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세야, 노래를 불러라! (2019년 1월 6일, 깊은샘수원교회)
본문: 신명기 32장 39절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1. 말씀 앞에서
이번 성탄에는 캐롤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전같으면 거리마다 기쁨의 캐롤이 울려퍼졌겠지만, 이번 성탄은 그야말로 조용했습니다. 그 이유가 저작권 때문이랍니다. 한마디로 돈을 내고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세상의 노래는 그 목적이 돈이고, 그 결과가 돈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아무나 사용하지 못합니다.
오늘 저는 모세의 노래를 여러분에게 들려주려고 합니다. 제가 모세에게 돈을 내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르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라도 읽고 들으시오! 마음껏 듣고 구원을 받으시오!” 성경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영혼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구원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은혜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신 31:30): “그리고 모세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끝까지 불러, 이스라엘 대회에 모여 온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려주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모세야, 노래를 불러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출애굽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해서 징계를 받았지요. 40년이란 징계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로 눈 앞에 두고, 모세가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새로운 땅입니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지 않겠습니까? 좋은 시작을 위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두가지를 남겨줍니다. 첫번째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신 31:26),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모세의 노래입니다(신 31:30): “그리고 모세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끝까지 불러, 이스라엘 대회에 모여 온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려주었다.”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노래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의 노래를 들을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가 어떻게 신앙의 길을 걸어왔었는지 들어봅시다. 그 신앙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만 하는지, 마음을 열고 잘 들어봅시다. 모세의 노래가 내 자신의 노래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울림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노래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노래를 불러라!”
2. 말씀 안으로
1) 모세, 노래를 불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고?”
모세의 첫번째 노래입니다. 제목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고?”입니다. 이 노래를 어떻게 불렀을까요? (어쩌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고~, 아리랑 버전) 제 생각에 모세는 이 노래를 최소한 40년 동안 불렀을 것 같습니다. 같이 불러보시겠어요? (어쩌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고~) 모세의 감정이 느껴지십니까? 사람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은 묘한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정신 못차리게 막 흔들어대다가, 어느 순간 멈추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고?”
모세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고 좋은 이름을 정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모세는 시간과 공간의 힘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불렀던 노래말처럼, 아들의 이름을 '정처없는 나그네'라고 지었습니다(출 2:22):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
아들의 이름을 '객자'라고 지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좀 더 살펴봅시다. 모세는 자신이 걸어온 삶의 길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말씀을 연구해보면, 모세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이집트로 돌아올 때,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출 4:24-26). 그러자 모세의 아내가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세여,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이 모세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지금까지 모세의 아내는 모세를 하찮게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았을까요? “어휴 저 문딩이 자슥~ 에굽에서 왕자였으면 뭘해. 사람을 죽인 도망자이고,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그냥 날마다 양들을 데리고 빈둥빈둥 시간만 허비하고.. 에휴 내 팔자야~” 이렇지 않았겠어요? 아브라함 이후로 이스라엘의 부모는 아들에게 할례를 줍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럴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를 하찮게 본 아내가, 모세의 하나님도 하찮게 보았겠지요.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아내가 변화된 것입니다. 아무튼, 모세는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아버지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모세는 에굽의 왕자였다가 사람을 죽여서 도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출 2:11-15). 자신의 힘과 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일어섰다가, 하루 아침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지요. 성경에는 모세가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출 4:10). 에굽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군사훈련 뿐만 아니라 웅변같은 말하는 훈련도 충분히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도망자로 살면서, 패배자로 살면서, 그 모든 것들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주눅이 들어서, 인생의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그냥 하루 하루 살면서, 양들 앞에서 노래나 부르는 그런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어쩌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고~”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루이빌이란 곳에서 살았습니다. 위로는 시카고가 있고, 아래로는 아틀란타가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시카고나 아틀란타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님들이 가끔씩 이런 고백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어쩌다가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죠?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을 하겠죠? 그때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죠. 우리는 모르죠. 그런데요. 집사님, 하나님께서 하셨잖아요.” 미국에서 섬겼던 한인교회는, 미국예배당 지하식당을 빌려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아침 8시에 나와서 접이식 철제의자를 펴고, 무거운 피아노와 악기들을 나르고, 강대상과 마이크를 날마다 세팅해야 했습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한 날부터 그렇게 어렵게 했고, 지금까지 고생하며 교회를 섬깁니다.
처음에 그 교회에 가서 속으로 많이 놀랬습니다. “아이고 주여.. 세상에 이런 교회가 다 있네요..” 그런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차가운 철제의자를 접고 나르고 하면서, 주님을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이 교회로 보내셨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주시려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내 힘과 지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더 주님을 의지하라고, 주님께서 저를 여기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요.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를 다시 생각해보세요. 모세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출 2:10). 모세가 우연히, 어쩌다 보니 목숨을 건지게 되었나요? 아닙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목숨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건져내셨던 겁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우연히 살아난 것 같고, 어쩌다가 보니 이 자리에 내 던져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살리셨던 것이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서 모세는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모세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 32장에서 모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6하반절):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알려준 노래입니다. 나도 어리석어서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 내가 세상에 버려진 것만 같은,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아!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 그는 네 아버지시다! 여호와 하나님, 그는 너를 지으신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모세의 첫번째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모세가 아기였을 때부터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요?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2) 모세, 노래를 만나다: “거룩! 거룩! 거룩!”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세의 두번째 노래를 듣게 됩니다. “모세, 노래를 만나다.” 그동안 씁쓸한 인생의 노래를 불렀던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가 위대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홍해를 건넌 다음 모세가 여호와께 노래했다고 합니다(1절). 에굽에서 나왔는데, 뒤를 보니 에굽군대가 병거와 마병을 총동원해서 쫓아옵니다. 앞에는 거대한 홍해가 삼킬듯한 파도를 높이며 가로 막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개죽음을 당할꼬' 한탄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믿음으로 손을 들었고, 홍해를 둘로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2절):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할렐루야!
어떻게 모세는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슬픔이고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의 삶은 기쁨이고 찬송입니다. 맞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노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노래는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노래는 죄인의 몸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거룩한 노래는 거룩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홍해에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거룩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진정한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두번째 노래는 거룩의 노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뜻합니다. 패배자였던 모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불이 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출 3:2).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모세야, 신을 벗어라”(5절). 이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만나려면, 너의 과거를 벗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발은 위험한 길에서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그동안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내 신발이 나를 보호하고 지켜준다. 내 손이, 내 머리가, 내 돈이, 내 지식이 나를 지켜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 신을 벗어라”. 너를 보호하고 너를 지켜주는 것은 나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이것을 믿고, 네가 내 품으로 들어온다면,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할렐루야.
모세는 믿음으로 신발을 벗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모세는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모세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거룩한 노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노래, 진리의 노래, 사랑과 소망의 노래가 하나님으로부터 터져나왔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마치 이사야가 홀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 곁에 천사들이 노래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이사야가 불로 깨끗해진 후에 변화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모세는 그 불 속에서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배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여기에는 금으로 된 장식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높이 솟은 기둥도 없습니다. 찬란하게 빛을 비춰주는 스테인드글래스도 없습니다. 화려한 스피커나 섬세한 악기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초라해도, 이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호렙산의 떨기나무는 가장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니,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믿음이 요구됩니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려고, 하늘의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 '그래, 내 신을 벗으리라. 내가 입은 죄의 옷을 벗고, 주님이 주신 의의 옷을 입으리라. 내 신을 벗고, 주님이 흘리신 보혈을 지나서, 하나님께 나아가리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 분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을 누리리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리라. 그분이 살아계심을 선포하리라. 그분의 역사를 찬양하리라!' 우리 그 믿음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노래한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그렇습니다! 이 놀라운 노래를 바울이 이어 받았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할렐루야!
우리 마음을 정합시다. (따라합시다): “내 신을 벗고, 보혈을 지나서,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겠습니다!” 모세가 진정한 노래를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변화된 것처럼, 여러분도 예배를 통해서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진짜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3) 모세, 노래를 나누다: “형제여! 은혜를 잊지 마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진짜 노래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불렀던 세번째 노래, 마지막 노래입니다. “모세, 노래를 나누다”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모세가 부르는 노래가 신명기 32장인데, 이 부분이 가장 깁니다. 가장 압축적으로 요약할 수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15절):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 귀한 믿음에서 뛰쳐나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배가 부르니까,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때, 공동체를 깨뜨리는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려운 환경이 있었지요. 광야에 놓여졌으니 눈 앞에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목마르고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면서 에굽으로 돌아가겠다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기도 했습니다. 사람 사이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왜 아론만 제사장이 되느냐! 우리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네 팔이 그렇게 굻냐! 우리 한 번 대보자! 하면서, 공동체를 분열시켰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이 사라졌다고 착각을 했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믿고, 공동체를 죽음의 길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그래요.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은 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지켜내는 것이 정말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길고 진중하게 공동체를 지킬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분열할 때마다, 법궤 안에 들어있는 세가지를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무엇입니까?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깨어진 돌판입니다. 이스라엘이 분열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묶으셨던 흔적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신앙은 공동체적인 일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식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손가락이 되는 것이고, 내가 발가락이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공동체에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이 말은 교회를 옮기지 말라는 위협이 아닙니다. 믿음 그 자체를 버리게 될 때,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을 업신여기게 될 때, 그 공동체는 손가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무나 길게 노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형제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마시오! 자매여!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마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수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같이 바울이 세웠던 교회에 위기가 닥쳤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가지 문제로 신앙 공동체가 깨지려고 하니, 바울은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주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환경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 관계에도 사단이 질투와 미움의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붙잡는 믿음보다 세상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법궤를 주셨지만,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환경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시기와 질투가 생겨날 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나눈 마지막 노래였습니다.
3. 말씀이 삶 속에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진정한 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진정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가 모세처럼 신앙의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이제는 인생을 후회하는 노래를 멈추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보혈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그분의 살과 피는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의 신을 벗고, 보혈의 강을 건너십시오. 보혈을 지나서 아버지 품에 안기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그리고 우리 깊은샘 수원교회가 이 귀한 신앙의 노래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주님 오실 때까지 승리의 노래를 끝까지 부르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자리에 일어나셔서, 하나님께 사랑의 노래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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