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에서 원조로(본문: 요나서 4장 10-11절; 누가복음 15장 29-32절)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 말씀에 들어가며
신앙의 변질을 경계하라!
불교사찰에 가보면 어디든지 세 가지 건물이 있습니다.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이 그것입니다. 대웅전은 불타에게 소위 예배를 드리는 곳이고, 명부전은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 곳이며, 삼성각은 삼신 즉 칠성신, 산신, 독성신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불교인들에게 제일 인기있는 곳이 하나있다고 합니다. 다른 곳은 한적하더라도, 이곳 만큼은 가장 붐비고 많은 사람들로 발딛을 틈 없는 그런 곳, 바로 삼성각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칠성신, 삼신을 모셔놓고 “장사가 대박터지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식 잘되게 해주십시오. 오래 살게 해주십시오”하고 빌 수 있는 곳이라서 그런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래 불교에는 삼성각이란 것이 없다는 겁니다. 삼성각은 무당종교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은 완전히 불교 고유의 것인 것처럼 되어버린 거지요. 불교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한 불교의 원래 정신은 사라져버리고, ‘자기 배가 터지도록 복을 달라’는 것을 볼 때, 정말이지 불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리석고 미련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렇게, 불교와 같은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의 지혜로 고안해 낸 것이기 때문에, 그 출발이 아무리 좋게 보일지라도, 결국엔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교는 변했답니다. 변질되어서 웃기는 삼류의 기복신앙으로 추락했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과연 어떨까요? 아니면, 그 기독교의 구성원인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니면, 우리 교회의 구성원인 청년부는 어떻습니까? 아니면, 우리 청년부의 구성원인 나는 어떻습니까? 나의 신앙은 변질된 신앙입니까? 예전에, 라면을 끓여먹으려다가 혼이난 적이 있었습니다. 끓는 물에 라면과 스프를 넣고 조금 있다고 달걀을 깼는데, 그만 상한 달걀을 넣고 만 것입니다. 라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한번 못대고,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변질된다는 것은 버려지는 것입니다. 변질된다는 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변질된다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나의 신앙이 변질되었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영원토록 변치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소망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신앙인이 되도록, 그 신앙의 참모습을 날마다 보여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변질된 신앙인을 새롭게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섰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야기인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예수님의 이야기인 잃어버린 탕자(눅 15:11-32)와 함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과 순수를 회복하게 되는 은혜가 함께하길 소원합니다.
2. 말씀의 중심에서
어느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일에 열중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신령한 비밀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듣도록 쉬지 않고 외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 반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히 멸시받은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이들이 등장합니다. 멸시받은 부류로써 세리와 죄인들이 나오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등장합니다(1-2절).
우리는 ‘바리새인들’하면 왠지 부정적인 느낌을 받곤합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반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회적인 핵심멤버였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루어놓았던 문화통일 현상(헬라화)에 그대로 물들고 말았습니다. 헬라문화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숭상하기 때문에, 체육활동이 원활했었습니다. 그래서, 짐나지움이라는 체육관이 곳곳에 있었고, 이 체육관에서는 벌거벗은 남자들만 모여서 육체의 힘을 발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한가지 생겼습니다. 바로 할례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서까지 헬라문화를 즐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일반인들의 생활상의 단면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등장한 ‘죄인’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스스로를 ‘구별된 자들’이라고 자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들이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대단한 결심이었지요. 당연히 백성들에게 바리새인은 존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요 3:1,10).
제가 만약 예수님이라면 죄인들에게 돌을 던졌을 것이고, 바리새인들에게 면류관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정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탕자’라는 비유의 배경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놀랍게도, 이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는 그 구성이나 등장인물, 그리고 메시지에 있어서 구약의 요나서와 매우 닮았습니다. 두가지의 다르지만, 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에서 우리는 세가지의 등장인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우리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1) 이방인 -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마!
첫째로, 비유는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번제를 드리는 모습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드리는 모습일까요?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우리의 장남을 드리고, 우리의 영혼의 죄를 위하여 몸의 열매를 드리는 모습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를 원하십니다. 즉, 과거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현재의 내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며, 현재의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현재의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에서 절반을 미리 상속받아 허랑방탕하게 허비했던 치욕적인 과거가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둘째 아들은 정신나간 짓을 한 것입니다. 도저히 상종못할 사람이 바로 이 둘째 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 전체를 볼때, 칭찬받는 사람은 다름아닌 둘째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참신앙을 말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신앙인가? “과거가 어떠하든지, 지금 현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녀로서 살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인 요나서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참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나 또한 요나서 당시의 독자들이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참신앙의 소유자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요나서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입니다. 우리는 요나서 1장과 3장에서 참신앙의 소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1장에서 우리는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정체를 무엇보다 종교인들이라고 제한합니다. 1장 5절(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은 그들이 알지못한 힘에 의해서 거센 폭풍을 경험하게되자(4절,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신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물건을 내 버리는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역사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14절;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더욱 놀라운 점은 그들의 표현에 있습니다. 14절 하반절을 봅시다: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자신의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그들이 현재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하여 결정적인 메시지를 던집니다(16절;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이 말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하는 것이고,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다는 것은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어떠하든 지금 현재, 믿음의 반응을 하는 것이 참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3장에서 니느웨라는 곳을 봅니다. 이 니느웨는 1장 2절에 이미 언급되어 있습니다(악이 가득한 저 큰 성읍 니느웨). 역사적으로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이 앗수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 아닙니까? 아마 당시의 독자들은 니느웨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타오를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 하루동안만 매우 간략하게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이 가득했던 니느웨가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상상도 못할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5절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이미 선포합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고 굵은 베를 입는 회개의 모습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6절은, 백성들 뿐만 아니라, 대제국 앗수르의 왕까지도 금식을 하고 굵은 베를 입으면서까지 하나님께 회개의 반응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젠, 이스라엘 역사에도 없는 황당한 일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7절엔 소나 양같은 짐승에게까지 금식과 굵은 베가 내려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야기나 하나님의 이야기나 그 핵심은 매우 간단합니다. 참신앙이라는 것은 과거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지금 하나님께 실제적인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변화됨에 있는 것입니다.
2) 요나 - 진정한 짝퉁의 모습을 고발한다!
여러분! 이제 조금 다르게 이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이 되어서, 이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조금 웃기지 않습니까? 이게 있을법한 말입니까? 죽지도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서, 남김없이 허비했던 패륜아가 단지 돌아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같이 저질의 신들을 믿었던 이방인 선원들이 모두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멸망시킨 말 그대로의 ‘악의 축’인 니느웨의 모든 생명체가 회개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 아닙니까? 만약에 이스라엘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졌을 것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바리새인과, 아마도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짜 순수한 오리지널 신앙인이다. 그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훌륭한 신앙의 과거(전통)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에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얼핏보면 신앙인이라고 알려졌던 사람이 실은 짝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짝퉁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첫째 아들을 발견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이 일에 화를 내면서,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28절). 아버지와의 대화에서도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들기까지 합니다. 맏아들에게 둘째 아들은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30절과 32절을 비교할 때에, 우리는 맏아들이 얼마나 메마른 사람이지를 발견하게 됩니다(당신의 이 아들, 네 동생). 이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모르고 있었던 짝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서에서 진정한 짝퉁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 시작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1장 1절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바로 3절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성경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내려가다’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함으로써, 짝퉁 신앙인의 어리석은 모습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요나는 욥바로 내려갑니다(3절). 두 번째로 요나는 배로 내려갑니다(3절). 한글성경에는 “배에 올랐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원어에는 “배로 내려가다”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로 요나는 배 밑층으로 내려갑니다(5절).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한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더욱 심각한 요나의 불순종을 보여줍니다. 요나는 계속해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바다로 내려갑니다. 요나서 2장은 그림을 보여주듯 말합니다. 5-6절에 보면, 깊은 곳까지 내려가고, 바다 풀이 있는 곳까지 내려갑니다. 그리고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서 결국, 구덩이까지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보면, 요나가 물에 빠지자 마자 큰 물고기가 삼킨 것이 아니라, 바다깊은 곳까지 내려간 요나를 삼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위해 내려가다 내려가다, 결국엔 바다밑 구멍에서 물고기 배속에까지 내려가고 만 겁니다.
진정한 짝퉁의 모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진 요나가 어쩔 수 없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3장 3-4절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기에 삼일 정도는 돌아야 하는데, 요나는 하룻길 정도의 거리만 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무성의하게 억지로 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니느웨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예상치 못한 결과로 진전이 되고 만 겁니다. 여기에서 요나의 반응이 예수님의 비유에서의 첫째 아들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요나는 심히 싫어합니다(4:1). 여기에서 요나라는 짝퉁 신앙인의 진짜 모습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말 성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원어성경에 보면 ‘싫어한다’라는 말은 죄악을 말하는 ‘악’(עꙝ)이라는 무서운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싫어한다’라는 ‘악’이 1장 2절의 니느웨의 상황을 말해주었던 ‘그 악독’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실제로는 니느웨가 악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요나가 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까 ‘내려가다’라는 동사를 계속 반복해서, 요나의 불순종을 강조하려던 것과 같이, 4장 1절의 원어를 보면, 요나라는 단어 앞과 뒤에 이 ‘악’이라는 단어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나는 ‘악’에 포위된, 악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요나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뜻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4:2): “여호와의 내가 고국에 있을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요나는 떳떳하게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라고 성을 냅니다(4:3):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요나의 원래부터 가졌던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요나의 본질을 알고 앞의 사건들을 보면, 쉽게 풀립니다. 첫째로, 요나가 폭풍속에서 바다로 던져진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임당수에 빠진 심청이처럼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니느웨에 가기보다,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그의 고집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기도가 요나의 회개의 기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한다면, 3장과 4장에서 요나가 보인 반응과는 안맞습니다. 사실, 요나의 기도는 잘못된 짝퉁 신앙인의 기도를 풍자하는데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세가지 정도만 집어볼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요나는 자신이 지금 물고기 배속에 있는 것이 ‘고난’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2:2). 어느 누구라도 이 기도의 시작을 듣는 동시에 웃음이 터져나올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나는 자신의 신앙이 매우 투철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4절) 대단한 신앙아닙니까? 이 시점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투철한 신앙은 요나에게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1장 9절을 봅시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라” 이번에는 4장 2절 하반절을 봅시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놀랍습니다. 엄청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상, 요나라는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정말로 확실하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 배속에서 의식을 회복한 요나는 착각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할거야! 니느웨? 천만에 말씀! 그리고, 아까 다른 신들을 섬겼던 선원들? 만만에 콩떡!”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으며, 자신 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2:8-9):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요나서 전체를 이제 이해하게 된 여러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착각입니까? 하나님은 말씀 그대로, 이런 요나를 토해내 버리십니다(10절).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짝퉁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던 첫째 아들처럼,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의 성품, 그분의 능력)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짝퉁 신앙인이었을 뿐입니다.
3) 하나님 - 그분과의 공감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라는 것으로 이야기의 종착점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으며, 역시 요나서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뿌리를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없이, 나의 생각과 경험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바로 우리가 그런 짝퉁 신앙인은 아닌가?”하고 되짚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잃어버린 탕자라는 비유를 듣는 1차 대상자는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나서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폐쇠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이 아밋대라는 말은 ‘진리’라는 의미이고, 요나라는 말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부터 이스라엘은 ‘비둘기’라는 동물로 의인화되었음을 알게 된다면, 요나는 다름아닌 ‘진리[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큰 물고기에 삼키움받게 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예레미야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잘못된 삶을 살더라도, 예루살렘 성전만큼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을 고집했었습니다(렘 7:3-4).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멸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놓고, 예레미야는 바벨론이라는 큰 용이 이스라엘을 삼켰다라고 표현합니다(렘 51:34,44). 말 그대로 ‘진리의 아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삼키게 된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기는 커녕, 자신들만이 옳으며 자신들은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노라고 악을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서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기 신앙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우리는 이방인이나 세리와 죄인들처럼, 하나님께 올바른 반응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바리새인이나 요나와 같은 사람일까요? 다시 말해서, 교회생활은 오랫동안 하고, 예배생활도 남부럽지 않게 해서, 나름대로 기본적인 신앙인의 모습은 갖추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가 옳은대로 고집부리며, 나의 신앙의 길(my way!)을 걷는 변질된 신앙인의 모습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우리가 변질된, 짝퉁의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짝퉁의 신앙인들 역시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그들을 무엇보다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나의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그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이유 역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바리새인의 생각을 바꿔주십니다.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눅 15:29):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나이다 … 나는 즐거웠던 적이 없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아들은 자신을 누구라고 믿고 살아온 것입니까? 종이었습니다. 일평생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종교생활에 지친 종의 모습이 자기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아버지는 깜짝 놀라울 정도의 말씀을 하십니다(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렇습니다.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나의 참 아들이었노라” 놀랍지 않습니까! 주일을 섬기며, 남이 하는 것들을 절제하며, 십자가 짐같은 고생을 하는 신앙생활을 했던 바리새인들에게 하늘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종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즐거움에 참여하는 성령안에서 자유함입니다.
요나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어쩌면, 요나서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 이방들보다 열등한 족속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고 우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착각했던 자신들의 교만에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진 존재였었는가를 뼈져리게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과 정말로 멀리 떨어진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그것입니다(4:10-11).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요나와의 거리를 좁히는 공감대를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아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원뜻은 “측은히 여기다(סוּח[후스])”입니다. 이 단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인 ‘인자’(인애, דסח[헤세드])와 근원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요나야! 너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 헤세드가 있단다!” 짝퉁 신앙에서 원조 신앙으로 돌이키는 열쇠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 나와의 공감대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과 나와의 공감대일까요? 무엇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일까요? 무엇이 공감대가 되어서, 나의 짝퉁 신앙을 원조 신앙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변치않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있었으며, 요나서에서는 무너져내려야할 성벽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의 중심에,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는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우리는 비로소 짝퉁 신앙에서 원조 신앙으로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변질 때문에 고민되지 않으십니까? 즐거움없고 종생활하는 것같은 신앙 때문에 신앙에 회의가 들지는 않습니까? 교회 지도자의 충고나 말씀에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신앙생활하며 이것이 옳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여러분의 십자가로 돌아가십시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여러분의 공감대를 되찾는 길 밖에 방법은 없습니다.
3. 말씀이 생활에서
저는 오늘 제목을 “짝퉁에서 원조로”라고 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신앙의 변질은 매우 치명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 밑에 나아와 여러분의 모든 짐을 풀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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