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요나[1]-하나님 아버지의 이야기

진실과열정 2005. 10. 2. 21:29

하나님 아버지의 이야기(본문: 히브리서 1장 1절)

  1 옛적에 선지자들과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1. 말씀에 들어가며

설교 - 마르지 않는 영혼의 샘물

신앙생활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예배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설교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질리도록 설교를 듣는 삶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설교를 10,000번 이상 들은 설교전문가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주일만 지키는 경우만 생각해봐도, 2번(일주일) × 52주 하면 그럭저럭 일년에 100번의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10년 신앙생활이면 설교를 1,000번듣는 것입니다. 진짜 열심있는 골수 크리스챤은 어떨까요? 새벽예배(6번)와 주일예배(2번), 수요예배(2번)와 금요기도회(1번), 여기에 청년부예배까지 드린다고 생각해봅시다. 새벽예배 한두번쯤 빠진다고 쳐도 대략 일주일에 설교를 10번 듣게 됩니다. 그러면, 일년에만 설교를 500번듣는 것이고, 10년이면 5,000번입니다. 잘하면, 이중에서 설교 10,000번 들으신 분들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설교를 듣는 것에도 경력이 생기게 됩니다. 설교를 10번 정도 듣게되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캄캄하기만 하고,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느닷없이 옆사람이 큰소리로 ‘아멘!’하면, 깜짝 놀라는 경우입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은혜받는 경우입니다. 설교를 100번 정도 듣게되면, 이제 좀 감이 잡혀서, 자신있게 ‘아멘!’하고 외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설교를 1,000번 정도 듣게 되면, 설교의 서론을 10분만 들어도 ‘아~ 오늘 이런 말씀을 하시겠구나~’하면서 자신의 예상과 얼마나 맞아떨어지는가에 은혜를 받습니다. 이제 설교를 10,000번 정도 들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땐, 주보의 제목을 보자마자 자신이 설교를 머릿속에서 쭉 만들게 됩니다. 서론은 유명한 명언으로 시작해서, 본론은 첫째… 둘째… 셋째…로 하고, 결론은 십자가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했던 무명선교사의 예화를 실어서 마무리합니다. 설교시간 이전에, 자신이 만들어놓은 설교에 도취되어 모든 은혜는 이미 받아논 상태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은 웃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가지는 짚어보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에 이렇게 중요한게 바로 설교인데, 그 설교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여러분, 설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요? 좋은 대답입니다. 그런데, 과연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남북전쟁중에 어느 주일날 예배를 드렸습니다. 남군측에서 예배를 드리고, 북군측에서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남군측 예배에서 목사님은 남군이 이기도록 설교했습니다. 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렇다면, 북군측 예배에서 목사님은 “남군이 이기도록 순종하십시오”라고 설교했을까요? 그렇다면, 이기는 편이 진짜 하나님 말씀일까요?

우리말 성경에 ‘설교’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이것이다!”라고 꼬집어 정의를 내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곳에서 쓰여진 원어를 연구해볼 때, ‘설교’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역사에서 핵심적인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고전 14:26). 성경이 말하는 ‘설교’의 개념은 ‘선포’와 ‘가르침’에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케리그마’와 ‘디다케’입니다. ‘케리그마’, 즉 ‘선포’는 불신자에게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의미합니다(고전 2:4). 그렇다면, ‘디다케’, 즉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신앙인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마 28:20). 무엇을? 그렇습니다.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가지 명심할 것은, 이 두가지의 분류는 대상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질적인 면에 차이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설교(Sermon)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에 인도하기 위해, 성경을 합당하게 설명하는 ‘선포’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의 결과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발견하듯이, 설교의 결과는 ‘선포’에 있어서는 사도행전 2장 28절의 말씀과 같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빌립보서 4장 9절의 말씀과 같이,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공동체내에서는 자연히 후자, 즉 ‘가르침’의 설교가 많을 수 밖에 없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가르침의 설교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가르침의 설교에 한가지만 더하고 싶습니다. 저는 성경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배운대로 그대로 행하는 소극적인 신앙-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자신 스스로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합당하게 해석할 수 있는 적극적인 신앙인-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여러분을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난 해 창세기 설교를 해오면서, 나름대로 창세기 본문말씀의 세계와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 다리를 이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었습니다. 조금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실수도 있겠지만, 우리 청년부가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기도하며 함께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설교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르지 않는 영혼의 샘물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풀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절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틈틈이 Q.T.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이 말씀을 깨닫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여러분 스스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은혜의 시간을 날마다 늘려나가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의 중심에서

1) 성경 -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저는 오늘 ‘요나서’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섰습니다. 이 ‘요나서’라는 말씀을 가르치기 전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조금 고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가 성경 창세기 1장과 2장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1장

빛 - 하늘 - 땅과 바다, 모든 종류의 식물 - 해와 달 - 바다생물과 하늘생물 - 땅짐승과 사람

2장

땅(식물없음) - (흙으로 만든) 사람 - 식물(동산) - (흙으로 만든) 땅짐승과 하늘생물

어떻습니까? 식물, 짐승, 사람의 순서만 생각해 본다면, 1장과 2장은 분명히 반대입니다. 이번에는 신약을 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21장에 나와있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가

예루살렘 입성 - 이튿날 나무저주 - 성전정화사건 - 다음날 아침 무화가나무 마름

마태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사건 - 다음날 아침 나무저주와 곧 마르게 됨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과연 언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던 것일까요?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은 사건 그대로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이렇게 고쳐져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위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선, 성경은 기록된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이 기록되었다”라는 말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저자가, 의도에 맞도록 자료를 선택하고 편집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칼라사진이 아니라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복음서의 말씀이 똑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복음서는 비유와 같은 간접적인 가르침이 많이 있고, 어떤 복음서는 ‘이건 이렇다’식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복음서에서는 기적이 셀 수 없이 많이 나타나고, 어떤 복음서에서는 기적이 열 번도 안되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저자가, 그 의도에 맞도록 자료를 선택하고 편집한, 기록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언어에 맞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사람의 문화에 맞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노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법률조항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슬픔의 고백이 있고, 저주의 외침이 있습니다. 격언, 비유, 우화가 있습니다. 반복법, 과장법, 점층법이 있습니다. 의성어, 의태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학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도록,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문학적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봅시다: “성경은, 사람을 위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교정은 성경을 바르게 보는 출발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 그대로를 보도하는 신문기사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건 자체보다도, 그 사건의 의미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몇 번째 창조되었는가는 성경속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이후에 어디를 읽어보아도 사람이 여섯 번째날에 창조되었음을 가리키는 곳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의도는 이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다는 진리를 가르치는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날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의 의도에 맞도록, 자료를 선택하고 편집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매맺지 못한 거짓 신앙인이 되지말라”라는 진리를 가르치는데 열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직도, “성경은 사건 자체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나, 마태복음의 예수님을 믿으시는 분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창세기 2장의 하나님이나, 마가복음의 예수님을 믿게 되겠지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34절의 교회를 찾아 전국을 헤메게 될 것입니다. 이 교회가 어떤 교회냐구요? 이 교회는 말씀을 100% 문자 그대로 지키는 훌륭한 교회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다!”


2) 나쁜 늑대와 불쌍한 양치기 소년: 요나서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성경을 보는 창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요나서’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Jonah’입니다(“니 조나?”). 여러분들 중에 설교 100번 정도 들으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이 요나서 말씀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선교사 요나’에서부터 시작해서, ‘고래밥이 된 요나’나 ‘요나의 기도’와 같은 내용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모든 설교는 우리들의 신앙을 살찌우는데 너무나 소중한 것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요나서의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창문이 다릅니다. 그 동안에 보아왔던 창문이 아니라, 다른 창문을 통해서 요나서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서가 기록된 문학적인 형태를 고려해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매우 합당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한식과 양식은 모두 식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식은 한식대로의 먹는 방법이 있고, 양식은 양식대로의 먹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칼과 나이프로 한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양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먹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서인 요나서이지만, 그 형식이 완연하게 다른 말씀이기에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확인해 볼까요? 요나서 말씀을 한번 찾아봅시다.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호욜암옵 욘미나합 습학슥말’ 그렇습니다. 오바댜와 미가 사이에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예언서를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라고 불렀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이 분량이 큰 책을 ‘대예언서’라고 불렀고, 작은 분량의 12권의 책을 하나로 묶어서 ‘소예언서’라고 불렀습니다. 요나서는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대예언서들와 나머지 11개의 소예언서들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나서의 문학적인 형식이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겁니다. 다시말하면, 다른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신탁(oracle)들이 수집된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예언문학의 형식이 완연합니다. 수많은 신탁들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선포되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하기가 정말로 어려운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독 요나서는 예언문학의 형식에서 한참 벗어났습니다. 요나서는 예언형식이 아니라, 이야기(narrative) 형식입니다. 메시지들을 모아논 기록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요나서에도 분명히 메시지는 있습니다. 바로, ‘요나에게 일어난 이야기’가 곧 메시지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날 엄마가 다섯 살 난 아들에게 책을 읽어줍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늑대와 양치기 소년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어요. 너무나 심심한 이 소년이 어느날 거짓말을 했어요. ‘늑대가 나타났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그런데, 소년의 거짓말이었음을 알고 사람들은 돌아갔어요. 다음날에도 소년은 거짓말을 했어요. ‘늑대가 나타났다!’ 역시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고, 거짓말임을 알고 또 돌아갔어요. 소년의 거짓말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어요. 어느날이었어요. 정말로, 늑대가 ‘짠!’하고 나타난 거에요. 소년은 큰소리로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외쳤어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결국, 늑대는 양과 소년을 잡아 먹어버렸어요” 엄마는 책을 덥고 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 아들~ 뭘 배웠지?” 아들은 울먹이며 말합니다. “늑대가 나쁘구요~, 양치기 소년이 너무 불쌍해요~” 순간 엄마는 낙담합니다.

여러분은 늑대와 양치기 소년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그 이면의 메시지에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짧은 이야기가 ‘거짓말하지 말아라’라는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키시면서, ‘~해라’라는 명령보다 비유와 같은 짧은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같습니다. 우리는 굶주린 탕자를 들으며 울먹입니다. “굶주린 탕자가 너무 불쌍해요~” 순간 예수님은 낙담하십니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과 그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집을 지킨 첫째 아들을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 1-2절만 읽어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를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아버지는 하나님으로 볼 수 있고, 탕자는 모든 세리와 죄인으로, 그리고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변치않는 사랑의 화신이며, 탕자는 뉘우치고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이것이 매우 못마땅하며 아버지에게 화를 냅니다. 이에 대하여 아버지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면서 비유는 끝이 납니다. 놀랍게도, 이 탕자의 비유는 요나서와 매우 유사합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변치않는 사랑의 화신입니다. 1장과 3장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믿었던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변합니다(탕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이것은 매우 못마땅하며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다(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면서 요나서는 끝이 납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로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나서를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위해서, 비유와 같은 문학적인 형식으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에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나서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에 더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삼일동안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부족한 산소와 자신을 녹이려고 덤벼드는 소화액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또한, 3장 3절에는 니느웨라는 성을 소개합니다. 말씀 그대로 삼일길을 돌 정도의 성이라면 그 둘레는 어마어마 했을 것입니다(70km).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아무리 발굴을 해봐도 이런 크기의 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을 생각해봅시다. 니느웨는 앗수르라는 대국의 수도입니다. 이 시대는 르네상스라고 불리울 만큼 문화적인 인식이 높아진 때여서, 역사기록과 같은 일들이 융성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제국 앗수르의 기록물에서 왕에서부터 가축에 이르기까지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었다라는 역사적인 흔적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수많은 자료들중에서 성경의 내용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요나서가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일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3. 말씀이 생활에서

이제 저는 오늘의 설교를 여기에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여러분들은 비록 힘이들고 어려울지라도 이렇게 사십시오!”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이상하고 어려운 말들을 벌려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냥 쉽게 성경말씀이 이러라고 하니까 “이래라~” 해주기를 바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쉽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 노예제도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에서 함족속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확대 되어서 저주를 받은 검둥이로 운명이 정해졌습니다. 신약의 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종들은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해야 했습니다(엡 6:5). 그때는 무지했던 시대였기 때문일까요? 1960년대는 인간이 달에 착륙했던 놀라운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1960-70년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미국 백인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 그대로를 지키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제일 앞장 섰던 분들은 말씀의 해석자인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삶에 적용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요나서를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으로 보는 것이 더 믿음있는 태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더 많이 들어있고, 나와는 거리가 먼 신비로운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믿음의 세계 중앙에 있는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탕자’와 같이 비유와 같은 형식으로 가르침을 전해주신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 독특한 이야기체 형식으로 요나서의 메시지를 주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태도일까요? 저는 “요나서를 역사적으로 보는 것은 틀렸고, 비유와 같은 이야기로 보는 것만이 맞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나서를, 어떻게 보는 것에 따라서, 구원을 받고 못받는 정도로 중요하다”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나서의 목적은 우리에게 “믿음(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나서에서 신앙을 배우기위해서는 역사적으로 보는 것과 비유와 같은 이야기로 보는 것, 둘 다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요나서의 말씀을, 이스라엘 사람들, 즉 오늘날의 나름대로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여러분에게 그 메시지를 전할까 합니다.

우리 중 많은 분들은 어렸을 적에 성탄절만 되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한두번 쯤은 받았었을 겁니다. 저도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 맡에 새우깡이 있었던 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산타 할아버지가 너무나 고맙고, 다음에는 더 착한 일을 해서 더 좋은 선물을 받으리라 다짐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커버렸고,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가 하마터면 일평생 속고 살뻔 했구나!”라고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저는 산타 할아버지의 깊은 의미는, 매년 12월 24일 밤마다 루돌프의 빨간 코를 조명삼아 하늘을 날으며 굴뚝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착한 빨간 옷 할아버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낳아주시고 변함없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부모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아무도 안보는 사이에 하늘을 나는 빨간 마차가 있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빨간 마차가 발견되건 발견되지 않건, 제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 아버지의 이야기’라고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제목보다 훨씬 정감있고 가까운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장 1절에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이 것을 꼭 ‘말씀’으로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어를 찾아보면, ‘이야기’라는 의미도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로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던 참으로 자상하신 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이 요나서 말씀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 중에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요나서의 구수하면서도 우리에게 놀라운 충격과 은혜를 주시는, 그 이야기를 가슴을 열고 들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기까지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은 내일 우리 청년부 일일 수련회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요나서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씀 드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것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내일 모든 분들이 참여하셔서,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