왕들을 만나고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더 놀라운 일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과 함께 아브라함을 만나러 옵니다. 이 둘의 첫만남에서 주도권은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누이사건’으로 인해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위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역전된 것입니다. 21장 22절에, 그랄 왕 아비멜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브라함! 당신은 보통사람이 아니군요. 당신이 무슨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왕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오늘은 영국 블레어 총리를 만나고, 내일은 부시 대통령을 만나고, 모레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동등한 위치에서 말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왕들을 만나서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지난주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왕들을 만나면, 거짓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왕들의 영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소알왕에게서 영접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물질에 아쉬워하지 않는 넉넉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는 다섯왕을 물리친 후, 전리품을 아낌없이 소알왕에게 넘겨줍니다. 아브라함은 쫌생이가 아닌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왕들과 상호평화조약을 맺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랄왕 아비멜렉과 함께 평화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21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약속은 서로가 동등한 상황에서 맺어지는 것이 고대인들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왕이 된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아브라함은 왕들에게서 왕으로서의 접대를 받습니다. 바로, 살렘왕 멜기세덱에게서 아브라함은 왕으로서의 접대를 받게 됩니다. 바로 14장 18절입니다. 이 떡과 포도주는 왕에게 바쳐지는 의미있는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6장 20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왕의 궁에 수금타는 사람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사울 왕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지금 아브라함이 지금 왕으로써 세상의 왕들과 관련맺고 있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후세인처럼 사로잡힌 왕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이 되어서, 블레어 총리에게 아량을 배풀어 전리품을 아낌없이 주고, 부시 대통령이 먼저 제안한 평화조약에 승낙하는 싸인을 남겨주고,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서 멋진 대접을 받았다고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입니다. 바로, “이 말씀의 무엇이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는가?”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저는 오늘 아브라함과 왕들이 만나는 14장과 21장의 말씀을 다윗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본문에 숨어있는 옛지명이 아닌 지금의 지명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단’과 ‘블레셋’의 언급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에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이 말씀의 무엇이 다윗에게 의미가 있었는가?”
아브라함이 ‘히브리’ 사람이듯이, 다윗도 진짜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나쁜 말입니다. 풀어말하면, 다윗은 진짜 약탈자, 깡패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에게서 쫓겨서 집도 밭도 모두 잃은 다윗은 부하들을 이끌고 블레셋에 하수인으로서 깡패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약속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왕으로 우뚝 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이 주변의 작은 도시왕국을 접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삼하 8장). 그는 세계의 우뚝선 왕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수도(서울)의 문제입니다. 예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뿌리깊은 도시는 벧엘과 헤브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생소한 도시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때, 이 도시는 정복되지 않았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예루살렘은 다윗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정복되었습니다(삼하 5:6-7).
바로, 여기에 다윗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영접합니다. 살렘이란, 곧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가나안 사람으로서 제사장이자 왕이라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즉,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하나님을 믿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22절을 읽어볼까요?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그렇습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원어로 ‘엘-엘룐(영어로, El-the highest!)’입니다. 이것은 가나안의 최고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세상의 왕들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No! 엘-엘룐이라는 신이 높은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제일 높은 신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의미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아브라함은 의미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21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신성한 일입니다. 사람들만의 약속이 아니라, 이 속에 신이 증거한다는 신령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의 약속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23절). 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할렐루야!
왜 갑자기 살렘왕 멜기세덱이 등장했을까? 우리는 다윗을 놓고 14장과 21장을 보면, 실마리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가나안에서 제일로 높다는 곳인 예루살렘에 자신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돌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지지기반도 없는 완전히 허허벌판의 새로운 땅인 예루살렘에 그동안 가나안의 ‘엘-엘룐’과 같은 사이비 신의 이름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살아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나안의 가장 높은 곳인 예루살렘에 모셔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진정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것을 선포했던 것처럼, 이 사건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쳐야할 똑같은 선포였으며, 이 사건은 블레셋과 같은 수많은 왕국들이 서로 자신의 힘을 과시할 때 다윗이 외쳐야 했던 똑같은 선포였던 것입니다.
말씀이 생활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우리는 창세기 14장과 21장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왕의 만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이 말씀이 단순히 아브라함과 왕과의 만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즉,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 더 나아가 다윗 왕에게까지 이어지는 생생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왕에게 이 말씀은 지금 살아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왕의 귀환’으로 잡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짜 왕이 드러난다!”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시대에도 세상에는 왕들로 가득 찼었습니다. 또한 다윗 시대에도 세상에는 왕들로 가득 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세상속에서 아브라함을 세상의 뛰어난 왕으로 세워주셨고, 그런 세상속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세상의 으뜸가는 왕으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14장 20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을 우리 손에 붙여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21장 22절에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 왕과 관련해서 진정한 왕의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의 최고로 높은 지형(790m)인 예루살렘에 세상의 진정한 왕의 귀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법궤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 진정한 왕의 귀환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할렐루야!
저는 이 말씀이 크리스마스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왕의 귀환’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구원자, 평화의 왕의 귀환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우리의 가슴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우리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바로 진정한 왕-예수 그리스도의 귀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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