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강해(6)
본문: 렘 2:1-3
제목: 사랑과 배신의 전주곡-“기억한다. 기억하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그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씀에 들어가며
훌륭한 요리사의 최고 조건은 무엇보다도 ‘맛’을 잘 내는데 있을 것입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기고 목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맛’이 없다면, 그 요리사는 훌륭하다고 평가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요리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맛’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훌륭한 요리사들이 ‘맛’을 내는 기본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것입니다. 요리사란 ‘맛’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화학조미료에 의해서 쉽게 맛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요리사는 ‘맛’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재료’가 무슨 맛을 가지고 있는가를 남들보다 섬세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재료’ 자체의 맛 그대로를 손님의 혀끝까지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우리는 모두 요리사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우리의 영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재료’ 자체의 맛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영적인 센스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많이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성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은 ‘시’라는 형식을 빌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의 전통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시편은 ‘시’를 읽는 방법대로 읽어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와 같은 서신서는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서신서는 ‘편지’를 읽는 방법대로 읽어야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송대관의 ‘네박자’를 트로트로 불러야지,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힙합으로 부르면, 그 고유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서를 설교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즉, 예레미야서는 예언서입니다. 우리는 전문적인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읽을 수 있고, ‘편지’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이라는 형식은 우리에게는 참 생소합니다. 그래서, 유독 예언서를 읽으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언’이라는 말을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해서, 예언서를 읽으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수도 있습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언’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서적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예언’의 정의는 ‘여호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아, 전달받은 말씀을 대언(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읽었던 예레미야 1장 7절이 ‘예언’의 좋은 정의입니다(2장 2절은 히브리어로 ‘가라 그리고 외쳐라’로 시작한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사실, 이사야를 비롯해서 모든 예언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전달받은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편지는 인사말, 본말, 맺음말이라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사말만을 읽고 편지를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우리는 본말에서 집중을 해서 읽게 됩니다. 이렇게 편지를 읽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서’를 읽는 방법은 조금 까다롭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두 개의 세계를 대상으로 놓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청자’)의 세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모아서 기록한 ‘예레미야서’를 읽었던 사람들(‘독자’)의 세계가 있습니다.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던 예레미야 1장 1-3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당시의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미친 소리’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이라”라고 폄하했었지요.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이 정말로 성취가 되자, 후대의 사람들이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었도다!”라고 깨닫게 되었고, 참된 신앙의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 그 예언들을 기억해내서 기록한 것이 바로 ‘예레미야서’인 것입니다. 결국, 예언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과 그 예언을 기억해내서 기록하기까지 30여년의 시간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많은 말을 했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고백하고 전수하기 위해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선택하고 특별한 주제로 묶어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 손에 주어진 ‘예레미야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독자’의 입장에서 예레미야서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동시에 ‘청자’의 입장에서 예레미야 당시의 실제적인 예언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서가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긴 예레미야서가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는 차분히 그리고 정직하게 예레미야서를 읽어 나가면서, 예언의 신비를 느끼고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 삶에 역사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의 편집자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크게 몇 가지의 주제로 묶었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2장 1절부터 6장 30절까지입니다. 이러한 묶음을 아는 좋은 방법은, 작은 제목을 발견하는 겁니다. 예레미야서의 작은 제목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라는 문장입니다. 1장 2-3절의 신앙고백(1장 1절처럼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도다!)이 예언을 묶었던 실제적 키워드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1:4,11; 2:1; 7:1; 11:1; 14:1; 18:1에서 후대 편집자들의 신앙고백을 발견하게 됩니다.1)
이제 저는 몇 시간에 걸쳐서 예레미야서의 첫 번째 예언묶음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함께 읽고 묵상하며 고민하고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예언이라는 특유한 맛을 경험하도록 합시다. 혹 여러분들은 ‘이렇게까지 어렵게 성서를 읽어야만 하는 걸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일반적인 대중예배 시간에는 어려운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새벽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은 보다 단단한 음식으로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우리는 물고기를 먹는 방법을 배우는 수준을 넘어, 물고기를 잡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단 시간을 내셔서 2장부터 6장까지 전체적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장부터 6장까지의 큰 내용은 ‘사랑과 배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배신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재앙이라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주제 아래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떻게 도전하며, 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실제적으로 가르치는지를 듣고 반응하는 것이 저의 설교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서론이 참 길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진행해야할 부분을 생각한다면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아무쪼록 2장부터 6장까지 몇 번이고 꼼꼼히 읽고 또 읽으면서, 과연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랑과 배신’의 전주곡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2장 1-3절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2장에서 소명 이후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외치게 됩니다. 그 외침의 시작은 말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말씀의 주인은 예레미야가 아닙니다. 말씀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지만,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바울 사도에게서 실제적으로 발견합니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우리가 완전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신앙고백을 말하고 있습니다(갈 2:16-21).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더욱 깊은 영적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도 살아있는 이유가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심장을 이식받아서 생명을 얻게 된 우리가 날마다 거울 앞에서 감사해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 예수님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말씀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레미야가 받아서 대언한 여호와의 말씀이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 소년의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전한 최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깊은 생각이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말 성서는 히브리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잘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말의 순서와 히브리어의 순서는 반대입니다. 우리말은 중요한 단어를 가운데에 놓지만(나는 자장면을 먹었다), 히브리어는 중요한 단어가 앞에 나오게 됩니다. 히브리어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억난다.” 그리고 우리말은 밋밋한 한 문장으로 되어있지만, 히브리어는 감정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한편의 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무엇보다도 잘 표현될 수 있도록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옮겨보겠습니다:
기억난다. 너의 젊은 날의 순정을
약혼시절의 너의 사랑을
그땐 풀 한포기 없는 광야에서 나를 따랐었지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 최고의 열매로 구별되었었지
누구라도 먹는 날에는 죄를 면치 못하고 재앙을 당하고야 말았었지
여호와의 말씀이다.
바로 이것이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처음으로 백성 앞에서 선포되었던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상심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빛바랜 흑백결혼 사진을 앞에 두고, 날 떠나 가버린 신부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서에는 2절에 ‘네 소년 때’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 이 단어를 포함해서 ‘네 결혼’과 같은 단어는 여성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신부로써 살았다는 말입니다. 바로, 본문은 출애굽의 시절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집도 없고 먹을 풀도 없었던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만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귀한 열매였기 때문에, 아말렉과 같은 힘센 나라가 덤벼든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신혼의 기쁨’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출애굽이 있은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기에서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는 분으로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않는 분’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무엇보다도 ‘기억하시는’ 분으로 나타내 보이십니다. 사실, 성서에서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으로 여러 번 소개됩니다. 무엇보다 노아의 홍수를 말하고 있는 창세기 6-9장까지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8장 1절의 ‘권념하사’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예레미야 2장 2절의 ‘기억하노라’와 같은 히브리어(자카르)를 쓰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출애굽의 시작을 알리는 출애굽기 2장 24절에서도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으로 나오는데, 역시 예레미야 2장 2절의 ‘기억하노라’와 같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기억하다’라는 말은, ‘그동안 잊고 있었다’라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 어디에서건 ‘기억하다’라는 말이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엔,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동이 반드시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동, 즉 ‘구원의 역사가 이제 곧 시작될 것’이라는 신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구체적인 행동,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예레미야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기존의 신앙체계를 완전히 흔들어 놓는, 말 그대로 ‘새로운 역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이 삶속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2장 1-3절의 짧은 본문에서 2-6장까지의 커다란 묶음의 머리말 부분을 읽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내가 기억한다’라는 회상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했던 이스라엘의 첫사랑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여기셨고, 또 그렇게 특별하게 대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결혼했다고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반대로, 2장 4절 이후에 잘 나타나있듯이, 지금의 이스라엘이 상황이 어떠한가를 역설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첫사랑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기억한다’라는 하나님의 슬픔의 표현입니다.
진리는 단순하며 그 표현 역시 간단합니다. 저는 예레미야에게 주신 선포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자 합니다: ‘내가 기억한다. 너는 기억하니?’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적같은 일을 기억하면 가슴 뭉클하면서도, 십자가 구원이라는 진정한 기적을 기억하면 아무런 감정이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지금 속삭이십니다. ‘내가 기억한다. 너는 기억하니?’ 사랑하는 여러분, 소중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사순절, 십자가의 기억이 선명해지는 시간이 됩시다.
1) MT보다 이른 본문인 LXX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라는 도입문이 생략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MT 편집자들의 신앙구조를 명확히 보여주는 좋은 도구임이 반증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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