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6:1-13
제목: 인생역전-예배하자!
서론:
저는 오늘 두 사람의 예배자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두사람은 같은 시대의 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두사람의 이름은 바로 ‘웃시야’와 ‘이사야’입니다. 둘 다 이름은 ‘야’로 끝이 납니다. 이 ‘야’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줄임말이 바로 ‘야’라는 것 입니다.
첫 번째 사람인 웃시야는 왕이었습니다. 웃시야는 솔로몬 다음으로 명성을 떨친 왕이었습니다. 60년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던 능력있는 왕이었지요. 웃시야 왕이 다스리는 유다의 국력은 최고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할 정도로 그의 왕으로서의 능력은 대단했던 것입니다. 군사력이 날로 증강하였고, 경제력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웃나라를 정복하면서 영토까지 넓혔습니다. 역대하 26:14-15에는 웃시야가 왕으로서, 행정가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왕국 분열 이래 유다의 국토를 가장 넓게 다스린 사람이 바로 이 웃시야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능력이 곧 그의 약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제사장이 되려고 했고, (그 당시에)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제단의 분향을 자기 손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다의 위대한 왕 웃시야의 운명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웃시야에게 문둥병이 임했던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 별궁에 홀로 거하였다”라고 역대하 26:21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예배 때문에 그의 운명이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배는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한편, 두 번째 사람인 이사야는 예언자였습니다. 원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공의로운 뜻을 선포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왕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왕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시와 같은 타락한 직분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습니다(물론 그들은 부유하게 살수는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개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예언자들은 두부류의 종류로 나뉘어졌습니다. 첫째는 왕들의 기분을 좋게해주는 왕실예언자(왕실에서 살았습니다)였습니다. 다른 쪽은 왕들에게서 멀리 떠나 (광야같은 곳에서-침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재야예언자였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엘리야나 아모스, 호세아같은 사람들이 바로 재야예언자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싸웠던 850명의 바알선지자들이 바로 왕실예언자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성경은 왕실예언자라는 직분이 참으로 위험하고 하나님의 신앙을 변절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어떤 예언자였습니까? 그는 ‘불행하게도’ 왕실예언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운명은 잘못하면, 왕들의 기분을 맞추어주는 내시와 같은 타락한 직분으로 변질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말만 하면 부유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지요. 정말로 편한 삶이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의 평가를 받는다면 ‘변질된 예언자’, ‘변질된 신앙인’의 모습뿐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러한 이사야가 왕실예언자로 태어났지만, 그의 운명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는 왕을 기쁘게하는 말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야예언자의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의 운명이 바뀌자, 그의 예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하라!”(이사야 7:14)). 자신의 운명이 바뀐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본론:
1) 예배는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1절).
본문에는 “내가 본즉” 이라는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의 첫 번째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원리란, 바로 “예배자는 주님을 볼 때에 예배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높은 보좌에 앉으셨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앉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7절을 보면,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육신적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나님이 지금 안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나를 탓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웃시야왕은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사야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는 겸손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내가 예배를 드릴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 무엇일까요? 예배당에 발을 내 디딛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내 발을 인도하고 있구나!”라고 감사하는 태도가 겸손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에,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의 문으로 들어오시는구나!”라는 영접이 겸손입니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올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성장시키시겠지!”라는 기대가 겸손입니다. 자리에 앉을 때에, “나를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는구나!”라는 평안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같은 죄인이 이러한 곳에 있다니!”라는 감격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겸손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이 겸손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2) 예배는 온전히 하나님만 높이는 것입니다(2-4절).
본문은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을 빠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사들의 찬양입니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 성경은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 일어나는 일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영적인 탄성입니다. 그것은 마치 금강산 정상에서 경치를 보고난 후에 저절로 나오는 ‘히야~’와 같은 원리입니다. 금강산을 보고서도 ‘히야~’한다면, 이 금강산을 만드신 하나님을 볼 때에는 어떠한 탄성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영적인 탄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신 것은, 바로 영이신 하나님을 보고 그에게 영적인 탄성을 하기 위함입니다.
천사(스랍)들의 탄성이 그러했습니다. 천사들의 찬양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저는 두가지를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는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의 모습을 최대한 가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섯 날개가 있는데,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렸습니다. 둘로만 날았다고 합니다. 찬양은 찬양하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하기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멀리있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빨리 오기 위함도 아닙니다. 찬양에는 인간적인 어떤 목적도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찬양의 두 번째 모습은 그들의 열정입니다. 4절에 보니깐, 천사들의 찬양하는 소리 때문에 기둥이 흔들렸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영광을 받으옵소서!”하는 천사들의 찬양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뻐시게 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하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주여! 주시옵소서!”라고 달라는 기도를 하면 기둥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주여! 받으옵소서!”라는 드리는 찬양에는 많이 인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십시오. 주시옵소서 하기 이전에 찬양하십시오.
3) 예배는 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5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더러운 내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그때에”(5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냐 하면, ‘하나님을 인식하고 찬양한 그 때’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어떠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하나님에게서 더러운 내가 보여지는 신비한 원리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나의 완전한 모습을 비쳐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처음부터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결코 진정한 내가 보여지지 않습니다.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철저하게 나는 위장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추어집니다. 나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질 때에, 그 안에서 진정한 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성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두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찌할꼬!’ 하면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들의 죄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정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귀를 막고, 돌을 들고 스데반 집사를 죽였습니다. 자신의 죄성을 부정했기에 그들은 ‘살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행 7:57). 다른 한편에서는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설교를 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들의 죄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인이구나! 우리가 어찌할꼬!” 결국,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소유했던 것입니다(행 2:40).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나만의 죄악, 나만의 약점, 내가 가장 드러내기 싫어하는 부분을 보십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물론 이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미있는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사야 자신에게 가장 드러내기 싫어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직업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왕실예언자입니다. 이사야가 소속해있는 왕실예언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기보다는 왕들을 기쁘시게 했던 무리들입니다.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왕들에게 아부하는 입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의로운 소리가 되게 하기위해서 예언자라는 입술을 주셨건만, 그들은 그 입술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위해 잘못된 사용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이었습니다. “내 입술이 이렇게 더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있기 때문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하나님앞에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습니다(히 4:12-13)” 우리가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내 모습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드러내는 것은 수치일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드러내는 일 때문에 멸시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멸시할 수 있엇도, 하나님은 우리를 꼭 감싸주신다는 사실입니다.
4) 예배는 내가 고쳐지는 은혜입니다(6-7절).
예배는 내 자신이 드러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고쳐지는 은혜가 체험되는 놀라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 2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치료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십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범죄함,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불결함이 하나님에 의해서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강건해집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감정적인 효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이 시원한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전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전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나의 힘으로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즉 기독교만이 이 세상의 종교를 뛰어넘는 참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에 의한 구원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자신을 드러내었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야! 너 스스로 깨끗해져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사, 단에서 취한 숯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숯이 이사야의 입에 닿았을 때에, 하나님은 죄사함을 선포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2000년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사함을 선포받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8-10)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 시간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여러분은 구원을 받으며, 예수님의 보혈로 여러분은 변화되어집니다.
5) 예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8절).
우리는 예배하면,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찬양보다, 기도보다 말씀듣는 것에 조금 더 비중을 둡니다. 모두 중요하지만, 특별히 말씀 듣는 시간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말씀의 시간을 통해서 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보게되면, ‘때에’라는 단어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단어입니다. 5절에, 이사야가 언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냐면, 하나님을 볼 ‘때에’ 입니다. 6절에, 스랍들이 언제 숯을 가져왔냐면, 이사야가 죄고백을 했을 ‘때에’ 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게되면, 8절에 ‘그리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그 ‘때에’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주시옵소서!”라고만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로 변화되고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6) 예배는 내가 반응하고 헌신하는 시간입니다(8절).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만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목소리는 그 옛날 이렇게 울려퍼졌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누구를 보내야 할찌를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내가 반응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내가 헌신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내가 세상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왕궁에 진정한 예언자는 한사람도 없구나! 모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사람을 기쁘게만하는 거짓된 예언을 하는구나! 아! 참으로 나의 말을 대언할 진정한 예언자는 누가 있다는 말인가! 내가 누구를 보내서 참된 나의 말을 대언하게 할꼬!” 이 때에, 이사야는 반응합니다. 이사야는 헌신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헌신합니다. “주여! 그동안 내가 세상사람들처럼 똑같이 살았나이다! 내 배만 채우려고 거짓된 예언을 했나이다. 사람을 기쁘게만 했나이다. 이제는 저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대언하게 하옵소서! 어디로 보내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생이 역전된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영적인 원리는 이것입니다. 변화란 우리의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시간 우리도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찾아보기 힘이들구나! 모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사람을 기쁘게만하는 거짓된 신앙생활을 하는구나! 아!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사람은 누가 있다는 말인가!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할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 고백합시다. 우리 주님께 반응합시다. 우리 주님께 헌신합시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나의 가정에 보내소서. 내가 빛이 되겠나이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나의 직장에 보내소서. 내가 빛이 되겠나이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나를 나의 친구들에게 보내소서. 내가 빛이 되겠나이다. 할렐루야!
7) 예배는 하나님의 격려를 받는 시간입니다(9-13절).
사랑하는 여러분! 타락한 세상에서 신앙생활은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참으로 힘이들고 참으로 서러운 삶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많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루이틀도 아니요. 수백번, 수천번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실패를 알면서도 헌신하는 무모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이사야가 결심하고 헌신했다지만, 그의 환경은 하루아침에 싹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였습니다.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쉽지않을 것이라고 당부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한 마디의 말씀만을 여러분에게 드리기 원합니다. 그것은 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가라!” 그렇습니다. 힘이 드는 것을 뻔히 아시지만, 실패할 줄도 뻔히 아시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예배는 하나님의 파송을 받는 축복된 시간입니다. 예배는 주기도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거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예배의 마침은 새로운 출발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우리 하나님의 격려를 들으십시오! “가라!”
결론:
요즈음 들어 우리에게 들려지는 것은 바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야구선수들에게 때로 슬럼프가 찾아옵니다. 그럴때 그들은 기본으로 돌아갑니다. 방망이를 수백번 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슬럼프가 찾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기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배가 아닐까요? 말씀을 마치면서, 로또해서 인생역전되었다고 말하지말고, 예배드려서 인생역전되었다고 선포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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