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계속되는 기도(대상 4:9-10)

진실과열정 2005. 8. 25. 10:47

계속되는 기도(대상 4:9-10)

서론

6․25 53주년과 역사의식

1. 오늘은 6․25사변이 발발한지 53주년이 되는 날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참으로 많이 들어왔던 말 중에 하나가 바로 ‘통일’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통일에 관련된 표어, 포스터들을 거의 매달 숙제로 주기도 했다. 어릴적에 포스터를 많이 그린 기억이 난다. 남쪽을 파랗게 그리고, 북쪽을 빨갛게 그리고 난 다음, 그 중앙에 분홍빛의 무궁화를 멋들어지게 그리면 기본적인 바탕이 만들어진다. 여기에다가 포스터 위쪽에 “백두에서 한라까지 무궁화 꽃을…”이란 간단한 문구를 넣으면 포스터는 완성된다. 포스터를 그리는 내내, 입가에는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그 때는 뭐가 뭔지를 잘 몰랐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와서는 한가지가 확실히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통일에 대한 교육이 정말로 대단했다는 것이다. 그 때의 통일에 대한 교육이 오늘날까지 언론과 방송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2. 그런데, 우리들은 쉽게 잊어버리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심지어 1년전에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던 월드컵의 감동도 잊혀진지 오래다. 어찌보면, 이것은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하나같이 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라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는 단순히 옛날에 일어났던 일들만을 기록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역사는 우리가 누구이며, 또한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지를 말해주는 선생인 것이다.

3.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역사라고 생각되어지는 부분들이 참 많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삶속에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엔 자연스럽게 역사적인 내용들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단순히 역사책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역사 자체가 성경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한 민족을 통해서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역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성경과 역사

1. 성경과 역사를 관련지어 생각해볼 때, 우리가 읽은 역대기서 말씀은 어찌보면 전형적인 역사책과 같다. 그런데, 한가지 집어볼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열왕기서 말씀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몇 번이고 읽어보신 분이라면, 열왕기서와 역대기서가 매우 유사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 모두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진 왕국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유사하다. 그런데, 이 두 말씀은 아주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아주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두 말씀이 쓰여진 기록연대가 틀리다는 점이다. ‘기록연대가 틀리다’라는 말은 그 말씀을 받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상황이 틀렸다는 말이다.

2. 즉, 열왕기서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은 다윗이 아니다.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왕이 아니었다. 열왕기서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은 다윗왕조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버린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포로가 되어버렸는지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갖기보다는 세상에 더 많은 위대한 왕들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인다는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열왕기서는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올바르게 만드는 신학적인 메시지가 들어있는 책인 것이다. 즉, 열왕기서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이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가난하거나, 국력이 없거나해서 망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왕하 17:7-20). 열왕기서가 강조하고 있는 두 번째 메시지는, ‘세상은 강한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인다’는 진리이다. 열왕기서에는 수많은 왕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왕들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인정한 사람도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왕에게 기름부은 사람들의 정체가 바로 예언자이다. 이렇게 열왕기서는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고 포로가 되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바로 잡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3. 그렇다면, 역대기서는 누구를 향하여 쓰여진 말씀일까? 이 역대기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늦게 쓰여진 책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신교 성경에서는 역대기서가 중간 앞쪽에 위치해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래의 구약성경은 역대기서가 가장 마지막에 위치해있다. 이것은 둘 다 맞은 것이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개신교 성경은 그 말씀의 내용의 순서가 맞기 때문에 옳은 것이고, 히브리어 성경은 그 성경이 기록된 시기가 맞기 때문에 옳은 것이다. 나는 이시간 역대기서를 그 성경이 기록된 상황에 맞추어 설명하려는 것이다. 다시 질문해 보자. 그렇다면 역대기서는 누구를 향하여 쓰여진 말씀일까?

본론

역대기서는 귀환한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1. 다윗왕조인 남유다왕조는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포로가 되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의 나라가 바로 이 바벨론이고, 당대 초대강국이 바로 바벨론이다. 그런데, 이 바벨론도 오래가지 못하여 페르시아라는 나라에 멸망하고 만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 하박국 예언자에 의해서 이미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라는 나라는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우호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남유다의 백성들은 70년동안 바벨론이라는 먼 이국에서의 포로생활을 끝마치고 고국땅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2.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70년동안의 바벨론 포로생활의 후유증이었고, 풀한포기 없는 허허벌판위에서 위협하고 있는 이웃나라들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아브라함이 약 1,500년전에 빠져나왔던 갈대아 우르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만큼 문명이 발전했다는 말이 된다. 바로 이런 바벨론에 팔레스틴의 작은 나라 유다민족이 포로로 잡혀간 것이다. 유다민족은 바벨론에가서 입이 다물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자신들이 보았던 건물보다 100배는 큰 탑과 성이 쫙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시골에서 산너머 한집을 볼까말까한 사람이 서울의 종로에서 빌딩에 둘려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바벨론은 수없이 많은 우상들이 있는 나라였다. 우상들이 우후죽순으로 있는 것도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등급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우상들을 위한 성전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이라는 어원이 바로 바벨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게 신들의 땅에서 70년동안 잡혀살아오면서 유다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누가 진정한 신인지를 묻게 되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 이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돈이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아파트가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땅이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인맥이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도 이러한 세상에서 살면서 누가 진짜 신인지 혼란을 느끼게 된다.

3.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큰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바로 100년전만해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다윗성-시온성이 있던 자리가 지금은 허허벌판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주었던 성곽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무너져 형체도 남지 않은 것이다. 더 나아가, 100년 전만해도 우리를 섬겼던 이웃나라들이 이제는 호시탐탐 우리들의 영토를 넘보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이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실제 살아가는 세상은 바로 ‘고통’의 세계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역대기서 말씀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상황인 것이다. 역대기서란 이렇게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4. 역대기서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는 조금만 생각하면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다. 세가지만 생각해보기로 하자. 첫째로, 역대상은 1-9장까지 엄청나게 긴 족보로 시작한다. 이것이 그들에게 힘이 되는 것이다. 즉, 1:1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자신들은 아담의 후손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사람 아담이 바로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아담을 만드셔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비록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로, 역대상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전이다. 그리고, 열왕기서 말씀이 예언자들을 부각하고 있다면, 역대기서 말씀은 제사장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포로의 땅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국가를 세울 수 없고, 오직 성전만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왕의 나라가 아니라, 제사장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세속적인 권력의 힘으로 살아가는 민족이 아니라, 예배하는 공동체로 뭉쳐지는 것이다. 셋째로, 역대기서 말씀을 마무리하고 있는 놀라운 말씀이 힘이 된다(대하 36:23). 역대기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끝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말이 자신들의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바사 왕 고레스가 말한 것이다. 이 바사가 바벨론을 물리쳤던 페르시아를 말한다. 돌아온 백성들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이 세상의 가장 큰 나라도 하나님의 지배아래에 있다라는 진리이다. 이렇게 역대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온 백성들에게 놀라운 힘과 은혜가 되는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이스라엘의 기도

1. 이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야베스의 기도라는 이 짧은 기도에서 수없이 많은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내용이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겠다. 오히려, 왜 이 야베스의 기도를 기록해야 했을까에 대한 추측을 하도록 하겠다. 왜 1-9장까지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족보에 야베스의 기도를 기록하였을까? 그의 기도에 무슨 비결이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의 기도를 닮으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기도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기도와 다르다. 구약성경에서 많이 제시되는 기도는 서약이 포함된 기도이다. 야곱의 기도, 다윗의 기도를 보면 하나같이 서약이 포함되어있다. 시편을 읽어봐도 전통적인 기도는 서약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야베스의 기도는 서약이 없는 구하는 기도이다. 그렇다! 야베스의 기도를 기록한 이유는 그의 기도를 닮으라는 것 이전에, “하나님은 이런 기도도 응답하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가르쳐주는 것은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라는 확신의 말씀인 것이다.

2. 그렇지만, 몇가지만 집어보기로 하자. 첫째로, 야베스에 대한 것이다. 야베스는 유다의 자손이다. 유다의 자손이라는 말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유다 자손은 야곱의 축복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력을 인정받은 자손이다. 결국, 이 유다 자손이라는 말은, 포로기에서 돌아온 유다지파, 더 나아가 다윗 왕국을 세웠던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일컫는 말인 것이다. 따라서, 이 야베스는 자신들의 역사에서 한 인물로써의 야베스가 아니라, 유다지파-다윗왕국을 세웠던 이스라엘 백성 모두였던 것이다. 결국, 이 기도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모두의 기도가 되라는 말인 것이다. (히브리어로, ‘수고(9)’와 ‘근심(10)’으로 나온 말은 בצע[아짜브]이다. 정확하게 야베스(ץבעי[야아베쯔])의 근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3. 둘째로, 야베스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이다. ‘이스라엘 하나님’이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과연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겠는가? 이스라엘이 70년동안 살아왔던 바벨론이 바로 수천개의 신이 있는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건강하려면 건강신에게 기도해야했고, 승진하려면 승진신에게 기도해야했다. 전쟁을 하려면 전쟁신에게 기도해야했고, 돈이 필요하면 돈신에게 기도해야 했다. 이것이 그들이 70년동안 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해야할 분은 한분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분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4. 셋째로는 야베스의 기도 내용이다. 야베스는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 기도는 자신의 사업영역, 인간관계영역이 넓어지기를 바라는 기복적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야만 했던 민족적 기도이다. 이 기도야말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기도였음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이 지금 과연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포로지에서 꿈만같은 고국으로 돌아왔건만, 그들에게 주어진 땅은 코딱지 만큼도 안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수도인 예루살렘은 성벽도 다 무너져 내려버린 상태이다. 그들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렇다! 바로 역대기 말씀의 저자는 그러한 백성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이다!”라고… 고국땅으로 돌아온 그들은 영토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야했다. ‘지경’은 실제적인 영역의 확장이 되어야 했다(“bless me and enlarge my border”[NRSV 4:10])  그들은 아브라함,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금 부르짖어야 했다. 비록 그들이 잘못해서 북이스라엘, 남유다로 나뉘어졌지만, 그들은 다시금 다윗의 왕국이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해야 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은 코딱지 만한 곳에 서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5. 넷째로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야베스의 환난과 근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난과 근심은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방 민족들의 간섭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에스라-느헤미야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방민족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일어서기를 싫어했고, 실제적으로 실력발휘를 했다. 페르시아 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스 4:1-6, 21-24). 그런데, 더더욱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악독하게 저지했던 세력들이 사마리아인들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족속들과 혼혈이 되어 생겨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의 뿌리는 북이스라엘이요, 더 나아가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들이 돌아온 백성들의 환난이요, 근심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답답했을 것이다. 그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야베스의 기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론

야베스의 기도는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1. 오늘은 6․25가 발발한지 53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다. 우리는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지, 어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 실정에 있다. 과거는 무의미한 것이요, 오직 무지개빛 미래만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6․25는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통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야베스의 기도는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일 것이다.

2. 그렇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 신앙인 개인이 잘 살기위한 주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 기도는 우리 한국교회 신앙인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 기도는 통일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그 당시 다윗의 왕국을 꿈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셨던 통일의 나라, 그 지경까지 넓혀달라”라는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나라가 세상에는 더 많을 것이다. 심지어 북한이 그럴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근심이며, 우리의 고통이다. 어느 누구도 손을 걷지 않고 딴지를 거는 오늘의 상황이 바로 우리의 아픔인 것이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Your hand might be with me, and that you would keep me from hurt and harm!”

3. “우리 한민족을 사랑하셔서 예수의 십자가를 알게 하신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구별되지 못하여, 일제의 침략을 받고, 6․25라는 민족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주님의 인자와 긍휼은 한이 없기에 우리를 이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오늘의 한국으로 만들어 주셨나이다. 그러나 주님, 우리는 기도하나이다.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이다. 우리의 지경을 넓혀주셔서, 통일을 꿈꾸게 하옵소서! 환난과 근심을 물리쳐주셔서, 세계 열강의 놀이감이 되지 않도록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앞에 약속할 수도 없는 약한 민족입니다. 세계선교라는 위대한 위업도 감당할 수 있을지… 그러나, 야베스의 이 기도에 ‘허락하신’ 주님! 우리의 이 기도에도 ‘허락’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