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주인정신"을 돌파하기...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이전 사회는 대도시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경사회였던 옛날은, 물론 중앙집중권력이 언제나 존재했기에 수도와 핵심지역의 도시화는 존재했지만, 지방의 지주들이 오히려 맨파워를 결집하고 특색있는 지역 전통들을 수호했다. 그 안에서 '개인'이란 말은 시대착오일 수 있겠으나, 적당한 '가문'(확대가족)이란 정체성 안에서 개인은 그 존재이유와 구체적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전통사회안에서 개인은, 그들의 존재이유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선택할 수 있는, 주인정신을 보장받았다.
자본주의는 삶의 양식을 바꾸었는데, 개인의 상실이 그것이다. 획일화와 표준화, 그리고 산업화와 효율극대화로 전통사회가 지속할 수 있었던 요소들은 하나씩 상실되었다. 그것의 프로파간다는 기회의 균등이나 무한 성공의 드림을 보여주는 무지개이지만, 그 딱딱한 구조 안에 들어가면 개인은 공장의 콘테이너벨트 안에 움직이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처음엔 혁신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품이 부품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사회학적으로 나타내게 된다. 결국 기업은 자본주의 안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을 살려내야만 했다. 다름아닌 사라진 개인을, 사라지지 않았다고 속삭이는 마취였다. 바로 위(pseudo)-주인정신을 부여하는 것이다.
위-주인정신의 기능은 해당 조직의 톱니바퀴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독려함으로써, 주인이 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업은 조직의 생기를 다시 찾은 것처럼 반가와하면서도, 이윤창출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신기루를 향해서 부품을 재정비한다. 위주인정신-이것은 처음엔 대단한 배려인 것 같지만, 그러한 것이 없이도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상실하게 만든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냉철하게 관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초등학생과 같은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은, 성서의 다양한 언급이 존재하여 독자들이 매우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다윗시대에 헤브론과 세겜/벧엘을 사이에 놓고 정치적 중립지대로 선택된 '안전한' 수도였다. 삿 1:18-21은 MT와 LXX의 차이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헌상으로 역사적 펙트를 얻기 쉽지 않음을 잘 나타낸다. 삿 1:8-10은 후대의 신학적 진술에 가깝다(V. Fritz 2011:56,58). 무엇보다 삿 1:10-15은 수 15:13-19에서 왔기 때문이다(갈렙이 유다지파화되었다). 헤브론 사람뿐만 아니라 더 많은 블레셋 군인들을 보유했던 다윗은 제3의 거점이 필요했고당시 경제중심지였던 여부스 땅을 확보했다(J. Baden 2013:174f). 고대언어학자들은 삼하 24:16의 '아라우나'가 이름이 아니라, 관직/타이틀로 해석해야한다고 말한다(C. Gordon 1997:205; N. Wyatt 2010:67). 즉 MT의 '케레'를 따라서 "아와르나"로 읽을 때, 그말은 후리어로 왕/주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3절은 "아와르나! The king!" 이렇게 다윗이 새로운 왕으로 인정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창 14장의 멜기세덱은, 비록 시대를 알기에 증거가 부족하며(J. J. Collins 2004:84; 그러나 핑켈스타인은 7세기와 관련된 지리적 정보를 찾아냈다), 전형적인 문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T. L. Thompson 1974:188f; 엘리에셀의 게마트리아는 318이다[14:14; 15:2]), 이미 그들의 전통으로 기억된 보편역사화의 과정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해브론의 사람 아브라함이 일찍부터 예루살렘의 왕, 멜키쩨덱을 만났던 일은, 다윗과 사독의 만남을 밑그림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일이다(C. Gordon 1997:218). 사본학적으로 창 14:22의 "야훼"는 추가된 것이므로(E. Tov 2012:261; F. M. Cross 1973:46), 19절과 22절의 차이를 강조할 수도 없다.
결국 고대팔레스타인의 농경사회를 살아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소수의 엘리트가 만들었던 도시화작업의 신학화(프로파간다)에, 처음엔 혼동했을지 몰라도(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위-주인정신과 같은 공통된 기억/전승이란 장치이다), 그 자체는 본질을 대신할 수 없었다. 만들어진 전승은 첨예한 현실앞에 눈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더욱 집중한 예루살렘으로 인하여, 마치 오늘날의 산업화처럼 개인과 전통집단의 상실로 이어졌고, 최종적으로 토지를 가나안에 팔아버림으로써(왕상 9:10) 북지파의 희생을 발생시켰다(B. Halpern 2001:409f). 그러므로 겉으로는 이스라엘이 유다를 배반한 것처럼 보이지만(왕상 12:19~왕하 17:20; W. Schniedewind 2004:80), 실제로 "자기 장막으로 돌아간" 사건은 진정한 주인정신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왕상 12:16).
예루살렘의 위-주인정신은 다양한 차원에서 지속되었고, 놀랍게도 그 피해는 지방의 사람들에게 떨어졌다(M. Sweeney 2012:357). 예언자 미가는, 절대 메시야적 예언의 성취로 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그러한 예루살렘의 정치적-종교적 폭력 속에 외친 셈이다: "예루살렘만 중요하냐! 지방도 살려라!; 미 5:2-5a). (물론, 후대의 서기관들은 그 어떠한 자료를 가지고라도 신명기적역사가의 신학에 따라서 편집하는데 애썼다.)
진정한 주인정신은 '생각에 참여함'이 아니라, 그러한 생각의 이면에 들어있는 '자신의 타자됨'을 적극적으로 돌파해내는 신적 소명의 발견에 있다고 하겠다(막 1:11; 행 26:1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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