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빌립보서 설교: 높은 몸, 낮은 몸, 영광의 몸

진실과열정 2018. 12. 27. 14:19

제목: 높은 몸, 낮은 몸, 영광의 몸 (2018년 12월 16일, 깊은샘수원교회)

본문: 빌립보서 3장 21절 (빌립보서 3장 2절-4장 3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말씀 앞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기도하고 묵상하고 풀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인가여러분, 오늘 이 설교가 설교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귀로는 듣기 좋으나 아무짝에 쓸모 없는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렘 23:16). 그러나 이 설교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귀에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그 말씀은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귀한 설교의 자리를 내주셔서, 또한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귀한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임을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와 저의 식구들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그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것처럼, 7 동안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잘 훈련을 받고건강하게 지냈습니다. 끝!


이제 우리의 초점을 말씀 안으로 옮길 시간입니다. 오늘 저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우리 깊은샘 수원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이룸 전도사님이 광고하신 것처럼, 오늘 오후에 바울이라는 영화를 보게 됩니다. 정말 기대가 됩니다. 오늘 설교와 함께, 오후에 영화를 보시면 하나님의 사람 바울에 대해서 더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2.   말씀 안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높은 몸, 낮은 몸, 영광의 몸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핵심말씀을 다함께 읽어봅시다(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감옥에 있다는 말은, 바울이 무엇인가 잘못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감옥에 있는 것일까요? 그럼, 바울이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바울은 사상범입니다. 즉, 당시의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 그리고 바울은 위험한 이야기를 전파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활동했던 로마제국은 그리스 철학을 허용했습니다. 그리스의 아테네에 가보면 세상 별의 별 사람들이 저마다 개똥철학들을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로마는 그런 철학자들을 사상범이라고 잡아 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바울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왜요? 바울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메시야인데, 즉 (헬라말로) 그리스도인데, 그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고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2: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는 세상의 심판자로 곧 재림하실 것이다(살전 4:15-17).” 그래요.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 곧 왕을 말합니다. 예수라는 왕이 세상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당했다고? 로마의 그 어떤 철학자도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죽었더가 부활했다는 예수가 다시 재림해서 세상을 심판할 거라고? 로마의 평화를 바라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이 말은 사회를 전복시키는 위험한 이야기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고, 세상과 격리시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한국의 국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이고 정치적인 기준에서만 해당됩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바울과 같은 사상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아니 우리는 세계인으로 살고 있지만, 세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전혀 다른 한 가지 진리를 최고의 기준으로 삼고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나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다입니다. 

 

1)   높은 몸: 베냐민의 사울

바울에게는 옛 이름이 있습니다. 아주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어로 얻어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삼상 1:27).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초대 왕 사울과 같은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똑같이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청년 사울은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베냐민의 사울은 자신이 얼마나 귀하신 몸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태어난 지 팔일만에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뿌리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자기는 토종 히브리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정치적, 사상적인 면으로 자신은 바리새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완전하게 율법에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직 율법을 위해서 스스로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만, ‘바리새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사울은 율법만을 최고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맞지 않는 기독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메시야(왕)는 십자가의 저주를 받을 수 없지요.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십자가를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생겨나더니 십자가의 예수가 참 메시야라고 떠들어대는 겁니다. 베냐민의 바리새인 사울이 이 모습을 가만히  수 없는 겁니다. 한 손에 율법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 심판의 을 들고,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울의 모습을 정확하게 이렇게 요약합니다(행 9:1):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이 말은 살인자의 위협이 느껴지는 숨을 쉬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숨을 쉬는데,  숨이 얼마나 차가운지 사람을 죽이는 그런 숨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울의 과거였습니다. 한손에는 율법, 한손에는 칼.


오늘 빌립보서에서 그런 사울의 과거를 육체를 신뢰했다라고 말합니다(빌 3:4). 육체의 법에 따랐던 과거입니다. 성령이 아닌 육체의 법에 따를 때, 우리는 세상의 법에 따르는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자신이 높아지는 것만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육체를 신뢰하는 세상은오직 한가지 법칙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약하면 육, 고기가 되지만, 강하면,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법칙은 단 한 가지입니다. “저 위로 올라가시오.”  그래야 당신이 삽니다. 남을 밑으로 내려놓고, 그 위로 올라서시오. 그래야 당신이 삽니다. 남을 뒤로 넘겨 두고, 그 앞으로 나아가시오. 그래야 당신이 삽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고 당신의 생각만 이루어지게 하시고. 그래야 당신이 삽니다. 오! 여러분, 그래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오! 여러분, 그래서 가인이 형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오! 여러분,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아주 먼 옛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우리를 옭아매는 사단의 전략인 것입니다. “너만 옳다고 생각해라.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하고지금까지 얼마나 악착같이 버텼는데. 네 생각만이 옳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지키려고 했고,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신앙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잘못된’ 신앙인입니다. 신앙의 목적이 육체를 신뢰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의 목적이 자신이 높아짐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신앙의 방법으로 세상의 법칙(약육강식)을 이루려는 잘못된’ 접근을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저를 매우 난처하게 합니다. 저도 신앙인인데, 저는 잘못된’ 신앙인은 아닐까? 신앙이란 방법으로, 세상의 법칙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내가 높아지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베냐민의 사울입니다. 베냐민의 사울은 높은 몸을 지향합니다. 거짓 신앙의 목적은 높아지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출생으로, 자신의 지식으로, 자신의 돈과 명예로, 자신의 자녀들과 자신의 사업으로 높아지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율법으로, 자신의 말씀으로, 자신의 기도로, 높아지려는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할 때, 그것은 베냐민의 사울이 되는 것입니다. 

 

2)   낮은 몸: 예수의 종 바울

높은 몸 베냐민의 사울이,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고 난 후에 낮은 몸, 예수의 종 바울이 됩니다. 성경은 바울이란 이름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전에는 사울이었는데, 이제 바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정도입니다(행 13:9).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바울이란 이름은 파울루스라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미국사람들은 처음 본 사람들끼리 만나자 마자 이름을 물어봅니다. 그런데 제 이름은 미국인들이 발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식 이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나옵니다. 마땅한 이름도 없고, 나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이름이 라서, 어떨 때는 제임스, 다른 날은 제레미야가 되기도 합니다. ‘파울루스라는 헬라식 이름은 그 당시에 매우 보편적인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시의 사람들이 누구라도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 바울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치 옛날에 노비 개똥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사울은 개똥이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종 바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육체의 법칙대로 살았던 사울에서, 예수의 종 바울로 만들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건입이다(행 9:3-9).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세번이나 다메섹 도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22:6-11; 26:12-19). 세번이나 언급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어요맞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표현이 아닌) 바울 자신이 그 놀라운 경험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이 만남을 계시/나타내심라고 말합니다(갈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여기에서 말하는 나타내심은 계시입니다(갈 1:12). 다시 말해서, 가리웠던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체와 율법에 가리웠던 사울의 거짓 눈을 벗겨내고, 성령과 생명의 예수를 직접 보게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이 있어 보았다고 하지만, 육체의 법/육체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그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리운 것이 벗겨지고, 예수를 보아야 진정한 신앙으로 보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참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바로 눈이 가리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치유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의 중요한 핵심에는, 거짓에서 진리로 이끄시는 근본적인 변화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고난 후에, 드디어 사울은 전혀 새로운 법칙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낮은 몸 바울입니다.


그동안 높아지는 것,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의 영광을 직접 경험하고 난 후에, 그의 목적은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목적은 예수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종이라는 말은, 이제 바울은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이어받아서 완수한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서울로 가는데, 종이 부산으로 갈 수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의 일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새로운 목적을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갈 1:16).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은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불가능한 거짓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고 난 후에, 자신의 모든 목적을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에게 모았던 것입니다. 그를 전하리라!


그런데바울은 예수를 세상에 전하는 유일한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굴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깨닫고 어느 누구보다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그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써, 그는 더욱 겸손하고 더욱 낮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예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의 말씀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이 깨달음을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우리에게 돈을 잘 버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단 한가지 이유는, 세상의 법칙에 살고 있는 죄악된 영혼들을 건져내서그 영혼에 썩지 않는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죽은 영혼에게 참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종인 바울 역시, 그의 인생 목적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 높은 왕의 자리로 오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은 이렇게 낮고 낮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가! 가장 낮아지는 그곳에서비로소 그 영혼을 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높은 자리를 뒤로하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예수님이 나의 발을 닦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빌 3:7-9상):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얻고자 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높은 곳에서 내려오십시오. 우리 주님과 함께 가장 낮은 곳으로 가십시오. 나와 우리 성도님들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좀 더 낫지” 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날마다 나에게 나타나시는 예수의 겸손을 닮아가시기 바랍니다. 


3)   영광의 몸: 예수를 좇아가는 바울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의 과거(높은 몸)와 바울의 현재(낮은 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미래를 볼 것입니다. 이 미래는 우리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높은 몸으로 살았음을 회개했습니다. 육신으로는 높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죄악된 세상 법칙에 찌든 몸입니다. 이제 바울은 예수님과 같이 낮은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겸손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참 신앙안에서 미래를 꿈꾸게 됩니다. 바로 바울 그 자신이 예수의 부활을 온전히 좇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참 신앙인은 두번째, 세번째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바로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이 세상의 인생이 아니라, 부활을 잡으려고 주님의 뒤를 좇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의 말씀입니다(10-12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2)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할렐루야!


바울은 놀라운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 비전이 바울의 미래였습니다(빌 3:20-2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영광의 몸을 덧입고 싶지 않습니까?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고전 15:44)? 그렇다면, 먼저 사울이란 이름표를 떼어내십시오. ‘높은 몸의 옷을 벗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겠노라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 예수님의 종이라는 이름표를 새로 다십시오. ‘낮은 몸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손수건을 원하시면, 내가 손수건이 되어서 성도의 눈물과 땀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걸래를 원하시면, 내가 걸래가 되어서 더러운 곳을 닦아내야 합니다. 내가 높아지면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내 생각과 내 경험을 모두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바울처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좇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비로소 영광의 몸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깊은샘 수원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을 기대합니다.


 

3.   말씀이 삶속에서


말씀을 정리합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결과적인 반응입니다. 바울은 기쁨이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중요한 핵심 진리들을 그 중심에 박아 넣었습니다. 마치 반지의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도 빌 3:1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성도들에게 기쁨의 반응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빌 4:4에 다시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다시 요청합니다. 그렇게 볼 때, 3:2부터 4:3까지 왜 기뻐해야하는지를 가르치는 보석과 같은 진리가 담겨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위험한 사상범이 되어서 로마의 감옥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신 분이십니다(빌 2:5-8).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분이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십니다. 바울이 기뻐했던 이유는바로 예수님이 이렇게 낮아지셔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이제 예수님처럼 낮은 몸이 되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서, 자신도 영광의 몸으로 부활할 것을 사모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캄캄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지만바울은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험한 세상 속에서 오히려 참 신앙인은 부활을 좇으며, 넉넉히 이겨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몸은 어떤 몸이십니까? 우리, 낮은 몸이 되십시다. 철저하게 낮아지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시고자 할 때, 우리 깊은샘수원교회의 낮은 몸을 입은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립시다. 우리 모두 부활의 몸을 좇아가며,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