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순종의 사람이 되자(삼상 24:1-7)

진실과열정 2005. 8. 25. 10:44
효율보다 순종의 사람이 되자

순종의 사람이 되자(삼상 24:1-7)

말씀을 준비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다: 예수님의 노예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당대 최고의 기독교 핍박자였습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의 옛모습을 단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에 보니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전에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믿기 전에 사람들의 상태는 “살기가 등등”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병원의 의사라 할지라도, 그는 생명이 등등한 것이 아니라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생명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살기가 등등했던’ 옛사람의 모습을 바꾸어서 ‘생명이 등등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을 믿은 바울은 11장에 와서는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이 등등한’ 사람으로 변화되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 교회로 보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 26절에 보니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고, 큰 무리가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세계 최초로 세계선교를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도 목사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결과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별명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 별명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11:26).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도의 노예들”이라는 조롱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이 조롱의 말을 부끄러워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바울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노예가 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기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삶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살기 등등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바꿔말하면 나는 예수님의 노예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생명이 등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의 삶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돌이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노력의 사람인 것이다. 저는 이 시간 사울왕과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새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효율보다 순종의 사람이 되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에서

1. 사울: 효율의 사람

오늘날 우리는 ‘효율’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이 ‘효율’이라는 것은 참 매력적인 것입니다. 돈 만원을 들어서, 십만원을 번다면 열배의 효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효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성경은 ‘효율의 사람’으로 사울을 보여주고(삼상 15:1-9), ‘순종의 사람’으로 다윗을 보여줍니다(삼상 24:1-7; 26:1-12).

먼저, 효율을 순종보다 앞세웠던 사울을 살펴봅시다. 사무엘상 15장 1-3, 7-9절을 읽도록 합시다.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으로부터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아말렉에 승리한 사울은 아말렉의 왕인 아각을 살려줍니다. 그리고, 가장 좋고 기름진 동물들을 죽이지 않고 남겨둡니다.

이것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왕은 ‘순종의 전쟁’을 하지 않고, ‘효율의 전쟁’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아각왕을 살려주어서 이스라엘의 부하로 삼으면 몇 년동안 세금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10배나 넘게 남는 장사입니다. 대단한 효율인 것입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한 백성들이 21만명인데, 그들에게 땡전 한푼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면, 민심을 잃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눈앞에 살이 토실 토실한 동물들을 전쟁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전리품으로 하사한다면 사울의 인기도는 하늘을 찌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최고의 효율을 선택한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사울왕-그는 성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엄청난 효율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실패자로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진리를 사울왕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삼상 15:22).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종이 효율보다 더 귀하다”

2. 다윗: 순종의 사람

이에 반하여, 성경은 다윗을 ‘순종의 사람’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오도록 합시다(24:1-7).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순종보다 효율을 선택한 사울을 버리고, 목동 다윗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자, 사울왕은 다윗왕을 죽이려고 땅끝까지 쫓아가는 집념을 보여줍니다. 어느날 한참을 쫓다가 지친 사울왕은 그만 배가 살살 아파왔습니다. 그래서, 용변을 보려고 굴 깊은 곳에 들어갔습니다. 본문 3절에서 ‘발을 가리운다’라는 뜻이, 바로 용변을 본다는 말입니다. 용변을 보기 위해 사울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한곳에 두고 휘파람을 불면서 신나게 ‘발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다윗이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속삭입니다. “다윗이여! 보소서! 당신의 원수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완전히 부방비 상태입니다. 당장에 죽이십시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에게 창을 두 번이나 던져서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이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수천명의 사람들을 풀어놓고 땅끝까지 자신을 쫓아다니고 있는 그 지긋지긋한 원수 사울이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칼을 들고 사울을 죽인다면, 다윗은 더 이상 고달픈 도망자의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굴 안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누가 사울왕을 죽였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다윗은 결백하다는 주장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민심을 얻어 사울왕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주신 최고의 효율, 즉 대박터지는 날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이 벗어놓았던 겉옷자락 끝을 살짝 베어낼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대적인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옷만 오려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이 용기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에서 용감히 싸운 백전의 용사였습니다. 다윗이 옷만 오려낸 이유는, 다윗은 “쉽게 왕이 될 수 있는 효율보다, 하나님의 질서인 순종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효율보다 순종을 선택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다윗이 얼마나 순종의 사람이었는가!” 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사울의 옷을 베고 나서 어떨 것 같습니까? 저라면 “어휴! 죽일껄!” 아니면, “어휴! 옷을 전부 뺏어버릴걸!” 이렇게 후회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5절을 읽어봅시다: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그렇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옷을 아주 조금 베어낸 것으로 마음이 찔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옷을 베어냄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지 못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효율보다 순종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다윗은 이렇게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효율보다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원리임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울왕의 결과와 다윗의 결과가 어떠한 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왕은 “효율을 순종보다 귀하게 여겨서” 하나님께 버림받아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순종을 효율보다 귀하게 여겨서” 하나님의 사랑받아 하나님의 전을 준비하는 위대한 일을 담당했습니다. 효율성이 나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효율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순종보다 앞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은 효율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효율보다 순종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말씀이 생활이 되어

말씀을 마치며, 다시 사도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사도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그는 사울왕처럼 베냐민 지파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전에는 사울왕처럼 똑같이 “효율의 사람, 자기 고집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나서는 “효율의 사람”에서 “순종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바울’, 즉 ‘낮은 자’라고 하기까지 순종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빌립보서 3장 7-8절의 이 고백이,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효율의 사람’에서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원리를 성경을 통해서 틈틈이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곳에서 최고의 효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전의 전쟁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한사람도 피를 흘리지 않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딱 한번의 그물로 153마리나 되는 엄청난 물고기를 낚아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를 흥분시키는 고효율의 기적과 같은 일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효율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효율에 앞서 순종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효율은 순종의 결과라는 가르침이 바로 성경의 외침인 것입니다. 한사람의 피도 흘리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었던 한가지 이유는 말씀에의 순종에 있었으며, 153마리의 엄청난 물고기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던 한가지 이유도 바로 말씀에의 순종이었습니다.

성경은 더 나아가 순종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신앙의 반석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이 순종이라는 신앙의 반석위에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수많은 무리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사람, 아브라함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수많은 아들들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사람, 이삭만은 주셨습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효율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라는 신앙의 반석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효율이 아닌, 순종으로 이끌었습니다. 40일이면 충분히 가고도 남을 그 길을, 하나님은 40년이나 돌아다니게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신앙은 “좋은 떡을 먹어야 잘 살 수 있다”는 효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순종인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 땅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참모습이 바로 효율보다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순식간에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의 제물로 드리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못박히신 십자가에서 영광스럽게 내려와서 그 앞에서 조롱하던 로마 군사들과 불신의 눈으로 경멸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뒤엎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그 순종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외쳤으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신앙의 비밀을 고린도교회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효율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순종만이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이 남겨놓으신 열두명의 사도들은 지극히 초라한 결과가 더 이상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열두명은 순종의 결과이며, 신앙의 반석인 것입니다. 이 순종의 뿌리가 줄기를 내고 열매를 맺어 우리의 가슴에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효율보다 순종을 선택할 차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바로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단 한가지 근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개를 숙여야 할 유일한 권위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유대관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4:19). 그렇습니다. 작은 겉옷 한조각 베어낸 것 때문에 마음이 찔리는 다윗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여 마음이 아파하는 그 순수함을 회복해야 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 앞에 나의 효율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결단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선포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손안에 있는 성경에는 순종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관리자되는 영적 권위자에게는 벗어나려 합니다. 이것은 좋지 못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지역교회에 소속된 한 지체로써 동부교회의 영적 권위자인 담임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작은 셀의 리더의 말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내 생각에는 이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지만, 말씀앞에, 목사님앞에, 리더앞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이란,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