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날, 우리의 날(창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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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어제는 대한민국 국군의 제 58번째 ‘국군의 날’이었다. 5공화국 시절만 해도 10월 1일만 되면 탱크와 장갑차를 비롯해서 수많은 군인들이 동원되어 시가행진으로 한창 떠들썩했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어찌되었건 일반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10월 1일은 엄연하게 놀 수 있는 국경일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군의 날’을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생각일 것이다. 70-80년대의 냉전 시대에서 90년대 이후 햇볕 정책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자, ‘국군의 날’은 점차 우리들에게서 잊혀졌다. 떠들썩했던 시가행진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국군의 날을 잊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더 이상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국군의 날이 10월 1일로 정해진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준다. 왜냐하면 1950년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낙동강까지 후퇴한 대한민국의 풍전등화같은 운명이 역전된 날이 바로 10월 1일이기 때문이다. 즉,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대한민국의 전력(戰力)이 회복되어 처음으로 38선을 넘어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던 날이 1950년 10월 1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10월 1일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1950년 이후 지도상에서 영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군의 날’은 우리가 하루를 편안히 쉬는 공휴일을 뛰어넘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국군의 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군대에 다녀온 분들이 우리 중에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국군의 날’은 우리 대한민국 역사에 아주 중요한 날이라는 사실이며, 이것을 명심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올바른 국가관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 대대로 세워진다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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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어느 나라에나 국군의 날은 있을 것이다. 나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국군의 날’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그러한 선포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어느 말씀이건 옳게 분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2장 1절의 말씀이야말로 그냥 넘어가기가 쉽기 때문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얼핏 보면 창세기 1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창조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다. 다시 말하면 2:1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 별로 상관이 없는 ‘의미없는’ 말씀으로 우리는 읽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과 도전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2:1을 원어 그대로 풀어보면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가 완성했다. 그 하늘을, 그리고 그 땅을, 그리고 모든 군대를.
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이루셨다. 그리고 모든 군대도 완성했다”이다. 즉 우리말 성서에 ‘만물’이라는 단어의 보다 완벽한 뜻은 ‘모든 군대’ 즉 ‘만군’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단어의 의미를 더욱 자세하게 풀어드리는 것은 이 짧은 시간에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사 34:2]. cf. 시 33:6)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분명히 창 1:1은 창조의 시작을 말한다. 그리고 창 2:1은 창조의 완성에 대한 보고이다. 그런데 그 차이가 천지, 즉 하늘과 땅에서 ‘만물’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만물’을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만드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한글 새번역이 그러하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 자체가 ‘만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원어는 ‘만물’이 아니라 ‘만군’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여호와를 일컬을 때에 ‘만군의 여호와(야웨 쩨바옷)’라고 하는 그 ‘만군’이라는 히브리어 원어가 바로 2:1의 ‘만군’이라는 단어이다(미국표준영어성서[NASB]는 ‘만군(hosts)’이라고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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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창조의 결과를 ‘하늘과 땅, 그리고 만군’으로 요약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이성의 눈으로가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보인다. 이성의 눈으로 본문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모든 것을 지으셨구나’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창조하신 피조물은 바로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1장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 바로 사람의 창조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고백이 바로 창조의 내용이자 핵심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창세기가 말하는 창조의 비밀이다. 창세기의 창조는 호랑이가 여섯째날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만드신 피조물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창조가 천지창조를 대표하는 것이다. ‘저 높은 산을 하나님이 만드셨다. 저 깊은 바다도 하나님이 만드셨다. 저 하늘의 새는 하나님이 만드셨다. 용맹한 사자도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것이 신앙이 아니다. 산과 바다, 새와 사자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신앙은 ‘하나님은 나를! 그 분의 형상대로 빚으셨다’라는 고백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고백이 2:1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는데, 무엇을 염두해서 지으신 것인지를 여기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까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오직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시다. 그 사람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만군’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그의 군대도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사실 창조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신중하게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냥 살다가는 인생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님의 군대였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하나님의 군대였다. ‘만군의 여호와의 군대’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 다윗이 ‘칼과 단창으로’ 덤벼들었던 골리앗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던 신앙고백이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라고 했던 것이다(삼상 17:45).
이러한 신앙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신약의 바울에게서까지 연결된다(엡 6:12):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인 너희들이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다윗과 바울을 거쳐 지금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신앙인의 정체성이 바로 ‘나는 여호와의 군대속의 군사이다’라는 확신이다.
그러므로 국군의 날을 지내오면서, 영적인 차원에서 국군의 날은 바로 ‘우리의 날’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10월 1일이 대한민국 정체성에 있어서 ‘국군의 날’이라면, 1년 365일은 하나님 나라의 군사인 ‘우리의 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신앙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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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가지 말씀을 읽고 오늘 우리 공동체의 의미로 도전을 받았으면 한다. 바로 출애굽기 12장 17절이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םכיתואבצ)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니라
하나님은 이제 막 출애굽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군대’라고 가르쳐주신다. 사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은 누구보다도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점령해야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가나안 땅을 점령해야하는 하나님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 ‘여호와의 군대’라는 정체성만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고 그들은 ‘여호와의 군대’인 셈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가르침을 받아 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을 정립한 사건이야 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깨달음인 것이다. 천지창조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천지창조는 바로 우리 민족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군대로 만들어주신 놀라운 사건으로 그들은 신앙고백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앙 고백이 우리 깊은샘수원교회의 신앙공동체 가운데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 2장 1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한 사람들을 ‘군대’로 부르신 것과 같이, 그리고 출애굽기 12장 17절의 말씀과 같이 출애굽한 사람들을 즉 구원받은 사람들을 ‘군대’로 부르신 것과 같이, 우리 신앙공동체 역시 ‘군대’로 부르셨다는 인식이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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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실제적인 도전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바란다. ‘군대’의 생명은 충성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많이 반복되는 구절인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와 같은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닌 충성을 뜻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충성은 인간이 하나님께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공동체의 리더에게도 동일하게 충성해야 한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군대’에게 시종일관 부딪히는 것이 바로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심’ 문제였다. 우리 모두는 쉽게 고라 자손의 반역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민 16:1). 심지어 모세와 피를 나눈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조차 모세를 비방하며 그의 리더쉽을 걸고 넘어졌다(민 12:1).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충성심이 하나님에게도 실패하고, 모세에게도 실패하는 모습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교훈을 삼아야만 한다. 성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모세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것이다(민 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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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깊은샘수원교회 신앙공동체는 민수기의 고라의 반역이나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과 같은 사건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성서는 참으로 오묘한 것 같다. 왜냐하면 고라의 반역이나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과 같은 일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오묘한 것은 하나님은 모세의 충성을 받아주셨다는 사실이다(민 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군대 안에서의 원칙은 수천년이 지나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앙고백이 있다. 바로 천지창조의 중심에 사람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친히 깊은샘수원교회를 창조하셨다는 고백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사람을 창조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깊은샘수원교회를 창조하시면서 우리를 ‘여호와의 군대’로 부르시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고백이다.
지난 주 현정자 안수집사님을 총 사령관인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마음에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연대장’이 전사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깊은샘수원교회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장열하게 전사한 것이 ‘현정자 안수집사님의 소천’이라고 생각한다. 놀라운 점은 현정자 안수집사님이 소천한 몇 일 후에 우리 교회는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눈에 보인다. 현정자 안수집사님의 바통은 이제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군대의 군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리암과 아론은 자신의 불충을 깨닫고 회개했다(민 12:11).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고라는 자신의 불충을 깨닫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민 16:30). 이 말은 다른 사람을 겁주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 말은 바로 나 자신을 깨우치는 말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며 살았는가? 그리고 나는 우리 깊은샘수원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께 얼마나 충성하며 살았는가? 미리암과 아론의 회개는 이스라엘 군대를 다시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살 길이 바로 내가 미리암이 되어서 회개하는 것이고, 내가 아론이 되어서 회개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깊은샘수원교회라는 군대를 높게 일으켜 세우셔서 기적을 일으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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