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렘 33:16

진실과열정 2020. 1. 8. 13:32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16)


치유와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이 평화와 의로움으로 추상화되었다. 사실 렘 33:14-26은 (히브리어구약성서의 헬라어번역본인) 칠십인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영향력있는 연구들은 칠십인경이 모델로 삼은 '또 다른 히브리어 예레미야 두루마리'를 우리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BHS보다 더 정통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면 렘 33:14-26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물론 아무도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그 주요한 표현들이 예레미야서의 어떤 곳에 등장하기에, 당연히 '인터텍스쳐'는 발동한다(고대 서기관들의 '고대적 인터넷수사대'가 작용한 것이리라). 그곳은 바로 렘 23:5-6이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사실 이 내용은, 무조건적으로 신학적 혹은 기독론적으로 읽기이전에, 시드기야에 대한 예언이었다(렘 22장부터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서, 신학적해석에 묶인다.).


그러므로 렘 33:14-26은 어느 후대의 서기관에 의한 렘 23:5-6의 주석이라고 볼 수 있다. BHS의 전통에서, 훨씬 보수적이고 또는 지나칠 정도로 유일신론적인 신앙을 가진 지적엘리트는, 신앙이데올로기를 사용해서 시대의 변화를 꿈꾸었다. 놀라운 점은 이런 것이다. '실패한 모델을, 새로운 시대에 재사용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 정치평론가가 있었다면 (오늘날의 비열한 정치책략가처럼) 이러한 평가를 할지도 모른다: '이봐~ 그러한 문구/비전은 옛날에도 있었다구! 거~ 몰라? 시드기야말이야~ 그런건 안되.' 또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본다면,) 수구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이런 것이겠지: '제2의 노무현이 나오려고 한다면, 바로 실패의 재탕이라는 정치논리로 격파하자!' 아마도 누가 등장하든 또는 등장했었든지 이러한 '실패자프레임'에 가두어놓고 색칠했던/할 것이리라.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렘 34장). 그럼에도 BHS의 꿈꾸는 예언자의 전통은 '실패자프레임'을 정면 대결로 격파했다. 그게 참 대견하다. 한 번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은 될 때까지 어쩌면 상당히 미련하신 방법으로 똑똑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정말, 한국사회나 한국교회는 렘 33:16처럼 읽어내는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전문가들이 회의적일 때, 무지개를 그려보기로 하자.


그런데, BHS의 도전자들은, 신앙인이었음이 분명한데, 예루살렘 성의 회복은 단지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레위제사장의 회복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새로운 '진화적/발전적' 영적/지적 각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렘 33:17-18은 레위제사장의 존재를 새롭게 부각시킨다. 이어서, 새로운 단락인 렘 33:19-22 역시 레위인은 '다윗의 자손'과 함께 회복되는 존재이다(참고, 아마도 슥 3-4장과 슥 6:9-13의 '메시지의 공명'은 렘 33의 BHS의 편집과정을 추적해낼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M. Fishbane 1985: 473; Karel van der Toorn 2007: 132; T.M. Law 2013: 53). 한국사회의 회복에서 우리 신앙인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


그러므로 한국사회, 한국교회의 치유와 회복을 읽어내는 소망의 말씀으로 렘 33:14-22은, 일차적으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proto-HB예레미야서가 꿈꾸었던 회복자/구원자(역사적 시드기야; 렘 23:5-6)였지만, 시드기야('야훼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의 뜻)는 실패했고, 비록 그랬지만 '실패자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다시 예언자적 메시지에 소망을 두었던 포로기의 기도였으며(BHS), 더 나아가서 포로후기 신앙공동체를 지탱해주었던 예언자적 주된 메시지로 확산/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스가랴의 환상). 나사렛 예수께서 '티베리우스 가이사가 왕으로 있으며,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눅 3:1-2),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성전을 청소하셨을 때, 예언된 회복은 그 시작을 알렸다.


렘 23장의 시드기야 '개인'은 렘 33장에서 '성city'이 되었고, 스가랴서에서는 왕정과 종교의 '결합체'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것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후로 최종적 완성체로 나타났는데,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비전의 공동체가 교회이다(N.T. Wright의 그 두꺼운 바울연구가 내게는 '그러한 변화된 교회를 정말 제대로 세워보자!'로 요약된다).


치유와 회복의 절정은,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들의 시대에, 오늘이 어제보다 더 '평화스럽고 의로워졌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오늘이 클라이맥스가 되도록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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