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십일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What Does a Tithe Mean for ‘us’?)
본문: 마 23:23 (주요본문: 민 18:20-32; 신 26:12-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서론
돈없으면 사람구실도 못한다.
여러분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돈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한다.” 그렇습니다. “돈 없으면 사람구실도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과연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돈이라는 것이 생겨나면서부터 시작된 말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에 “돈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영어에서도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Money makes the mare to go.”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입니다. 그러고보니, 동서양 어느 곳에서든지 “돈 없으면 사람 구실 못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성경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잠언 19장 4절에, “제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정말 실감납니다: “부유하면 새로운 친구가 계속 늘어나지만, 가난하면 있던 친구도 떠나고 만다.” 사랑하는 여러분! 친구가 늘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있던 친구도 떠나가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디모데전서의 말씀(6:10)을 가슴속에 외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혹시나 내가 돈 때문에 사람구실 못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근심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지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좀 더 솔직해지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의 영역을 단지 머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 생활에까지 깊이 확장시키자는 겁니다.
그동안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헌금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단연 십일조생활일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 어떤 분들은 “왜 십일조에 대한 설교냐?”하고 의아해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십일조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너무나 이기적이었다”라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2년전, 그러니까 2002년 7월(2일)에 국민일보는 십일조에 대한 다음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건강교회운동본부에서 네티즌 2,66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십일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응답자 중 74%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동일합니까? 만약 동일하다면,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100% 맞지는 않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야말로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너무나 이기적이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십일조를 “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향해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드리는 신앙고백이다”라고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이런 생각만으로 지금까지 십일조를 드려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런 생각만으로 십일조를 드려온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에서 보다 더 온전한 십일조의 모습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기적이지 않은 십일조, 즉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드려지는 십일조”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위해서 3가지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가지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보다 성숙한 신앙의 본질을 맞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 이곳 저곳을 찾아보며 몰랐던 부분을 깨닫는 기쁨도 얻을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실제적인 적용부분에 있어서 조금 심각한 고민으로 잠못 이루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첫 번째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봅시다.
본론
1)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왜 하라고 하셨을까(십일조는 ‘그들’에게 무엇이었나)?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왜 하라고 하셨을까?”입니다. 저는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일조하면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십일조’(창 14:20)나 ‘야곱의 십일조’(창 28:22)의 말씀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일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명령하시는 말씀이 분명히 나와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십일조, 다시말해 그들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명령하신 이유를 먼저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목적도 없이, ‘단순히 성경에서 신앙인들이 그렇게 했으니까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한다’라는 식의 태도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렇지않고, 성경에 기록된 신앙인들의 모든 행동들까지도 절대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무엘 예언자가 ‘기도하지 않은 것이 죄’라고 했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가슴을 치는 모습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사도행전 4장의 바나바가 ‘자신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에게 모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소유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정리하자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과 ‘신앙인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찾아볼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맞는 말씀을 함께 찾아 읽어보도록 합시다. 말씀은 민수기 18장 20-32절 입니다. 우리 함께 읽으면서, 과연 십일조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가를 발견해보도록 합시다.
20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21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23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2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6“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27내가 너희의 거제물을 타작 마당에서 받드는 곡물과 포도즙 틀에서 받드는 즙 같이 여기리니, 28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29너희의 받은 모든 예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30이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그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드리고 남은 것은 너희 레위인에게는 타작 마당의 소출과 포도즙 틀의 소출 같이 되리니, 31너희와 너희 권속이 어디서든지 이것을 먹을 수 있음은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임이니라. 32너희가 그중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드린즉, 이로 인하여 죄를 지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십일조 생활을 하라!”고 했다는 겁니까?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을 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라”와 같은 것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믿음의 관계를 확증하기 위해서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십일조를 내라”와 같은 말씀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명령하신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 바로 21절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모두 주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20절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받은 땅도 없고, 생존을 위해서 분배받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레위인들은 성전의 일을 감당하는 것만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에게 드려진 모든 십일조를 하나님 자신의 분깃인 레위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26절과 28절에보면, 제사장 아론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받는다고 나와있습니다. 즉, 백성들의 십일조를 레위인들이 받고,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중에서 십일조를 아론 자손이 받는다는 겁니다. 레위인들중에서도 특별히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실제적인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레위인과 아론의 자손들이 받는 이 십일조가 31절에서와 같이 그들의 ‘보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건 좀 어려운 내용일 수 있지만) 사실 이 민수기의 십일조 명령은 썩 좋은 장면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이 받게될 십일조(와 ‘소금언약’과 같은 ‘영영한 응식’(8,19절))를 말하고 있는 민수기 18장 바로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레위인들은 그들 가운데에서 아론자손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16장에서 레위 지파의 자손중에서 고라 자손과 르우벤 지파 중에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모두 불에 타 죽은 처참한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지파들이 내놓은 12개의 지팡이들중에서 아론의 지팡이를 선택하심으로써 레위인들의 특별한 성별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라는 것이 레위인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는 매우 추악한 일들이 벌어졌었다는 겁니다. 다시말하면, 십일조가 명령된 이유는, 백성들이 레위지파와 제사장 아론을 시기하고 질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십일조를 통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안에서 영원한 공동체임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공동체를 위한 실제적인 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왜 하라고 하셨을까요?” 성전의 일을 감당하기 때문에 어떤 소득도 얻지 못하는 레위인들에게 주기 위함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두 번째 질문으로 들어가보도록 합시다. 이것은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질문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십일조를 어떻게 바꾸어주셨나(하나된 공동체에서의 십일조)?
그렇습니다. 우리의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이 십일조를 어떻게 바꾸어주셨나?”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점’(dot)으로 발견하면 역시나 매우 위험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말씀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점이 몇 개 있으면 거기에서 ‘직선’(line)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에 따라서 점차로 변화되어지는 것을 지혜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십일조가 좋은 예입니다. 사실 십일조가 처음으로 명령되고 있는 레위기 27장 30-33절에는 식물과 동물을 직접 바치는 것이었는데, 신명기 14장 24-27절에 이르면 부득이한 경우 돈으로 바꿀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십일조의 내용이 아닙니다. “누가 십일조를 받게 되느냐?” 바로 이것이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의 두 번째 말씀을 찾아볼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맞는 말씀을 함께 찾아 읽어보도록 합시다. 말씀은 신명기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신명기 12장 11-12절과 26장 12-15절입니다. 우리 함께 읽으면서, 과연 십일조가 어떠한 변화를 보여주는지를 발견해보도록 합시다.
11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2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13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14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15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어떻습니까? 십일조에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까? 십일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변화된 것입니다. 레위인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졌던 내용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일조라는 것이 아무렇게나 되었구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십일조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약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명기 12장 12절의 모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한자리에 모여서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노예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이 한자리에서 ‘함께!’ 십일조를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모습말입니다.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여러분이 노예와 성중의 레위인들을 초청해서 함께 십일조를 먹는 모습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만약 우리가 실제로 그런 일을 한다면, 정말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아따 듣도 보도 못한 그들하고 같이 먹으라고? 아따 참말로, 우리 하나님이 괜한 일을 시키시고 그러시네잉~ 아따 거시기 쪼께 껄쩍지근하구만~’이라고 하지는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자리는 그렇게 편안한 자리는 분명히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분명히 명령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성중의 레위인들과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앞에서 즐거워해라!”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의 명령을 변화시키면서, 십일조의 보다 분명한 의미를 명확히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는, 이것과 저것을 탄탄하게 붙여주는 돼지표 본드처럼, 나와 하나님 사이를 탄탄하게 이어주는 신앙고백용 본드가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안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의 즐거움을 통해 신앙을 배우게된다”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명기 26장의 말씀에서 십일조를 확신하게 됩니다.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매년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온가족과 노예와 레위인이 함께 먹는 거룩한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삼년에 한번씩만큼은 십일조를 경제권이 박탈된 공동체의 약자들에게 모두 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시 상상을 해 보십시오. 삼년에 한번씩 생겨나는 십일조가 아무런 능력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주어져서 그들로 배부르게 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운 점은 12절의 ‘네 성문안에서’입니다. 이 말은, ‘십일조를 가난하고 능력없는 그들에게 줘버려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것 가지고 가시오!’가 아니라는 겁니다. ‘네 성문안에서’라는 말은, ‘그들을 정말로 포용하는 수준에서의 십일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3-15절의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제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약자들을 돌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나이다. 이제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내리소서.” 이 말은 ‘내가 할일 다 했으니, 이제 복주소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의 대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섬기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주셨군요!”라는 참된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말라기 말씀에 십일조가 강조된 이유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가 서로 섬기지 못했다는 점에, 그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의 약자인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섬기지 못하니까, 벌어먹고 살 것을 위해서 성전의 임무를 자연히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며, 심지어 성전을 떠나가는 레위인들도 생겨날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라기 1-2장에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꾸중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의 십일조 말씀 역시,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점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직선으로 이어보면, 이제 우리는 십일조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일조는 공동체를 온전하게 묶어주는 노끈이다”라는 진리입니다. 내가 십일조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 공동체의 약자들이 보호를 받게 될 때에, 하늘에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놀라운 신앙의 비밀이 바로 십일조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주제말씀으로 읽은 마태복음의 의미인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세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공동번역)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누가복음(11:42)에도 나와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누가는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태복음에서는 누가복음에는 없는 ‘자비’라는 말을 하나 더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에서 마태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처럼 똑같이 중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 ‘자비’, 즉 이웃사랑과 ‘신의’, 즉 하나님 사랑은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태는 신앙이라는 것이 공동체에 대한 사랑없는 것은 외식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조금만 더 말씀드리면, 누가복음에서도 역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이 말은 예수님이 아닌 어떤 율법사의 입으로 나온 말이었습니다(10:25-28). 그러나, 마태는 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에게 ‘하나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고, 이웃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사실, 마태복음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자’는 선교를 통해서 핍박받은 사람들일 수 있지만,2) 실제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그 당시만을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자’라는 것이 수백리 떨어진 곳에서 천국확장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우리 공동체 내에서 아무것도 할 수조차 없는, 말 그대로의 약자를 가리키는 것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십일조가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방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잠시만 반성해봅시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를 했었나? 혹시 나야말로, 하나님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하실만한 이기적인 십일조를 했던 것이 아니었나?” 이제 우리는 마지막 질문을 통해서, 보다 실제적인 우리의 삶올 나아가 보도록 합시다.
3) 이제, 십일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 번째 질문은 “십일조라는 명령이 주어진지 수천년이나 지난 오늘, 2004년의 동부침례교회의 공동체인 우리들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단지 설교만 듣고 귀만 즐겁게 되는 지적 교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 질문은 그동안 우리의 신앙이 가지고 있었는 이기적인 가면을 벗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동안 ‘나만 잘되면 만사 오케이’라는 저급의 신앙에서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라는 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를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공동체를 정말로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라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공동체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완성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했던 수많은 편지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신앙의 성숙만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은 의도는, 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참 가족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로마서를 쓴 이유는 구원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위함이 아니라, 9장과 15장에서 잘 나와있듯이 “서로 갈등하는 헬라인과 유대인들이 구원받은 공동체가 되어서 강한자가 마땅히 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써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역시 가족인 교회에서의 분열이라는 문제를 고쳐주기 위한 편지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은 감미로운 사랑의 세레나데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지 못한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애끓은 절규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히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배설물로 여긴 것은, 예수님이 겸손하셨던 것처럼(2:5-11) 바울 자신도 겸손함을 보여주어,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에 있는 것이며(4:2), 결국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하도록 권하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2:14).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우리에게 다시금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져다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개인적인, 그래서 이기적인 신앙의 패턴을 고집해 왔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왜 제가 서두에서 “우리들의 십일조가 이기적이었다”라고 평가했던 이유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시간 솔직한 마음으로 한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십일조를 드림에 있어서 ‘우리 공동체의 약자들’에 대한 배려없는 것이라면, 그 십일조는 헛된 것이라는 겁니다. 반대로, 이것은 우리의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잊지 맙시다. 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하지 못하는 교회는 교회일 뿐 가족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의 십일조가 제사장들의 필요를 채워주었던 것과 같이, 사실 여러분의 헌금은 교역자분들에게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십일조를 통해서 제사장을 도왔다고 자랑하지 않으며, 제사장을 깔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돈에는 힘이 있어서, 사람을 휘어잡는 마력이 있습니다. 혹시 ‘내가 드린 십일조나 헌금으로 인해서 교역자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한번이라도 생겼었다면, 하나님께 회개해야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듯이, 우리들이 드린 모든 헌물은 하나님께로 드려지는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으로 그의 일을 하는 교역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한가지만 더 말씀 드리기 원합니다. 이번 한달 동안 담임목사님께서는 안식월이라는 이름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안식년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목회자에게 가장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안식년입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책이 있는데, 이렇게 놀라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안식년에 있었다고 그 책의 저자는 고백합니다. 목회자가 안식년이 필요없다고 우길지라도,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안식년을 주어서 억지로라도 안식하며 재충전시켜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0년이 훨씬 넘는 우리 교회에서 담임목사님께서 안식년을 통해서 재충전받지 못했다라는 사실에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십일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목사님의 안식년이 나온 이유는 바로, 우리들중에 약자가 바로 목회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십일조’라는 것은 성경이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사회적인 제도였습니다.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십일조였고(삼상 8:15; 참조 창 14:20), 종교적으로도 우상을 숭배하는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십일조였었습니다(암 4:4). 이렇게 사회적인 제도였던 십일조를 간단히 요약하면, ‘약육강식(弱肉强食)’입니다. 즉, 예부터 십일조는 강한자에게 바쳐지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지배원리를 대표하는 삶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십일조라는 것을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한 도구로 바꾸어주십니다. 바로, 약자를 위한 ‘강육약식(强肉弱食)’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강한자가 고기가 되고, 약한자가 먹는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조금 강한 내가 조금 약한 다른 형제․자매를 도와준다고해도 나의 삶에 그 어떤 궁핍함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야.” 이것이 바로 사르밧과부와 엘리야 예언자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신앙의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 살기 위해서 우리 형제․자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나를 묶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를 묶어주는 신비로운 신앙의 실천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십일조’는 그 한계를 넘어버렸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신약에 와서 ‘십에 이조’, ‘십에 오조’, ‘십에 십조’로 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두에 말씀드린대로, 초대 교회는 강한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 위해서(롬 15:1), 바나바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진정한 한가족으로의 삶을 위해, ‘십에 십조’까지도 아낌없이 드렸던 것입니다(행 4:32-35). 정말로 그들은 하나님안에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사회와 시장경제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성경을 오해했던 것처럼 사유재산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는 사도행전의 교회와 똑같이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시장경제사회’를 뛰어넘어서 ‘천국경제사회’로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천국경제사회’란, 자본의 투자를 통해서 자신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공동체인 한 몸, 즉 교회를 위해 실천하는 작은 손길이 가득한 사회를 말합니다. ‘천국경제사회’란, 돈이 없어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사람 구실 못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십일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우리’라는 말에 감격하는 신앙인들이 됩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여름휴가가 나만을 위한 휴가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휴가가 될 수 있도록 작은 나눔의 실천이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1) Robert H. Gundry, Matthew: A Commentary on His Handbook for a Mixed Church under Persecution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1994), 463-4.
2) Ibid., 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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