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中毒)에서 중생(中生)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독이다. 중독(中毒)이란, 한자어 그대로 가운데 ‘중’(中)에 독약 ‘독’(毒)을 쓴다. 말 그대로 ‘독약과 같이 해로운 것을 항상 붙이고 사는 것’을 말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것에 완전히 빠져버려서 그것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상태, 다시 말해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중독 중에서도 ‘도박중독’이 요즈음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린 아이들에서부터 성인들까지 도박중독이 뿌리 깊이 내려있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 그 정도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된다. 초등학교 앞의 동네 문방구 마다 어른들의 도박을 흉내 낸 뽑기 같은 것이 넘쳐난다고 한다. 그리고 어디를 가 봐도 눈앞에는 바다이야기와 스크린 경마장과 같은 사행성 도박장이 판을 친다. 얼마 전 KBS 9시 뉴스에서 전국적으로 사행성 도박장이 넘쳐나고 있다는 보도를 했는데, 놀랍게도 우리 수원 북문을 배경으로 잡고 있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도박중독이라는 국가적인 질병 앞에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시기임에 분명하다.
얼마 전 한 가정이 도박중독으로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가정은 남편이 공무원으로 안정적이며 나름대로 미래가 보장되었다고 생각될 법도 했다. 그런데 더욱 잘살아 보겠다고 아내와 함께 새벽마다 신문까지 배달하면서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살았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사행성 도박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아내도 모른 상태에서 가진 재산을 모두 날려버리게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아내는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고, 술에 취한 남편은 그 날 아내를 살해했다. 살해한 아내를 고속도로에 버려두고, 이 남편은 어느 깊은 휴양림에 한 달간 숨어 살다가 잡혔다. 정말 소름끼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중독이라는 것에 어느 누구도 호언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도박을 일종의 ‘내기’와 같이 생각한다면, 도박중독증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성서에 나온다. 바로 삼손이다. 사사기 13장부터 16장까지 삼손이 등장하는데, 특별히 14장에 보면, 삼손은 자신이 죽인 사자의 시체 속에 꿀벌이 벌집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고서 이것을 가지고 수수께끼를 낸다. 놀라운 점은 수수께끼를 내면서 속옷 30벌, 겉옷 30벌 총 60벌의 의복을 걸었다는 점이다. 말이 60벌이지, 고대사회에서 옷 한 벌은 그 사람의 실제적인 소유물 전체를 의미할 정도로 고가품이다. 그래서 신 24:13에서는 아무리 빚을 많이 져서 담보물로 빼앗겼다 해도 옷만큼은 해질 때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17절도 그러한 맥락이다. 한편 17:10을 통해서 옷은 일종의 연봉과도 같은 가치를 매길 수 있다). 사실, 수수께끼라는 것은 고대사회의 결혼 문화에서 항상 있었던 풍습이었다. 왜냐하면 서로 생소한 가문이 결합되는 엄격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행여나 상대방 가문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수수께끼라는 일종의 긴장풀이용 문화가 성생했던 것이다.1) 이 수수께끼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풀 수 있는 ‘사랑’과 같은 주제로 묻게 되는데, 삼손은 자신이 죽인 사자에게서 벌꿀이 생긴 아주 개인적인 것으로 수수께끼를 내고 말았다. 한마디로 삼손은 당시의 결혼 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결국 아무도 맞출 수 없었던 수수께끼였기 때문에,2) 사람들은 신부의 가족을 위협해서 해답을 알게 되고, 그 결과는 삼손이 옷 60벌을 물어주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서 굳이 말한다면, 중독이 사회질서를 파괴하며, 결국 삼손 자신의 일생까지 파괴하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사사기를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
사실 성서에는 ‘중독’이라는 현대적 의학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자세하게 성서를 읽다보면 우리에게 신앙적 통찰력을 주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 한 구절이 디모데전서 3장 8절에 나온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서 ‘술에 인박이다’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쉽게 ‘알콜중독’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그렇다. 우리말로 ‘인박이다’라는 모호한 표현이지만, 원어는 아주 딱 떨어지는 실감나는 뜻이다. προσεχω('프로세코')라는 말로, 이 말은 προς('프로스': 곁에, beside)와 χεω('케오': 가지다, keep)를 합친 말이다.3) 쉽게 말하면, ‘인박이다’라는 원뜻은 ‘항상 곁에 두는 것’이다. 따라서 딤전 3:8의 말씀을 통해서 집사들은 ‘술을 항상 곁에 두는, 일종의 알콜중독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임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성서가 표현하고 있는 ‘중독’의 개념이 참 맞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항상 곁에 두어야 하는 것’이야 말로 중독(中毒)의 참 뜻이 아닐까? 청년들과 ‘중독’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보면서, 모두가 한번쯤은 중독되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인터넷 중독, 게임 중독, 쇼핑 중독, 먹기를 좋아하는 중독, 드라마 중독 등 다양한 중독 경험이 지적되었다. 혹시 나에게도 건전하지 못한 중독은 없는지 돌아봐야 하겠다.
이제 우리는 중독(中毒), 즉 우리 가운데 독을 항상 곁에 두는 것에서 벗어나서, ‘중생’으로 변화해야겠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생은 우리가 예수를 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는 구원의 과정(거듭남, 重生)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독의 반대말로, 중생(中生), 즉 우리 가운데 생명을 항상 곁에 두는 건강한 삶이다. 그렇다면 혹시 성서에서 중생의 삶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3개의 구절을 찾아볼 것인데, 처음 2개는 우리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마지막 한 가지는 하나님의 것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와 도전을 준다.
첫째로, 역대상 9장 33절은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했던’ 찬양인도자를 발견한다. 이 사람은 레위 족장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개인에게 맡겨주신 자기 자신 만의 일에 ‘주야로 골몰하고, 필요치 않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물론 그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 나 자신도 하찮게 생각할 수 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달리 할 것이 없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내가 하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통해서 이루시고 싶은 일인가? 아니면 나에게 내 인생의 직분을 보여주시고, 맞다면 대상 9:33의 찬송하는 자처럼 여기 저기 흔들리지 말고,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집중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독에서 중생으로 변화된 삶이다.
두 번째, 아가서 8장 7절은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라고 말한다. 바로 사랑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참으로 사랑만큼 강력한 힘은 없는 것 같다. 6절은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라는 참으로 멋진 표현을 보여준다. 우리는 아가서를 잘 읽지 않지만, 사실 요즈음 나오는 일일연속극이나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생생한 사랑이야기가 아가서에 가득하다. 너무 가득해서 구약을 정경화했던 사람들조차 아가서를 가지고 심각한 고민을 했다고 알려졌을 정도이다. 잘못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중독이지만, 올바른 사랑에 빠지는 것은 중생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삼손이 드릴라라는 잘못된 사랑에 빠진 사랑중독자였다면(삿 16:4), 야곱이야말로 올바른 사랑에 빠진 사랑중생자일 것이다(창 29:20,30). 라헬이라는 한 여자를 얻기 위해서 14년을 참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힘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도전을 준다. “넌 목숨 바쳐 사랑할 그런 사람이 있는가?” 사실 우리는 사람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 우리는 사람보다 땅을 더 사랑했다. 우리는 사람보다 명예를 더 사랑했다. 이런 사랑은 중독이다. 우리는 사랑중생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기도제목이다. 여호와께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여호와여, 나에게 목숨 바쳐 사랑할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제 마음을 열어주셔서 제가 사랑중생자가 되게 하옵소서. 만약 있다면, 야곱과 같이 그리고 아가서의 그 시인과 같이, 내 생명이 있는 날까지 사랑의 중생자로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한다. 나는 하나님이야말로 최초의 사랑의 중생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의 중생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심지어 독생자 예수를 세상을 위해서 주시기까지 사랑했기 때문이다(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이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곁에 두지 않으면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진정한 중생이 나타난다.
오늘 제목은 ‘중독에서 중생으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중독에서 벗어나 중생으로 살아갈 때에, 이 사회는 건강하게 변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그 일에 밤낮없이 골몰하는 집중의 삶을 살자. 또한 그러기 위해서 돈과 명예라는 잘못된 사랑의 대상을 버리고 내게 맡겨주신 사람을 사랑하며 살자. 마지막으로 이 모든 중생의 중심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며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새힘을 날마다 기대하면서 살자. 이것이 바로 중독에서 중생으로 변화된 실제적인 삶이다.
1) Susan Niditch, “Judges,” in John Barton and John Muddiman (eds.), The Oxford Bible Commenta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86.
2) 수수께끼에 대해서 나카자와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김옥희 역 (서울: 동아시아, 2005), 201-8을 보라.
3)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2006), 263.
'Preaching > [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0) | 2006.10.30 |
---|---|
국군의 날, 우리의 날(창 2:1) (0) | 2006.10.02 |
사명자여! 일어나라! (렘 12:5) (0) | 2006.07.31 |
다윗의 열매(요 15:4-10; 삼상 17:47) (0) | 2006.07.05 |
[예레미야설교-08]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치 (0) | 2006.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