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강해(8)
본문: 렘 2:14-19
제목: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치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개역개정)
말씀에 들어가며
지난 시간에 우리는 렘 2:4-13을 읽으면서 “법정에 선 삼대(三代)”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재판관이 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법정에 세운 모습이었습니다(9절). 특별히,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할아버지-아버지-손자 이렇게 3대로 나누면서, ‘이들 모두가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선포했지요. 그러면서, 재판을 정리하기를 13절의 말씀과 같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생수의 근원되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이며, 두 번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 번째, 즉 여호와를 버린 것에 대해서 4-13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은 다름 아닌 ‘바알’을 섬기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5[허탄한, 헛되이], 8, 11[무익한]절-이는 발음(‘헤벨’)이 ‘바알’과 유사하다!).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이라는 거짓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큼 잘못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번째 잘못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무엇을 잘못했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특별히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 경우에,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못했다는 말을 듣게 되면, 10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뭘 잘못했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상황은 180° 바뀝니다. 무언가 억울한 기분도 들고,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감싸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적잖이 실망하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서의 상당 부분은 ‘누가 무엇을 잘못했다’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누가’가 2500년 전이나 멀리 떨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다’라고 성서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성서는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25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 손에 들어온 여호와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정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하시기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아예 이런 말씀 자체를 기록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싹 죽여 없애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서는 정반대의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렘 20:9). 다시 말해서 정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죄함을 통해서 범죄한 이스라엘이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으로 본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21세기의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말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케 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섬세한 경고의 메시지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이제 우리가 읽은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간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제일 마지막 절에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9절):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난 시간에 읽었던 13절의 말씀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여호와를 버림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그렇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범죄한 두 번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다시 말하면, 지금 이스라엘이 물을 마시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고 앗수르로 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 애굽과 앗수르라는 나라의 물을 마시려고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니겠죠. 17절과 연관 지어보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일단 앞부분만 보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길을 버리고, 애굽과 앗수르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매우 단순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애굽과 앗수르가 더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5절의 어린 사자는 진짜 사자가 아니라, 앗수르를 뜻합니다. 그리고 16절의 놉과 다바네스는 애굽의 주요 도시를 말합니다. 결국 15-16절은 동쪽으로는 앗수르라는 강대국, 그리고 서쪽에서는 애굽이라는 강대국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를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린 사자들이 ... 땅을 황폐하게 했고, 성읍들이 불타서 주민이 없게 했고,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머리)에 상처를 주었도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국에 끼여서 끽 소리도 못내고 흠씬 두들겨 맞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글자로 기록되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15-16절을 사진으로 보시게 된다면, 끔찍해서 두 눈을 가릴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사자들이 힘없는 가축들을 뼈다귀만 남겨놓고 잡아먹는 것처럼, 강대국이 엄청난 군사들을 이끌고 논과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집을 싸그리 무너뜨리고,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조리 노예로 잡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끔찍할 정도로 놀랍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신다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지구 역사에 어디에나 있었던 일들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강대국이 약소국을 마음대로 짓밟고 약탈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 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이러한 일은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그리 특별한 사건은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당연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닥쳐진 환란은 자신이 약소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대국의 그늘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닥쳐진 환란은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버렸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17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엄밀하게 역사적으로 따져본다면 이스라엘은 그 시작부터 약소국이었습니다. 어느 시절에도 주변의 강대국의 영향력을 벗어났던 적이 없던 철저하게 작은 나라였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쳐놓은 정도의 나라가 힘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따랐던 신앙인들은 단 한번도 자신들이 약소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여호와의 길을 따르는 나라를 만들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찼기 때문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고, 똑같은 공기를 마신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자신이 여호와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철저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주변의 나라들과 다른 유일한 차이점이었습니다(신 7:6-9):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은 사람들이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만을 의지하며, 그 분의 뜻을 따라서 걸어가는 모습이 바로 믿음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었습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이 믿음을 선택했고(출 14:13),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이 믿음을 선택했으며(삼상 17:45), 히스기야왕이 185,000명이나되는 엄청난 앗수르 군대 앞에서 바로 이 믿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왕하 19:14-19,35). 누가 보더라도 이스라엘은 약소국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여호와의 길을 걷고 있다고 확신했던 믿음의 사람들은 단 한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강대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시대에 와서 이 믿음은 사라지고 맙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약소국이라고 생각하고 주변의 나라들을 강대국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21세기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미국이 강대국이고 대한민국이 약소국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약소국과 강대국은 신의 서열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약소국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신이 열등하고, 주변 나라의 신이 위대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애굽과 앗수르의 신보다 약하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길을 버립니다. 대신 애굽과 앗수르의 길을 선택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 사라지고(그 믿음이 사라지고!), 애굽과 앗수르의 신들의 법이 이스라엘을 지배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실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왕 중에 아하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아하스 왕이 다스릴 때 앗수르가 쳐들어오게 됩니다. 다급해진 아하스는 예언자 이사야에게 도움을 청하지요(사 7-8장).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사야는 선포했지만, 아하스는 믿음을 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고, 앗수르가 믿는 신을 섬기는 제사법을 예루살렘 성전안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왕하 16:10-16). 이렇게 이방나라의 길을 선택했다는 말은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변화였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대로가 아니라, 세상의 법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합니다(14절): “이스라엘아! 너희가 종이더냐? 아니지 않더냐! 너희는 내가 출애굽을 통해서 자유케하지 않았느냐! 그 때 너희가 강대국이었더냐? 너희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 여호와가 너희를 대신해서 싸우지 않았었느냐?(출 14:14) 이스라엘아! 너희가 태어나면서부터 종으로 태어났느냐? 아니지 않더냐! 너희는 내가 자유자로 이 땅을 선물로 주지 않았었느냐! 너희가 비록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더라도 내가 너희를 능력의 손으로 인도하지 않았었느냐!(신 7:6-8) 이스라엘아! 왜 애굽과 앗수르의 종이 되어버렸느냐?” 그 이유를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팠기 때문이다(13절). 그리고 이스라엘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기 때문이다(19절). 우리는 다음 시간에 이 두가지 악이 실제로 어떻게 이스라엘에서 나타나게 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애굽과 앗수르라는 강대국을 모방하는 것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지를 자세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오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애굽과 앗수르를 두려워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19절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고통은 자신들이 약소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길을 버리고 그 분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다시 한번 가슴에 깊이 새기도록 합시다.
말씀이 삶속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나의 삶에 접목해 봅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다시금 죄의 종이 되어버리는 바울의 개인적인 고뇌를 생각하게 됩니다(롬 7:23).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과연 누가 길을 바꿀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섬기는 법을 버리고, 애굽과 앗수르의 법을 받아들였던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저 시골의 할아버지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가난한 장사꾼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평범한 도시민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스라엘의 위정자들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아하스 왕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그렇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원칙을 버리고, 세상의 원칙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특별히 공격했던 대상이 위정자라는 사실은 이후에 지속적으로 밝혀집니다. 저는 특별히 위정자에게 필요한 것이 1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외는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위정자는 백성들보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이 나라의 일꾼들을 뽑았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면, 바로 ‘국민들을 두려워해야겠다’라는 깨달음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걸음 진보된 정치의식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위정자들이 국민들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위정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에 어찌보면 일반 시민인 우리에게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큰 원리에서 보면 이 말씀 역시 오늘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법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사이에서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법은 정말로 독특합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세상의 것과 정말 다릅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전쟁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삼하 17:47).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돈과 땅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서는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레 25:23).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으며,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마 5:3-10). 정말로 하나님의 법칙은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물이 많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만큼은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막 10:23). 그렇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법칙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면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독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세상 사람이 볼 때 독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믿음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만을 기억하며 삽시다: ‘나는 돈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보잘것없이 작은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갈 때 나는 작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위대하신 창조주의 어깨 위에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Preaching > [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명자여! 일어나라! (렘 12:5) (0) | 2006.07.31 |
---|---|
다윗의 열매(요 15:4-10; 삼상 17:47) (0) | 2006.07.05 |
[예레미야설교-07] 법정에선 삼대 (0) | 2006.05.15 |
놀라운 기도(마 6:9-13) (0) | 2006.03.10 |
[예레미야설교-06] 사랑과 배신의 전주곡 (0) | 2006.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