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설교: 얻어 먹은 주의 말씀]

에브라임과 므낫세(창세기 48장 15-20절)

진실과열정 2018. 11. 16. 11:09

본문: 창세기 4815-20

제목: 에브라임과 므낫세

       "하나님은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한마음교회 고별설교, 20181111).

 

1. 말씀 앞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고 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리고 목사님과 교회 앞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종을 통해서, 우리 한마음 공동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기도합니다. 진리가 뿌리내리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주님께 나아갑시다.

 

오늘 같은 설교를, 고별설교라고 합니다. 성경 안에도 많은 고별설교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죽기 전에, 혹은 어딘가로 떠나게 될 때, 그 공동체에게 남기는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호수아(24)나 모세(신명기) 그리고 오늘 나오는 야곱처럼 신앙의 경주를 다 끝내고 유언을 남기는 겁니다(49). 그리고 바울이나 예수님과 같이, 제자들을 떠나 보내시며 그들에게 중요한 신앙을 가르치시는 것이, 바로 고별설교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바울 사도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삼 년 동안 밤낮없이 눈물로 목회했던 바울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 나는 눈물도 흘리지 못했는데... 이 말씀은 제게 버겁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의 고별설교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십니다. ! 나는 성도님들의 손도 씻겨주지 못했는데... 이 말씀도 역시 제게 너무 버겁습니다!

 

사실, 고별설교는 버겁습니다. 분위기도 비장하고, 설교의 내용도 좀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그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딱 한 마디를 한다면 정말 중요하지 않겠어요? 그런 것처럼, 오늘 야곱의 마지막 순간에, 그 믿음의 발걸음을 과연 무엇으로 요약했는지, 우리는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본래 야곱의 유언 축복은 창세기 49장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보다 더 앞에서, 창세기 48장의 한 사건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바로 야곱이 첫째 손자 므낫세가 아니라, 두 번째 손자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분이 아시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은 무엇인가, 함께 들어보도록 합시다.


창세기 48장은 이렇습니다야곱이 나이 많고 병들어서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웠지요그래서 요셉이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인사를 드리러 갑니다이제 마지막이니까야곱이 손주들에게 축복을 합니다사실 성경에서는 보통 아들들에게 축복을 합니다손주들에게 하는 것은 예외지요예외라는 것은 반대로 말해서그만큼 주목할 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아무튼 야곱이 손주들에게 손을 머리에 얹고 축복을 하는데뭔가 일이 이상하게 꼬이게 됩니다바로 야곱이 오른손으로 첫째 므낫세의 머리에 손을 얹어야 하는데그만 손을 엇갈려서 둘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올리는 겁니다!


예부터 오른손에는 장자의 축복이 있잖아요. 아들 요셉이 이 사실을 잘 생각하고, 첫째 므낫세와 둘째 에브라임의 위치를 미리 잡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모든 사람의 기대를 깨뜨리는 행동을 합니다. 야곱이 노망이 든 것일까요? 말씀을 보니까, 야곱은 병들었습니다(1).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졌다고 합니다(10).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다리를 심하게 저는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32:31). 모든 사람이 볼 때, ! 야곱이 드디어 정신줄을 놓았구나!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야곱 자신이 축복권의 순서를 뒤바꿔서 그렇게 생고생을 하지 않았습니까!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야곱인데, 자신의 역사를 또 되풀이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들 요셉이 보다 못해서 아버지에게 한소리 합니다: “그렇게는 안됩니다!” 누가 첫째 손주인지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야곱이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19): “알어, 아들, 내 잘 알어.”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은 노망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죽음의 현실 앞에서, 오히려 정신이 가장 또렷하고, 그의 영이 가장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야곱, 그는 자녀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 신앙의 놀라운 비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럼, 오늘 이 축복된 시간에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봅시다.


 

2. 말씀 안에서


1) 하나님은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첫 번째 비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야곱을 통해서 창세기가 가르쳐주는 첫 번째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의 입술로 계속해서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하나님은!”하면, 여러분은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라고 선포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님들: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할렐루야! 사실 이 고백은 야곱이 먼저했습니다(15b):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그렇죠. “하나님은?” (성도님들: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여러분, 처음과 마지막이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그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는 믿음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게 합니다. 이 믿음은, 대신에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하는 영적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성도님들: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생각해보면, 성경에서 야곱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의 굴곡을 겪은 사람이 또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야곱은 경험과 삶의 지식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 그가 알어, 아들 내 잘 알어라고 고백했던 이유는, 경험과 지식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경험보다 자신의 지식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4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생육(히브리어 파라흐)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이 약속은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죠. 사람이 꿈꿀 수도 없는 그런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기까지 아들 한 명 안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받았고, 그 말씀을 품었습니다(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히브리어 파라흐)하게 하리라 하시니. 또한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삭이 똑같이 받아서 지켜냅니다(26:22):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그래서 야곱은 자기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그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지켜냈던 것입니다(16): 이 손주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어디에 나오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리고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첫 사람에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창세기 127-28: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히브리어 파라흐)하고 번성하라!” 할렐루야! 에브라임이란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세요? 창세기 4152: “(요셉이)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히브리어 파라흐)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하나님이 최초의 인류에게 말씀하셨던 첫 번째 약속, 그리고 하나님이 첫 번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그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에게 대대로 약속하신 그 말씀, 네가 생육하리라! 네가 열매를 맺으리라!” 그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파라흐바로 에브라임인 것입니다.


그럼 므낫세는 무엇인가요. 이 이름은 잊어버린다(나사흐)”라는 뜻입니다( 41:51). 어떤 큰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 “이전 것을 잊어버린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그래서 히스기야 왕이 국가적으로 위기를 극복한 이후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지요). 요셉이 어렸을 때 노예로 팔려갔잖아요. 종살이 감옥살이를 겪고, 결국 이집트의 국무총리에 올랐습니다. 성공을 했지요. 이제 첫째 아들을 낳고,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모든 고난의 기억들을 이제 잊어버리겠다고 지은 이름입니다. 므낫세. 좋은 이름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습니다. 요셉은 므낫세라고 말하면서, 과거를 잊어버리겠지만, 반대로 야곱은 므낫세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말에 라고 하면, 먹는 배와 타는 배가 있는 것처럼, 히브리말에도 그런 특징이 있습니다. 므낫세라고 할 때, “잊어버린다라는 한가지 뜻(나사흐)이 있고, “환도뼈라는 다른 뜻(나세흐)이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환도뼈와 관련해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던 사람이 바로, 야곱이잖아요( 32:33). 므낫세라고 할 때, 야곱에게는 두 번째 의미까지 연결됩니다. , 자신의 경험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제가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그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구나라는 게 아닙니다어느 이름이 복된 이름이고어느 이름이 좋지 않은 이름인가를 말하는게 아니지요우리는 야곱의 신앙고백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그게 뭐라구요하나님은?” (성도님들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오늘 창세기 48장의 말씀은창세기의 마지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람은믿음으로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괜히 손주들을 축복하는 남의 가정 모습을 보여주는게 아니라는 겁니다그렇습니다인간적인 순리에 따르면야곱은 첫째 손자인 므낫세에게 더 큰 축복을 내려야 합니다그러나야곱은 다른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그것은 오직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바로자신의 경험보다 자신의 생각보다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침례를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침례는 죄사함의 예식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죄가 있는 사람이 받는 예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을 수 없는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침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잖아요! 침례 요한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오 예수님! 제가 침례를 받아야지, 왜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십니까?” 인간의 경험과 생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침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3:15) 하나님이 완전히 사람이 되시는 순간, 죄가 없지만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 되시는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으십니까! 그 믿음의 자리에, 침례 요한의 경험과 생각은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때 하늘이 갈라졌다고 말합니다(1:10).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막혔던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갈라진 사이로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처음입니다. 놀랍게도 마가복음의 마지막은 어떤지 아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졌습니다(15:38). 어떻게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을까요!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험과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막혔던 벽을 스스로 허무시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했던거구나! 이러한 복음의 메시지가 마가복음의 처음과 마지막에 들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선택은 창세기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온 우주에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아! 열매를 맺으라!”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와 욕심 속에 열매를 맺지 못했지요. 오히려 스스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가인이 형제 아벨을 죽였습니다. 대홍수로 노아의 가정만 남고 모든 생명이 진멸 당했습니다. 그러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믿음의 작은 씨앗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미약하지만 그 작은 씨앗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열매를 맺으라!” 그 열매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 그리고 우리입니다. 창세기는 그 마지막에 에브라임을 축복한 야곱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첫째 손주 므낫세가 미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므낫세는 야곱 자신이 기도의 싸움으로 허벅지뼈가 빠졌던 신앙의 경험이 녹아있는 아주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경험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에브라임! “믿음의 사람들아! 생명의 열매를 맺으라!” 바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창세기의 처음에서처럼, 그리고 창세기의 마지막에서도 변치 않고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고백이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한 번 더 고백합시다: 하나님은?” (성도님들: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이 놀라운 은혜 아닙니까? 제가 전에 종교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불교에 대한 건데, 스님들 중에서 뛰어난 몇 사람만 도전할 수 있는 게 있답니다. 바로 3년 동안 독방에서 도를 닦는 겁니다.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밖에서 하루 한 끼만 넣어 줍니다. 3년에 6명 정도 도전을 하는데, 건강 문제도 있고, 또 그게 보통 어렵습니까! 실패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끝에 보니까, 어떤 여승이 3년의 수행을 마쳤습니다. 감독이 인터뷰합니다. 동해에서, 파도가 치는 모래 위에서, 그 여승의 말에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가 3년 동안 도를 닦았는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무리 도를 닦아도 처음과 마지막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문제 앞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물음 앞에 주저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성도님들: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정말입니까? 우리 말씀을 봅시다(시편 50):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1).”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님이기 때문에, 그분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다 책임지신다는 겁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게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7).” 하나님은 특별히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 환난이 와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찬양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겁내지 마세요!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우리의 아버지께서 날마다 역사하심을 신뢰하세요.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삶의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처음과 그 마지막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성도님들: 우리의 처음이고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2) 하나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한 가지 마음을 더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방식을 묵시론적 종말론의 대역전이라고 부릅니다. 뭐라구요? 이해하시겠어요? 어렵지요.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방식은 생각보다 너무 간단해요. 그래서 짧게,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십니다.” 너무 쉽죠! 그런데 그렇게 살려면, 너무 어렵죠. 왜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런데요, 하나님의 이 방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들어 쓰시며 높은 자를 내버려 두십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오. 므낫세가 높은 자이고, 에브라임이 낮은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 둘째가 첫째보다 낫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낮은 자를 높이신다는, 하나님의 방식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메시지입니다.

 

첫째라는 말은 다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둘 자리가 없을 정도로 다 가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둘째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고 갈급한 영혼을 말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대조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다루시는지를 보여줍니다(7:7).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합니다(113:5-9). 반대로 부유한 자는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삽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18:27).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지요! 시골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입니다. 집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 형들은 다 모이지만, 자기는 끝까지 양을 지켜야만 하는 막내 목동입니다. 다윗, 그는 출생으로도 저 밑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힘이 없습니다. 물질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양을 치다가 커다란 곰이 와서 양을 물어갑니다. 소년 다윗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힘을 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댜윗은 곰 앞에서, 그리고 골리앗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싸웠던 겁니다. 그게 가난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하나님의 궤를 모시게 되었을 때, 다윗은 모든 백성 앞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춤을 추고 기뻐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체통을 지키라고 핀잔을 주었지요. 그 때, 다윗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삼하 6: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여도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 왕의 몰락을 생각해보십시오(삼상 15:17): 사무엘이 가로되, (사울)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사울)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사울이 작을 때에, 낮아졌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을 때에,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높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에게 징계를 받았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높아진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했던 것입니다(삼상 15: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여주소서.”

 

하나님의 방식이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십니다. 여호와는 (부한 자를) 가난하게 하시고,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시며,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분이십니다(삼상 2:7).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방식 앞에 우리의 삶은 한가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사울이 아닌 다윗처럼, 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삶, 정말 어렵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를 하며, 씨름을 하던 중에 주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도시라를 기억하라.” 한 번 따라 해 볼까요? “도시라를 기억하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예배사역을 했잖아요. //. 음계입니다. , , 라 중에서 뭐가 높죠? . 뭐가 낮죠? 그럼 우리는 도시라중에서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렇죠. ‘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녔을 때 이야기입니다. 6명 정도가 모여서 박사 세미나를 하는데, 교수님이 신학적으로도 너무 해박하신 겁니다. 책을 논평하고 어떤 주제를 두고 논쟁을 하면 초점을 정확하게 짚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세미나 중에 계속해서 여러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해야 합니다라며, 목사님들보다 더 목사님처럼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선배 목사님이 저에게 귀띔을 해주는데, “양목사, 예전에 저 교수님의 별명이 뭔 줄 알아? 도도야. 처음에 신학교에 교수가 되었는데, 그 때 그분 이마에 도도라고 써있었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보다 똑똑하더라구요! 그 어떤 사람보다 마음이 부유하더라구요! 그 사람의 이마엔 도도가 써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양목사, 그 교수님이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지식을 말하지 않고, 성령 충만을 말씀하시고,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시더라니까!” 여러분, 아시겠지요! 우리 속에는 자기만의 도도가 숨어있습니다.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형제와 자매를 얕잡아보는 순간, 우리 이마에 도도가 새겨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도 성도가 되시겠어요?

 

시시 성도가 있습니다. 시시 성도란,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게 시시하게 보이는 성도입니다. 왜요?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가치를 높게 보지 않습니다. 물질과 명예가 더 소중하니까요. 그러니, 예배를 드려도 시시합니다. 찬양을 불러도 시시하고, 말씀을 들어도 시시합니다. 돈이 안 되니까요, 내가 돋보이지 않으니까요.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라라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라 성도가 무엇일까요? 그렇죠.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성도입니다. 예배드릴 때, ‘라라라!’하는 겁니다. 찬양을 부를 때, 벅차오르는 구원의 감격으로 라라라!’ 하는 겁니다. 말씀을 들을 때, !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하면서 라라라!’ 하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해 뜨는데부터 해 지는데까지~ 주이름 찬양받으리하고서, ‘도도도!’ ‘시시시!’ 이상하잖아요. 어떻게요? “라라라! 할렐루야~”

 

이게 바로 도시라를 기억하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도한 성도가 되겠습니까? 시시한 성도가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라라라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한 삶의 모습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다스리고 계심을 몸소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는, 기존 질서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포로된 자가 자유를 누립니다.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됩니다(4:18). 표범이 어린 염소 옆에서 누워 있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계입니다(11:6-7). 약육강식의 법칙이 깨지는 겁니다. 왜요? 땅의 생존 원리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하늘의 법이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습니다(5:3). 하나님 앞에서 낮아졌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끌어 올리시는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담아낼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이 지날수록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이 되십시오. 아기들은 전적으로 부모를 의존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태도입니다.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고, 부모의 도움을 때마다 간구하는 것처럼, 그러한 마음으로 낮아져서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반대로 절대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이 되지 마십시오. 도도한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고상한 척하지 마십시오. 부와 권력에만 관심을 두는 사두개인처럼, 하나님의 일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오직 어린아이처럼 낮아져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날마다 목말라하는 그런 성도님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 한 번만 더 두 번째 메시지를 마음에 새겨봅시다: “하나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십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000, 도도도 안된다. 시시시 안된다. 라라라 성도가 되자.”

 


3. 말씀을 위하여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하는 예외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야곱이 둘째에게 더 큰 복을 준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험(므낫세)이나 생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약속(에브라임)을 붙잡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야곱의 선택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주신 하나님의 약속, 나의 자녀들아! 생육하라!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중요하게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놀랍게도, 에브라임으로 시작해서 에브라임으로 마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의 처음이고 나의 마지막이라는 믿음의 태도는,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합니다.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만들어줍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높아지려는 우리의 옛 성품을 내려놓게 합니다. 시마다 때마다 나의 힘과 나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합니다. 문제 앞에서 문제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두 손을 하나님께 향해 들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이 기뻐하셨던 자리에서 나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 낮고 낮은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나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마음 공동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었다고 믿습니다. 우리 한마음은 길닦는 예수공동체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고,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길을 닦을 것입니다. 그 길은 어두움을 진리의 빛으로 밝히고, 매서운 추위를 서로 섬겨주는 사랑으로 녹이면서 만들어가는 그런 길입니다. 장차 우리 주님 오실 때,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어서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마음 공동체의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우리 그 때까지 선한 믿음의 싸움을 계속 경주합시다! 그러한 마음을 설교를 마치면서 다시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마음을 모아서, 우리 찬양과 기도로 주님께 고백합시다.