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탄 (2018년 12월 25일, 깊은샘수원교회)
본문: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 말씀 앞에서
저의 아이들이 한국에 들어온지 20일이 되어갑니다.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우리말을 읽는 일입니다. 매일 저녁에 성경 한장을 읽는데, 돌아가면서 한절씩 읽습니다. 읽다가 이해되지 않아서, 자꾸만 이게 뭐야 라고 묻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말은 한자어로 만들어진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짧고 부르기는 쉽지만, 그 뜻을 모르면 헷갈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보혜사, 짧고 부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읽자마자 바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해주어야, 아! 그렇구나 라고 알게 됩니다. 보혜사는 한자어죠(보: 보전하다/지키다; 혜: 은혜를 베풀다; 사: 스승).
그런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뜻을 먼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이 그렇습니다. 성탄은 거룩한 탄생이지요. 구별된 출생, 그래서 성탄은 아무 사람에게 붙일 수 없습니다. 바로 왕이나 성인이 태어났을 때, 성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라고 할때, 이 말은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세종대왕이 아니고, 로마 황제가 아닙니다.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의 날이 크리스마스이고 성탄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날, 메시야의 날, 곧 왕이 태어나신 날이기 때문에, 예수님 그분이 나의 왕이신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신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 나의 왕이심을 믿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탄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외롭기도 하고, 일년의 마지막 시기이기도 해서, 커다란 트리에 여러가지 장식을 하고,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고, 연인들 끼리 선물을 주고 받으며 하루 편하게 쉬는 것은, 장사꾼들이 만들어낸 속셈입니다. 예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날이, 나의 그리스도, 나의 메시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 예수님의 거룩한 탄신일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감격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보다 환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것을 믿는 자에게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과 이후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정말 다릅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면서, 정말로 이기적으로 자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들을 못살게 굽니다. 정말 대통령이 되기 이전과 이후가 다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과 그 이후는 세계 역사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의 왕이 우리를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 이전과 이후가 달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감격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의 아주 짧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무엇이 변하게 되었는지를 두가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첫번째로 우리와 세계와의 변화이고, 두번째는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무엇보다 말씀 자체를 외우고 마음에 새기고 우리 삶에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2. 말씀 안으로
1) 우리와 세계의 변화
오늘 말씀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여러분, '말씀'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성경일까요? 여기에서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이 로고스라는 것은, 단순하게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말 처럼 '말씀'이라고 번역될 수 없는 복잡한 내용입니다. 이 '로고스'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로고스를 설명하면서, 그 뜻이 너무 심오하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덧붙이고 있습니다. 로고스는 처음부터 있었다(1절); 로고스를 통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3절); 그러므로 이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다(4절); 이 로고스 안에 빛이 있다(5절); 이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2절), 바로 이 로고스는 하나님이다(1절). 그렇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우리에게 '로고스'를 알려주면서, 어느 하나로 요약할 수 없는 신비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그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누가 내가 하나님을 똑같이 그렸습니다! 라고 한다면, 당장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게 바로 요한이 살고 있었던 그리스 세계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혹시 여러분,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말은 정신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생각으로만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실제 섬김이나 돌봄이 없이, 그냥 서로 생각으로 통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플라톤이란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데아라는 이론을 전했습니다. 자, 여러분 손가락을 들어서 원을 그려보십시다. 여러분이 그린 원이 정말 정확한 원입니까? 플라톤은, 정확한 원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원은 우리 머리속에 생각속에, '이데아'라는 논리세계, 즉 '로고스'안에 있는 것이지, 실제 원은 우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 세계('로고스')와 이 세계('코스모스')는 도저히 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입니다. 그 플라톤 철학이 요한이 살고 있는 그리스 세계의 토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복음을 외치게 됩니다. 플라톤 철학이 진리가 아니다! 플라톤은 로고스가 코스모스 안에 절대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낸 한계이다. 역사 속에 딱 한 번, 로고스가 코스모스 안에 들어오게 된 일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성탄이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가 육신이 되신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이, 바로 성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로고스가, 저 세계에만 있어야 하는, 창조원리, 참된 생명, 꺼지지 않는 빛, 그러한 하나님이, 코스모스 안으로 온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영이, 만지고 듣고 볼 수 있는 육체가 된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요한복음의 주장은,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플라톤 철학으로 탄탄하게 세워진 그리스 로마 세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세상과 다르게 살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것을, 우리도 똑같이 믿으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있어도, 우리와 관계없이, 저 먼 곳에서 있을 뿐이야!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 하나님은 나의 삶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우리가 겪는 고난, 우리가 맞서야만 하는 거대한 삶의 문제들 앞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말씀일 뿐이야, 말씀이 진짜 이뤄지는 거 봤어?
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그렇습니다. 요한은 증언합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이 분명히 보았고 들었고 만졌다고 말합니다.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로고스가 코스모스 안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삶의 문제를 치유하셨다! 이것을 믿으라! 그렇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얼마나 깊이 관심을 두고 계시는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맞서는 거대한 문제들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임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서 큰 곤란을 당한 가정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표적입니다. 단순히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을 순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감정적인 선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 분이 내 삶의 모든 부분 속에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함을 요청하는 도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모진 운명을 하소연할 뿐,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감히 꿈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가르쳐주시면서, 평생의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이며, 하나님의 때에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될 것임을 믿으라는 도전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저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셨다.” “생각에 있었던 말씀이, 내 삶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어떻게 그 것이 가능할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기도입니다. 믿으십니까?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예수의 어머니의 간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간구했습니다(요 9:36). 주님께 구하면, '말씀은 육신이 됩니다!'
요한은 떳떳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생명이, 하나님이신 참 빛이, 우리 안에 거하셨다! 우리가 그 생명을 힘입어 살고 있다. 우리가 그 능력을 힘입어 고난을 이겨낸다. 우리가 그 빛을 따라서 거짓된 세상을 밝혀나간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체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진리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었던 근거였습니다.
2) 우리 안에 나타난 변화: 예수님 바로보기
두번째로 우리 안에 나타난 변화입니다. 우선 말씀을 읽어봅시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가르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내적인 변화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당시 플라톤 철학을 말하는 것이라면, 후반부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편협한 생각을 고쳐주는 언급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유일신을 믿고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것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시편 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모세의 율법 안에서 이미 선택된 백성이라고, 축복된 혈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 곧 천사를 믿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 뿐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천사를 믿고 숭배하며, 모태신앙이니까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요한은 '독생자'를 가르쳐줍니다. 구원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 구원은 독생자 예수님밖에 없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요한은,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와 진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속성(헤세드, 에메트)으로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주여, 주는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시 86:15);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그렇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인자와 진리였습니다. 이 인자와 진리는, 천사들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한 분에게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복음 말씀을 한절 한절, 한장 한장씩 읽어보십시오. 곳곳에 은혜와 진리가 차고 넘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침례요한의 만남을 생각해보세요!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자마자, 아! 저분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그 놀라운 고백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역사함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과 우물가의 여인의 만남을 생각해보세요! 남편이 다섯이나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낮에 우물을 떠야만 했던 사마리아의 여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여인에게 은혜와 진리를 주셨습니다. 삼십팔년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이 주시는 은혜와 진리를 경험했습니다. 할렐루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이 내 살이고 내 피다 라고 하실 때,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바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차고 넘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오직 독생자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는 넘쳐납니다. 그 은혜와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험되었던 실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잘 지킬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굳어져버린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몇 걸음만 걸어야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야! 그들에게 종교는 삶을 제약하는 쇠사슬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진리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리는, 오히려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의 신앙관을 율법신앙에서, 은혜와 진리를 경험하게 하는 역동적인 신앙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요 15:26).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성령님은 이 세상의 모든 신앙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파라(옆에서), 칼레오(말하다). 즉, 언제 어디서나 우리 옆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시는,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를 경험하는 신앙은, 율법의 신앙을 뛰어넘어, 참 신앙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의 신앙에 만족하지 맙시다. 옛날에 좋았던 신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현재형입니다. 신앙은 오늘 은혜와 진리를 경험하는 체험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합시다. 성탄은 성령 충만을 선포하는 위대한 날입니다!
3. 말씀이 삶 속에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처음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선포처럼, 처음 교회의 선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구약에서 예수님을 보내실 하나님의 섭리를 읽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탄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누가는 이방인들에게 누가복음을 쓰면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가 다스리던 시대에 참된 평화의 왕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요한복음은 역사가 아닌, 신학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줍니다. 바로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로고스가 이 세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에게, 아니다! 로고스가 육신을 입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너의 삶에 큰 관심이 있다. 예수님은 저 세상의 로고스가 아니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실제이다! 그러니,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날마다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라!
또한 요한은 모세의 율법을 고집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고쳐줍니다. 율법 신앙으로는 은혜와 진리를 전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독생자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넘쳐납니다. 옛 신앙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날마다 성령을 사모하고,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로 함께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기록한 것은,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경험하는 복음입니다. 바로, 예수님 한 분 만으로 경험되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할렐루야! 이 복음의 시작은 우리를 초청합니다. 성탄절은 빨간 날이어서 놀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탄절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날임을 세상 속에 선포해야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속속들이 역사하심을 간증하십시오.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진리를 세상 속에 드러내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삶에 비포와 에프터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역사이자, 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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