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해석>
번역은 해석이며, 그렇기에 그 해석을 또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의 이름과 관련하여, 두개의 에피소드가 창세기에서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이스마엘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이삭이 출생하였고(그 이름이 '그가 웃다'로, 17장 17-19절; 18장 12-15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가까이는 21장 5-6절과 연결됩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이 단지 이름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적 의미인 '웃음/즐거움'과 떠나지 않음을 반복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이삭이 자라니 첫째 아들 이스마엘이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단초가 21장 9절에 나옵니다: 한글(개역개정/새번역) 성서는 이삭을 "놀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개역성서는 '희롱'이라고, 공동번역은 '함께 놀다'라고 번역합니다).
두번째는 그의 아내 리브가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은 흉년을 피해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피합니다. 그러면서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이지만, 결국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보여주고 맙니다(8절). 이 단어를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애무하다'라고 하였습니다(NRSV는 fondling으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모두 같은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 '메차헤크'로, '이츠하크'(이삭)과 비슷한 것처럼, 바로 '웃다'의 분사형입니다. 쉽게 말해서 "놀리다/희롱하다" 혹은 "껴안다/애무하다"는 모두 같은 단어 '메차헤크'(웃음)를 번역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여기에 두번 나옵니다.
창세기 21장 9절을 보면, 사본상으로 (70인역) 무엇인가가 추가됩니다: "그의 아들 이삭과 함께".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놀았다"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NRSV도 각주에 이를 표기합니다). 여기에서 '메차헤크'를 부정적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6절의 말과 같이("사라가 말하기를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라!"), 이삭의 등장 자체가 모두에게 '웃음'으로 나가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이름 자체가 워낙 독특하니까, 이름을 가지고 놀려댔을수도 있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21장을 읽어봐도, 이스마엘이 '메차헤크'와 관련해서 잘못한 일이 언급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합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점은 ESV는 각주에 "possibly laughing in mockery"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해를 강요하는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단어를 두고, 26장 8절에서 의미상의 차이는 현격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ESV로, laughing with 라는 '문자적' 번역을 하였지만, 역시 각주에 'Hebrew may suggest an intimate relationship'이라고 설득적이지 못한 설명을 강요합니다. 똑같은 단어에 좌/우가 너무 다르죠. 오히려 히브리어를 보면, '이츠하크 메차헤크'로 이삭의 이름과 '웃음/즐거움'이 언어유희가 되는 식으로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리브카'가 '바라크'(복)이라는 단어와 말장난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삭이 자기 이름으로 놀림을 받았던 것과 반대로, 이번엔 리브카의 이름을 말하자면 '복녀'라는 식으로 놀렸다는 그림도 가능합니다. 어찌 되었건, 아비멜렉이 무엇인가를 봤다 했으니, '웃음/즐거움'이 "껴안다/애무하다"의 표현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은 있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공평하지 못한 번역을 했는가 입니다. 이런 말은 앞서 제기했던 것처럼, 모든 번역은 해석일 수 밖에 없으며 자명한 결과이며,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러한 해석자체에 대해서 마땅히 해석해야함을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왜 이스마엘은 '악당'이 되어야만 했느냐 입니다. ESV는 간단하게 바울을 변호인으로 제시합니다. 갈 4장 29절입니다. (과연 창세기 본문 자체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허망한 것은 어떤 주석가들은 이스마엘을 유아성추행범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점입니다[NICOT]. 그러한 성추행범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니요!(창 21:18) '메차헤크'의 편파적인 이해에 대해서 Westermann(339)이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정치적 수사입니다. 사라와 하갈의 관계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사라는 놀라운 대명사로 등장합니다. 바로 '여주인'입니다.(4,8,9절) 이 단어가 단지 '주인마님' 수준이 아님은, 이 "게비라"라는 히브리어는 '왕의 어머니, 황후, 왕비'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왕상 11:19; 15:13).
'왕비' 사라의 입장에서, 이미 왕권 경쟁은 하갈의 임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이요. 이스마엘이 어떻게 이삭에게 다가온들, 그것은 창 21:6의 '함께 웃음'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정치와 하나님의 정치가 미묘하게 엮인 상황에서, 사라의 정치는 순간적으로 빛을 발휘하였지만, 하나님의 정치는 더 먼 그림을 그렸습니다(25:12-18). 같은 단어라도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빨갱이와 애국자가 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점에서, 번역도 다시 한 번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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